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차 사회교리 기본과정 (13주간)

2주차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들과 가치들(2시간) 2교시

박동호 신부님(서울대교구 신정동 성당 주임신부 겸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201529일 저녁 8, 가톨릭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주최하는 사회교리학교 제 109차 기본과정의 제2주차 강의의 제2교시가 명동성당 가톨릭회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13주에 걸쳐 진행되는 이번 109차 과정은 (2015.2.2~5.4) 매주 월요일 총 13주간 동안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가톨릭회관 강의실에서 진행된다. 2주차 강의인 29일은 첫 번째 시간에 이어 신정동성당 주임신부 겸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장을 맡고 있는 박동호 신부님이 강사로 나섰다. 

 

다음은 29일의 제2회 강의(2시간)의 자료를 바탕으로 강의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이 글 작성에 도움을 주신 분의 제공 자료(녹음과 필기, 사진자료 등)를 바탕으로 재정리된 것이며, 부정확한 내용과 맥락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강사님의 의도와 맥락과 다른 표현이 발견될 수도 있음을 참고해야 합니다.




사회교리의 일곱가지 원리들 


사회교리의 원리들 일곱가지는 인간의 존엄성을 기초로 하여 공동선, 재화의 보편적 목적(지상 재화의 공동사용권), 사회적 약자를 위한 우선적 선택, 보조성의 원리, 책임있는 참여, 그리고 연대성의 원리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앞선 시간에 첫 번째 인간의 존엄함에 대해서 얘기한 바 있고, 두 번째는 공동선입니다. 사실상 이익이란 것은 선할 수도 있는데, 악할 수도 있어요. 내 경제적 이익이 누군가의 손해를 유발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린 공동선을 공동의 이익 정도로, 몇 가지로 제한하는데요. 교회가 말하는 공동선은 가정, 또는 회사 학교 이런 나름 목적 있죠. 이것이 내가 나답게 가정이 가정답게, 회사가 회사답게, 학교가 학교답게 만드는 것이죠. 여기서 뭐가 답냐는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이고 복잡한 문제입니다.


공동선이란 무엇인가?

 

그래서 공동선이란 집단이든 구성원 개인이든 더욱 충만하고 더욱 용이하게 자기 완성을 추구하도록 하는 사회 생활 조건의 총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걸 소위 자기완성이라고 하죠. 나를 꽉 채우는 겁니다. fulfillment입니다. 영어 쓰면 혹시 못받아 적으니까 한글로 적어서. ‘풀필먼트뭐 이건 끝없는 과정이고, 신앙적 관점에서 본다면, 하느님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죠.

 

보다 쉽게, 보다 충만하게 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야 하는 겁니다. 여기서 저기까지 죽 가면 되는데, 가는 중에 가시밭길, , 웅덩이가 있다는 것. 극단적으로 그럴 수 있죠. 그럴 때 보다 용이하게 보다 충만하기 자기완성을 실현하는 사회생활의 총화. 즉 사회생활의 총화는 인간의 삶과 자연환경을 모두 포함합니다. 가정, 문화, 경제, 정치, 세계질서 뿐만 아니라, 자연환경이 개인과 모든 이의 완성에 기여할 때 우리는 공동선이 실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자기완성의 실현, fulfillment

 

이를테면, 경제적 조건이 괜찮으면 좋은데, 너무 빈곤하면 어떻습니까? 창피할 수 있다는 거죠. 물론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신 수녀님들은 행복하실 수 있겠지만, 내가 나다워야 하는 데, 너무 배가 고프면 창피한 겁니다. 경제적 조건이 어느 정도 페어한가? 교회는 어느 정도라고 말하냐면, 자신과 가족들이 생활할 수 있는, 품위있게 생활하는 정도에, 더하기 약간의 저축에 필요한 소득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다운 삶을 살고, 가정의 삶을 꾸릴 수 있는, 그렇게 나름대로 그럭저럭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또 돈만 있다고 다 해결되는 건 아니죠.

 

인간은 누구나 홀로 존재할 수 없기때문이죠. 내 가정과 이웃 가정의 관계라는 게 또 있죠. 사회와도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이런 걸 문화라고 할 수 있어요. 또 회사도 마찬가지죠. 경제에 쪼들리면 불의를 저지를 확률이 높죠. 회사도 품격을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또 정치적으로 내가 가진 생각을 표현하고 싶은 데 조건이 안 되는 거예요. 말하면 혼난다든지, ‘넌 말하는 게 그 따위로 하느냐!’라든지. 그러면 철조망이 하나 있는거죠.

