2015년 2월 9일 저녁 7시, 가톨릭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주최하는 사회교리학교 제 109차 기본과정의 두 번째 강의가 명동성당 가톨릭회관 대강당에서 열렸습니다. 총 13번에 걸쳐 진행되는 이번 109차 과정은 2015년 2월 2일부터 5월 4일까지 매주 월요일 총 13주간 동안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가톨릭회관 강의실에서 진행됩니다. 그리고 2월 9일은 그 2회째 강의입니다. 강사는 지난 첫 번째 시간을 맡으셨던 신정동성당 주임신부 겸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장을 맡고 있는 박동호 신부님. 2015년 2월 9일 월요일 저녁 7시, 명동성당 옆 가톨릭회관 3층 대강당에 박동호 신부님이 들어오셨고, 곧 이어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시작은 [사회교리 주간기도문]으로 함께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사회교리 주간 기도문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저희를 복음의 빛으로 비추시고 죄의 속박에서 벗어난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생명의 길을 걷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세상에 구원의 복음을 전하라 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저희가 사랑의 새 계명을 실천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더욱 헌신하게 하소서.


또한 저희가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아 모든 피조물과 창조질서 안에서 조화롭게 살아가고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선을 이룸으로써 이 땅에 사랑과 생명의 문화를 건설하고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드러내는 일꾼이 되게 하소서.


하느님 아버지, ‘사회 교리 주간’을 맞이하여 주님의 일꾼으로 파견된 저희가 자신의 소명을 더욱 깊이 깨닫게 하시고 이 세상에서 참된 사랑의 증인으로 살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2011년 사회교리 주간 |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인준)



다음은 2월 9일의 제2회 강의(총 2시간)의 자료를 바탕으로 강의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이 글 작성에 도움을 주신 분의 제공 자료(녹음과 필기, 사진자료 등)를 바탕으로 재정리된 것으로, 부정확한 내용과 맥락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강사님의 의도와 맥락과 다른 표현이 발견될 수도 있음을 참고해야 합니다. 




‘사회’에 관한 ‘교리’가 따로 있는 것인가?


지난 시간(2월 2일 첫 번째 강의, 가톨릭 사회교리 입문)에는 공식적이지는 않지만 개인적으로 ‘사회교리란 이름이 적절치 않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회교리’라고 하면, 교리는 따로 있고, 사회에 관한 교리가 또 있는 것이니까, 익혀도 되고 안 해도 되는 Optional한(선택적인) 태도를 익숙하게 만듭니다. 단적으로 ‘사회교리’라고 하면, 제 또래의 신부님들이나 심지어 후배 신부님들 중에도 ‘아직도 그딴 거 하냐?’라고 하는 분이 계셔요. 그래서 ‘사회교리’를 취미나 관심사 정도로만 보는 것 같습니다. 


‘사회교리’는 정통 가톨릭 교리


그러나 사실상 용어가 그렇지,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500여년 만에 개편한 표준교리서입니다. 유명한 신학자가 펴내는 개별적 교리서. 우리나라 책방에 가면 여러 가지가 있죠. 그런 개별적 교리서가 아니라 가톨릭 교회의 표준 교리서가 네 편인데, 첫째 신앙고백, 둘째 신비의 기념과 성사거행, 그리고 셋째가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넷째가 그리스도인의 기도이고요. 


‘사회교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고 거룩하게 살며 그리스도인답게 기도를 하며 살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표준교리서의 제 3편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 내용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 중에서도 1부는 그리스도인의 소명(召命)입니다. 부를 소(召)자 목숨 명(命)자 아닙니까? 그것은 인간학적으로 보았을 때 현대인에서는 대단한 갈등입니다. 나는 내 식대로 살어! 자유인이잖아요.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란 하느님이 날 불러다가 명령을 하니 능동적 주체라기보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하느님 앞에서 수동적 존재. 하느님이 시키는 대로 할거나 말거냐? 그런데 현대인은 나의 자유의지에 따라 할거나 말거냐 인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느님 시키는 대로 살겠습니까? 내 자유의지대로 살겠습니까? 자유의지대로 살겠다고 대놓고 살겠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을 정도로, 이것은 철학적으로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은 주체적 인간인가?


근대로 넘어와서 ‘주체적 인간’, 한 개인이 여러 가지 조건에 얽매이지 않고, 한 삶의 온전한 주인이다. 이게 강하죠. 극단적으로 ‘내 삶의 주인은 나지 왜 하느님이야!’ 라고 생각할 수 있고요. ‘나지 왜 남이야!’ 그렇게 생각한다면 철학적으로 단순한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교회는 끊임없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주체적이지 않고, 도구적 존재다. 하느님이 날 불러서 명령을 내렸고, 그걸 수행하면 하느님의 사람인 것입니다. 즉 신앙인이고, 아니면 내 식대로 산다고, 내 식대로 믿겠다고 했을 때에는 아무리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차에 십자가를 걸고 다녀도 신앙인과 거리가 멀다는 게 그리스도교적 관점입니다. 불교에서는 스스로 각(覺)하는 것이겠지만요. 


[참고] 사회교리의 구체적 원리들 .. 가톨릭교회 교리서 목차를 중심으로

        (사회교리에 해당되는 부분은 제3편 그리스도인의 삶)


 제 3 편 그리스도인의 삶


        제 1 부 인간의 소명: 성령 안의 삶


           제 1 장 인간의 존엄성

              제1절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   제2절 참행복에 부름 받은 우리의 소명

              제3절 인간의 자유              제4절 인간 행위의 도덕성

              제5절 감정의 도덕성            제6절 도덕적 양심

              제7절 덕                          제8절 죄


           제 2 장 인류 공동체

              제1절 인간과 사회               제2절 사회생활 참여

              제3절 사회 정의


           제 3 장 하느님의 구원: 법과 은총

              제1절 도덕률                     제2절 은총과 의화

              제3절 어머니요 스승인 교회


        제 2 부 십 계 명


           제 1 장: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제1절 첫째 계명                 제2절 둘째 계명                제3절 셋째 계명


           제 2 장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제4절 넷째 계명                 제5절 다섯째 계명             제6절 여섯째 계명

              제7절 일곱째 계명               제8절 여덟째 계명            제9절 아홉째 계명

              제10절 열째 계명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성령 안의 삶인데 그래서 더더욱 거룩한 거 같은데 제 1장이 인간의 존엄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으로부터 명령받은 것은 인간을 존엄하게 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이웃사랑이란 말입니다. 두 번째는 인류공동체, 사람은 본성상 공동체, 휴먼 패밀리, 인류가족의 선의, 공동선이죠. 그것을 도모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기적인 내 마음과는 전혀 거리가 멉니다. 나는 행복해야 겠다. 거기까지는 맞고, 하느님은 나를 사랑한다는 맞는데 그 경로가 인간이 타인을 사랑하고 헌신하고 공동체의 선의를 위해 내 몸을 내어놓음으로써 하느님이 이렇게 되는 거지 열심히 기도해서 하느님이 어여삐 여기셔서 날 건강하게 해주는 대박 터트리는 건 아니죠. 이렇게 이기적, 개인주의적 신앙이 자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제 3편 그리스도인의 삶 제 1부 인간의 소명: 성령 안의 삶의 제 3장 하느늠의 구원: 법과 은총]에서 등장하는 은총도 흔히 말하는 거저주시는 은총 이런 식은 아닙니다.


제 3편 그리스도인의 삶의 제 2부가 십계명


십계명의 제 1계명이 하느님 사랑인데, 그게 우리와 수준이 달라요. 우린 하느님 흠숭하고, 굿하지 말고 점보지 말라는 것이죠. 거기에는 국가, 재물, 쾌락, 인종 이런 것을 절대시하는 것도 1계명 어기는 것으로 봐요. 국가와 충돌이 된다는 겁니다. 국가와 하느님이 충돌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3계명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라는 것은 성당 가는 것만 생각하지만, 주일의 휴식과 성당에 가는 것, 그래서 밤 미사마저도 못가면 “아! 갈려고 했는데 못 갔습니다.” 그게 아니라 나와 똑같은 필요에 의해 미사에 참여하는 것 못했을 때, 그걸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합니다.

이런 내용이 1계명부터 3계명까지 들어있습니다.


4계명부터는 부모님께 효도하라는 것도 나오지만, 멀리 계신 부모님께 찾아뵙지 못해 불효자식 용소하소서 그런 얘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시민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의무, 노동자가 고용인 혹은 회사에 해야 할 마땅한 의무, 회사가 노동자에게 해야 할 마땅한 의무, 이러한 관계까지 포함하는 게 4계명입니다. 