 

풀필먼트인데, 그것에 이르기 위한 과정에 장애물이 가능한 한 적은 것 그러한 사회생활 조건, 컨디션이 쑥 가는 건데, 가려고 하니 가시밭길 있어서 가다가 웅덩이 빠지고 뒹굴러서 머리 깨지고 상처투성이라면 갑니까? 그래서 공동선을 말하는 것이고, 이런 걸 보편이라고 합니다.

 

이걸 자꾸 공동의 이익이라고 하는 데, 다수의 의견을 따른다고 말할 때, 그건 민주주의적 결함이 될 수도 있어요. 사실 다수의 의견을 따른다는 건, 다수가 소수를 배려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소수를 제외시키면 약육강식이 됩니다. 공동선과 거리가 멉니다. 우리나라는 집단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 사회성이 강하면서 다양함을 부정하는 경우가 있죠. 그리고 일치를 획일성으로 동일화시키기도 합니다.

 

공동선이란 개념을 너무 지나치고 쉽게 공동의 집단 이익으로 환원하는 경우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복지는 미국식과 스웨덴식 충돌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자유와 사회의 충돌입니다. 우리가 복지 얘기할 때, 미국과 스웨덴식은 그 나름대로 조건의 총화를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갖추기 위해 다른 집단에 피해를 끼치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죠. 예를 들어 제국주의 일본 시절에 일본 내부에서는 공동선이 될 수도 있는데, 일제 치하의 아시아 여러 나라를 피폐하게 만들었죠. 이런 역사적 경험으로 보편선을 이야기합니다.

 

그 안에서 인류보편이 공동선에서 보편선으로 가야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 정책이 내부적인 공동선의 조건을 충족한다 해도 그것이 다른 나라를 훼손하는 사건이 역사적으로 벌어졌으니, 그러한 과정에서 보편선을 말하는 것입니다. 공멸의 길로 갈 수 있으니까요.

(* 요한 바오로 2. 1920년 출생. 1978~2005년 교황 재위)

 

지상 재화의 공동사용권... 땅을 소유한다는 것


세 번째로는 공동선을 실현하려면 지상재화를 어느 한 소수나 집단이 소유하는 걸 절대적으로 막아야 합니다. 소유권의 절대화가 아니라 지상재화를 공동사용에 목적이 있다. 극단적 사례가 땅입니다. 땅을 사람이 만들었나요? 그런데 땅을 소유하고 배타적 권리 주장합니다. 다른 이는 접근도 이용도 안 되죠. 땅 없는 사람은 공중에서 살아야 하죠.

 

모든 지상의 재화는 그 지상에 사는 모든 이를 위해 있는 것. 그게 정의다. 누구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하느님이 왜 땅을 있게 했을까요? 모든 사람이 땅에서 나는 소출을 갖고 먹고 살도록 하는 것. 게다가 현대 사회에서는 지적재화도 생겼죠.



소유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1224/5~1274)은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저 과자가 과자인 이유는 뭐냐? 생명의 에너지인가? 과자의 존재이유는 사람 입으로 들어가서 소화되고 하느님 찬미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저 사람은 과자를 먹지도 않으면서 남을 안주는 거예요. 그런데 과자가 존재이유를 실현하지 못하고 외롭게 있다는 것은 나쁜 겁니다. 과자를 먹어주는 게 정의인거죠. 그것을 신학대전에서는 사물의 본성에 맞게 실현하는 것을 정의라고 합니다. 과자는 배고픈 사람들 입속에 들어가라고 있는 게 과자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제가 앞에 계신 분이 갖고 있는 과자를 보면서, “과자 좀 주세요!”라고 하는 데 들은 척을 안합니다. 그러면 그 옆에 계신 분에게 과자 좀 주게 해주세요!”라고 외교적 수단을 써봅니다. 그런데 과자의 과자다움을 실현하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을 토마스 아퀴나스는 빵에 비유합니다. ‘빵을 안 먹고 창고에 쌓아두고 있는 데, 그런데 배고픈 이에게 빵을 안 준다. 그럴 때 강탈은 지상의 정의다.’ 소유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어떻게 쓰는가가 지상재화의 보편적 목적입니다.