5계명은 살인하지 말라는 한국교회는 낙태문제만 생각하고, 혹은 사형제도 얘기만 생각하고, ‘살인하지 말라’는 한국사회에서 굉장히 민감한 군비경쟁이 관계됩니다. 군비는 아무리 방어적이라도 타인의 신체와 생명을 빼앗는 것이죠. 총 한번 쏴보시겠습니까? 총 한번 맞아보실래요? 대포 한번 맞아보실래요? 핵미사일 한번 터트려 보실까요? 그것이 아무리 방어적이라도 남의 신체를 빼앗는 것이죠. 그것이 나를 지키는 정당방위라도 누군가를 죽이는 일입니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더 심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기억하십니까? 벌써 잊혀 졌어요. 사실상.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복음의 기쁨’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인간생명에 대한 한계를 규정한 것이라고 말씀하시죠. 그것은 마지노선이죠. 타인의 존엄에 대한 마지노선이 ‘살인하지 말라.’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죽이지는 말자는 것이죠. 왜, 생명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니까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오늘날에는 경쟁과 경제, 경쟁과 적자생존의 원리에 바탕을 둔 시장과 금융투기의 절대자유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는 이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비추어 보아서 이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것이 목을 졸라 죽이진 않지만 사회적 타살이란 점을 주목하는 것이죠.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 경제라는 것입니다. 길거리에서 노숙자 노인이 죽어도 아무도 관심이 없지만, 주식시장에서 1 포인트 주가가 떨어지면 호들갑을 떤다는 것이죠. 


실제로 무수히 많은 인간이 굶어죽는 데, 한쪽에서는 굶어죽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식량들을 내다버립니다. 그런데 우린 그걸 쳐다보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굶어죽어요. 모른다고 얘기하면 안돼요.무지의 죄, 게으름의 죄입니다. 조금만 찾아보면 알 수 있는 정보통신의 세상이잖아요. 사람이 수천만이 매년 죽는데, 세계 식량보고서는 1년에 2천만명의 12세 미만 아이가 죽는다고 합니다. 가장 미약한 존재인 어린이는 부모와 사회가 보호해야 하는 가장 약한 존재입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줘야 살아남는 12세 미만 아동 중 1년에 2천만 명이 죽습니다. 전 세계 120억 명이 먹을 만큼의 식량이 소출되는 데 버려지는 겁니다. 그게 사람을 죽이는 경제인 겁니다. 우린 그런 경제 이제 안 된다고 말해야 한다는 겁니다. 


6계명은 ‘간음하지 말라.’입니다. 말 꺼내기 애매해보입니다. 우린 발언하니 않는 것으로 품위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 같지만, 대놓고 말하면 동성애의 원인은 모르겠다. 그런데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어쩔 수 없이 동성애 경향을 보이는 이들을) 존중하고 동정해야 하며 어떤 차별의 기미도 보여서는 안 된다”(2358항)고 가르칩니다. 동성애의 그 이유를 모른다. 그래서 차별의 기미를 보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동성애자들을 ‘에이 더러운 놈들.’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6계명이에요. 


7계명은 ‘도둑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십계명과 가톨릭교회 교리서의 십계명은 달라도 너무 다르죠. 우리가 아는 십계명은 개인적이고 내적이고 성당 안에서의 얘기 같지만, 그것은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겁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문헌이 그대로 가톨릭교회 교리서의 내용으로 반영이 된 것이고, 시대는 무려 30 여년 지났지만, 사목헌장은 십계명에서 분야별로 흩어져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회교리가 교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오늘 강의내용과 관련해서 배포된 자료를 보시면, 사회교리 원리들과 사회생활의 근본가치들에 대해서 적어놓았습니다. 나눠드린 자료는 간추린 사회교리란 책 2만 몇 천 원짜리 책의 반절 정도 해당 내용을 나름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제대로 정리했는지는 확인해보시고 압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천주교주교회의 E-book으로 나와있습니다. 살펴보시고, 자주자주 보시면 됩니다.  