 

칼 폴라니의 <거대한 변환>이 말하고자 하는 것



그러나 우리사회의 탐욕이 너무 지나쳐서 갖고 있는 게 목적인 사회가 된 것이죠. 이러한 점에 대해서 칼 폴라니(Karl Ploanyi, 1886~1964)<거대한 변환(The Great Transformation)> 책에 따르면 인류의 대사기극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고 팔 수 없는 걸 사고 파게 만드는 것. 사고 팔리지도 않는 것. 바로 땅입니다. 사람의 소유가 될 수 없고, 땅이 먼저 있고, 사람이 있는 것인데 말입니다. 하느님이 땅을 먼저 만들었는데, 땅에 사람이 속한 것 그런데 땅 값어치를 매겨 사고파니, 이상한 일이라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사람이 죽어버리기도 하고 말이죠. 부동산 시장이란 표현이 있죠. 원래 시장이란 콩나물 같은 걸 파는 곳이죠.

 

또 하나는 사람. 사람을 노동력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구별기준이 과연 적절한가요? 그것은 이제 너무 당연하게 여기면서 사람을 돈으로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국-난-극-복- 정말로 우린 일어난 걸까?


세 번째는 돈입니다. 단순한 거래수단인데, 이제는 돈이 돈을 버는 세상입니다. 실체 없는 론스타라는 데가 미국 몇 사람 펀드 만들어 회사 샀다 팔았다하면서 외환은행으로 4조 원 정도 먹었다는 얘기가 있어요. 문제는 이게 숫자상 4조인데, 실물시장에 들어와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겁니다. 금융시장이 한번 출렁이면 실물시장에는 쓰나미가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금융위기는 인간의 위기다.’라고 교황님이 말씀하셨죠. 사람이 돈의 노예가 되는 겁니다. 우리 외환위기 겪었죠? 가만히 있는데, 때려 부순 것도 아닌게 회사가 없어지죠? 거기서 어떤 분들 일반화의 오류에 빠져 있습니다. 사실 그 시절에 누군가는 씨익 웃었습니다. 사람들은 매체들은 위기위기 외치는데요. IMF 위기 극복했나요? 넘어진 게 위기죠? 일으켜 세워졌나요? 그걸 극복이라고 하나요? 사람의 태도와 언어가 환각상태 일으키게 한 게 IMF입니다. ‘---

 

당시 대부분의 시민들은 난리가 났지만, 어떤 이들은 돈을 쓸어담았습니다. 그런데 자꾸 위기 위기하면서 모든 국민이 힘을 합쳐 일어나자! 라고 했는데, 그러면 넘어진 사람 일어나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 자식들까지 위기에 내몰린 상황이죠. 그런 걸 불과 20년만에 극복했다는 게 말이 되는가요? 누구에겐 위기가 하늘이 준 절호의 기회가 됩니다. IMF 당시 미국 한인신문에 부동산 광고로 난리법석이 난 적이 있어요. 한국에서 땅 사고 미국에서 달러로 지불할 분을 찾는 광고였는데, 당시 원화 달러 환율이 2천원으로 올라갔죠? 얼마 전 1천원에서 2천원이 되어버리니 우리나라 집 값은 반 값이 된 셈이었어요. 그래서 그 시절에 한국 집값 너무 비싸다고 생각하던 이들이 그 시절 반값에 집 못 구하면 바보란 말도 생겨났습니다. 그러니까 누군가 절호의 기회가 되는 것. 지상재화는 그런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우선적 선택 


네 번째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우선적 선택입니다. ‘우선입니다. 그러면 어떤 일 벌어져요? 사회적으로 ‘well to do 하는 사람’, 약자는 혼자 살 수 없는 사람이라면, ‘well to do’한 사람은 혼자 살 수 있는 거죠. 교황님 말씀처럼.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주려면, 돈과 제도가 필요하죠. 그걸 가용하는 주체는 Well to do하거나 힘센, 파워풀한 사람들. 교회가 이들을 찾는 것은 그들의 파워를 이렇게 선행에 쓰라고 요구하라는 겁니다. ‘여러분 행복하게 사세요!’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가진 재물과 권력과 능력을 사회적 약자를 위해서 쓰는 게 여러분에게 행복한 삶이라고 얘기하라는 겁니다. 우리는 그런 말 못하죠. 왜 내껀데, 나한테 그러냐! 그런 말은 나 몰라라 하고, 강한 사람에게는 그런 말 못하고 있다가 약자들한테 가서는 뭐라고 그래요?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것이다!’라고 하죠? 그것은 기만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굉장히 온화한 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매우 심각하고 날카로웠습니다. 뉴욕 양키스 스타디움에서 미국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해요.