간추린 사회교리 E-Book 보기


그리스도인다운 생각, 평가, 그리고 선택


사회에서 어떤 문제가 벌어졌을 때, 그리스도인이라면 신앙인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하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물론 고민하면 안 돼죠. 고민하면 불순하니까. 신앙인은 성당에 와서 성사 생활하고 기도하고 아멘하고 가면 되는거지, 만일에 신앙인이 정치, 국제관계, 남북문제를 생각하면 왜 교회가 그딴 것을 생각 하냐고 혼구멍이 날 수도 있죠. 그러나 사회교리는 ‘사회교리’라는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고, 성찰의 도구이며 생활의 지침입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 교리서 주교회의 홈페이지 등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의 제 3편이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간추린 사회교리’의 전반부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뒤에 가서 정치, 경제, 문화, 교육 그리고 환경문제까지 거론합니다.  사회교리의 원리들은 일곱 가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곱 가지 원리는 성찰과 판단의 그리고 행동의 잣대가 되는 것이므로, 이를 통해서 ‘성찰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인간의 존엄입니다. 너무 뻔한 얘기면서도 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존엄’에 대한 관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의 인간존엄 개념이 충돌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하느님 때문에 존엄하다고 말하고, 비 그리스도인은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인간 그자체이기 때문에 존엄하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하느님 덕분에 중요하다.


우리가 하느님 때문에 중요하다. 하느님을 닮은 인간을 만드신 거죠. 하느님을 닮았다. 닮았으니까 여자에요 남자에요.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고 중성이냐? 그러면 성전환수술했냐? 그건 구약에 나오는 이마고와 라이크니스 관점에서 봐야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누군가를 닮았다는 건 권력을 행사하는 영역을 장악한 주먹 센 사람이 있죠.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주먹 앞에서 벌벌 떨지만, 그 주먹이 눈 앞에서 안보이면 흉을 보게 되죠. “무식한 놈!” 그런 식이고,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면 아예 뭉개고 개기게 되죠. 멀리 있으니까 자릿세도 안 내려고 하겠죠. 그래서 세운 것이 바로 동상입니다. 바로 너 앞에 내가 있다는 상징인 겁니다. 그게 이마고이고 라이크니스인 것입니다. 내가 바로 네 앞에 있다는 상징으로 동상을 세웠고,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보호한다. 대신 충성하라. 자릿세 받으면 다른 행패를 막아주는 거죠. 


그런데 이것이 국가적 규모로 넘어가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일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지도자들이 나라를 홀랑 넘겨주고 내 것을 더 가져가게 만들었습니다. 그걸 나라 빼앗겼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고관대작들이 법이나 충성심으로 의무를 다한 백성을 지켜줘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죠. 그러면 그 고관들에게 우리가 여태까지 바친 거 토해내야겠죠? 


그러니까 동네 돌 깡패 얘기하니 웃지만, 규모를 키우면 과거에는 그랬는데 요즘 안 그럴까요? 그건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대명천지의 세상이고 그 시절은 암흑의 시절이었다고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대명천지였던 것이고, 그러한 어느 시대에나 깨어있는 자, 의식 있는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 옛날에 그랬대.” (지금은 아니잖아) 이런게 아닙니다. 이미지 앤 라이크니스가 그런 것입니다. 


두 번째로 지저스 크라이스트가 하느님과 레벨이 같은데 인간이 된 겁니다 그래서 하느님 아들과 레벨이 같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허투루 대합니까? 그렇게 모든 사람은 하느님을 닮은 존재인 것입니다. 삼위의 세번째 성령이죠. 삼위일체 하느님과 레벨이 같아서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 사회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간 존재는 뭔가 대신할 수 없다. 사람만이 이성과 지성을 갖습니다. 그런데 이건 동물학자들이 듣기에 그렇죠. 개만도 못한 사람도 있어요. 연산능력, 추리능력은 동물 중에서 침팬치가 최고랍니다. 셈도 합니다. 덧셈과 뺄셈을 합니다. 돼지도 합니다. 연산능력 추리능력 있다는 겁니다. 동물학자는 그렇게 주장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지성과 이성을 가지고 인간만이 진리를 추구할 수 있다. 두 번째 양심이 있다. 인간만이 선과 악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안다. 천부. 태생적으로 있다는 겁니다. 국가가 준 게 아니라 제도가 아니라, 인간은 그 자체로 본래, 천부의 innate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자유의지가 있다. 인간만이, 다른 피조물에게 없는 것이 자유의지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걸 합쳐서 인간 존엄함이 절대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가 말합니다. 프란츠 파농(1925~1961) 같은 사람. 알제리 출신의 프랑스 작가이며 정신과 의사였죠. 그는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란 책(국내 1998년 번역출간)에서 말하기를 “한 인간 삶의 무게가 심해 바닥의 깊이보다 무겁다.”라고, 이 말이 맞죠. 점점 더 인간이 하찮아지는 겁니다. 사람 알기를 우습게 아는 세상이죠. 돈의 가치는 더더욱 사람을 우습게 아는 그런 세상이 되어가는 겁니다.





우리는 ‘인간존엄’이란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본다. 


우리는 안경을 끼고, ‘인간존엄’이란 안경을 끼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존엄에 반하는 것과 인간존엄을 증진하는 것들이 보입니다. 그랬을 때 우리는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그런 것은 그렇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존엄’이란 표현은 매우 추상적이지만 그것을 많은 나라의 헌법에서 내용으로 실현했다고 볼 수 있어요. 바로 이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게 ‘권리’입니다. 그걸 약어로 인‘꿘’이 아니고 인‘권’ 더 자세히는 ‘인권들’입니다. 인간의 기본적 권리‘들’입니다. Human fundamental rights! 단수가 아니고 복수입니다. 여기 계신 여성이 60~70% 정도 되죠? “어디 여자가 밤에 싸돌아다녀!” 100년 전이 그랬을 겁니다. 그것은 자기 몸을 가지고 머리 속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내 삶을 구체적으로 결정하는 권리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권이란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걸 아무리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성서적 바탕이 있다거나 철학적 원리가 있다 해도 역사적으로 오래되지 않은 겁니다. 우리나라는 느닷없이 근대화가 되었죠. 그런데 여성의 투표권이 주어진 예를 들면 스위스에서는 1960년대에 특히 스위스 연방국의 모든 여성에게 투표권이 전부 주어진 것은 1970년대의 일입니다.


인간을 정말 귀하게 여기는가! 때론 돈값을 매기는가? 돈이란 기준을 들이대고, 학력, 생김새, 국적, 피부색 등을 따지기 시작하면 ‘하느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가 인간의 존엄함이고요. 그 배경으로 이게 그냥 된 게 아닙니다. 사람의 이성과 지성, 자유의지가 피 박살이 나고 나서의 일입니다. 서방국가들은 세계 대전의 참상 앞에서 ‘정말 인간의 자유의지가 있는가? 이성과 지성이 있는가?’ 그런 회의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이 이렇게 사악할 수 있는가?’ 집단적으로 전쟁은 삼국지의 유비, 장비, 조자룡이 어떻다고 해도 죽어야 10명, 산더미라고 해야 2~3만명이 될까요? 그런데 2차 세계대전에서 한 방에 날라가는 겁니다. 몇 명이 죽은지도 몰라요. (민간인 포함 대략 5천만~7천만명 추산, 그 중 절반에 가까운 2340만명이 소비에트 연방국의 사상자 수.)


 엘리너 루스벨트


그래서 엘리너 루스벨트(Anna Eleanor Roosevelt, 1884.10.11 ~ 1962.11.7., 미국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부인)는 여섯 개 종교단체의 종교사상가들 초대해서, ‘당신들 경전엔 적어도 사람을 사랑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자는 생각이 들어있지 않나?’ 그게 인권선언입니다. 1948년에 있었던 일이고, 그만큼 인류가 겪은 끔찍한 경험의 바탕에서 만든 게 인권선언입니다. 


서방과 이슬람, 사회주의 세력 등이 힘을 합쳐 만든 것이 바로 ‘세계 인권선언’인데, 자유권, 평등권, 연대권 등이 있죠. 자유의 원리는 정치 시민 경제 문화 활동에서의 자유이고 평등은 집단적 평화권 등을 말하는 데, 서방은 자유를 우선시하고, 사회주의는 평등을 앞세우니, 그래서 자유권 우선하는 국가와 평등권을 우선하는 국가간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터키 등이 표결에 불참합니다. 그러니까 이 인권선언은 완전한 것도 아니란 것입니다.


당신에겐 ‘인권 감수성’이 있는가?


그리고 교회는 인간의 존엄함을 증진함으로써 인간의 존엄함을 수호함으로써 지킴으로써 공동선 실현에 앞장선다는 것. 예를 들어 우리는 현실에서 ‘인권 감수성’을 스스로 물어봐야 합니다. 인권이란 추상적 가치를 제도로 완성시켜가는 과정이죠. 그게 한걸음 한걸음 나가는가 뒤쳐지는 가. 평등권 가운데 이슈는 사회적 권리인 행복추구권이라고도 하고 복지권이라고도 하죠. 이게 권리냐 아니냐? 이런 쟁점. 복지가 권리인가 아닌가? 우리나라는 선별복지냐 보편복지냐? 하는 문제들. 


수급자와 수급‘권’자


예를 들어, ‘기초생활수급자’라고 했죠? 이른바 빈곤선에 몰린 이들에게 그 차액을 국가가 제공하여 품위 있는 삶을 살도록 하는 거죠. 그런데 이 용어가 바뀌어서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되는 겁니다. 이게 논란이었던 거죠. 권리라고 보면서, 처음에 기초생활수급자였어요. 그러다가 용어가 바뀌어서, 기초생활수급권자입니다. ‘기초 생활에 필요한 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복지에서 누구에게 주나 어떻게 주나 무엇을 주는가? 그리고 그 재원과 관련해서 몇 가지 원칙이 있죠. 0세부터 5세까지 보육비를 국가가 제공한다고 한다면 그 재원은 세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선별이 되면, 특정한 대상을 향하면 선별입니다. 65세 이상 지하철 공짜인가요? 아니죠. 누군가 재원을 마련해야죠? 권리 이동의 권리로 ‘경비를 지불하지 않을 권리’를 주는 겁니다. 그걸 공동이냐 특정인 대상이나 이런 요소들이 존재합니다.


권리의 대립: 소유권(처분권)과 노동권


경제권이란 것도 있어요. 소유권과 처분권 내 것은 내 것이죠. 처분할 수 있어요. 그런데 노동권이 있어요. 사기업이 내 회사에요. 공장 문 닫고 처분할 권리 있죠? 그러면 노동자는 어떻게 해요? 충돌하죠. 그럴 때 제3의 힘이 개입하죠. 소위 노사정. 이쪽 권리 옹호하면 저쪽 권리 침해되고, 첨예한 문제입니다. 땅은 더 합니다. 팔아먹으려는 데, 사는 전세입주자가 있을 수 있죠. 주거권이란 게 있죠. 소유권과 처분권은 권리고 월세든 전세든 인간 몸이 있으니 주거권도 노동권도 권리입니다. 그래서 사람 목숨 있는 한 어딘가 땅을, 몸을 대야 합니다. 충돌하죠. 재개발지역이 다 그런 것이죠. 


예컨데, 발전권이 그런 겁니다. 중국 얘기 많이 하면서, 황사 그건 예전부터 있었는데, 공업개발하고 공장지대 거치며 미세먼지가 쑤욱 넘어오는 거죠. 거기서 환경권과 건강권이 침해되는 겁니다. 그래서 ‘보내지 마!’ 하면 ‘우리도 먹고 살아야지!’ 하는 거죠.


아마존은 지구의 허파입니다. 그 숲에서 배출하는 산소로 지구가 먹고 사는 데, 개발권 발전권 이런 것과 환경이 충돌합니다. 그래서 탄소 배출권 쿼터제 등을 말하지만, 그걸 많이 배출하는 나라는 저항감이 있는 겁니다. 우리 같은 경우, 이성과 지성이 있으니 말하고 싶죠. 그런데 넌 딴 생각하냐? 말을 못하게 하거나 가두는 경우가 있었죠. ‘말 안들어? 두들겨 패면 듣게 되어있어!’ 라고 하는 거 말입니다.


그래서 불편하다고 덮어버리고, 귀찮다고 하지 않으면,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롭고 괜찮아 보이지만, 사실상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는 인권과 무관해요. 하느님과 성령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사람에 대한 얘기는 잘 안해요. 어제(2/8 연중 제5주일) 제2독서인가요. 


코린토 1서(9,22)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교회 안팎에서 보면, 사실 사람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인권을 침해하는 쪽은 주로 힘이 센 사람입니다. 약한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는 겁니다. 


2015년 2월 9일 열린 제109차 사회교리 기본과정 2회차 강의(2시간) 중 1교시 끝.


위 내용은 도움을 주신 분이 제공한 자료를 바탕으로 재정리된 기록이기에, 다소 부정확한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실제로 강사 박동호 신부님의 의도와 맥락과 다른 표현이 발견될 수도 있음을 참고해야 합니다. 


참고. 가톨릭 사회교리학교 109차 일정 보기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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