 

지금 라자로가 대문 바깥에서 종기투성이로 그냥 배고파 죽으려고 하는데, 그런데 부자들은 안에서 고운 자주색 옷을 입고, 날마다 치부를 한다!”고 하니까 미국 사회가 벌컥 뒤집혀졌죠. 우리나라에서는 교황님이 미국 갔더니 환호했다고 그렇게만 소개되었지만, 실제로는 여러분 가진 부 때문에 라자로가 문 밖에 있는 것이라고 질타를 합니다. 우린 이런 말하면 싫어해요. 이런 말 하면 부자를 배척한다거나 미워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정치적 힘, 경제적 능력, 문화적 다수 그들에게 경제적 약자 문화적 소외자 정치적 소수와 동행하려면 여러분이 가진 재원과 능력을 나눠야 한다고 얘기해야 하는 것이죠. 왜냐면 원래 그것은 네 것이 아니니까? 이렇게 말하게 되면 비판이 됩니다. 그래서 그런 말도 못해요. 건 대놓고 얘기못해요! 부자를 미워한다고 하니까. 그러나 미워하는 게 아니요.

 

가난을 돌보는 것이 품위있는 삶이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죠. “제가 하는 말이 불편한 사람들 있을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적으로서 반대자로 말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사는 것이 이렇게 살면서 가난을 돌보지 않는 삶이 품위있는 삶도 아니고, 하느님 뜻도 아니고, 인간다운 삶도 아니기 때문에 호소하는 것이다.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이렇게 사는 것이 맞다고 말하는 저를 욕한다고 생각하지 말라달라.”고 한 것이죠. 그리고 한국 주교님들에게는 제가 여러분을 꾸짖는다고 생각하지 말아주십시오. 여러분들의 형제주교로 저는 여러분의 신앙을 Confirm, 확인할 필요가 있다. 여러분이 목자로 여러분의 교회를 Well to do의 교회로 만들지 말아달라, 그저 그런 교회로 만들지 말라, 이것이 사탄이 교회에 뿌리는 가라지다. 보편 재화를 어떻게 나누고 사용할 것인가? 논리적으로도 혼자 설 수 없는 사람은 누군가 곁에 서 줘야하죠. 지저스 크라이스트가 말하죠. “가자 저 고을로!” 그게 홍대 앞 카페라서 찾아가자는 게 아니죠. 스스로 서있을 수가 없으니 옆에 서 있으려고 그 고을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네번째가 그런 겁니다. 그래서 당연히 교회는 이런 시각에서 여기서는 인권문제 충돌하죠. 공동선이 윤리문제와 충돌하죠. 지상재화의 경우, 소위 말하는 교회를 대조사회로 말하는 겁니다. 세상이 완벽하면 필요없죠. 그러나 아직 완벽해지려는 프로세스가 있으니 그 과정을 향해 현실을 자꾸 다그치는 것이 교회의 역할인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진리를 증언한다. 불의를 고발한다. 그리고 올바른 사회(갈등)에 기여한다.

 

보조성의 원리


다섯 번째 보조성입니다힘이 뭐에요? 힘이 힘이죠. 힘센 사람은 힘 약한 사람을 보호하라고 있는 겁니다. 힘 약한 사람 억누르려고 권력과 권위가 있는게 아니죠. 모든 것은 그보다 약한 것을 보호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보조성이란 그래서 국가가 현대사회에서 가장 강한 힘 있으니, 그 국가는 그 힘으로 하위단체, 시민사회단체, 더 나아가서 가정이나 개인. 회사도 있고, 단체들도 있고, 연합체 같은 것들. 국가는 여기서 이 사람들이 이렇게 봉사하라는 게 아니고, 거꾸로 이렇게 하라는 겁니다.

 

무릎 같은 거 다치면 보조기 채우죠! 보조기를 채우는 건 근육이나 관절이 온전해지도록 차는 것이죠. 멋있다고 계속 차는 게 아니죠. 어느 시점 보조기 풀고 혼자 걸으라고 하죠. 보조하는 것입니다. 힘센 상위집단은 자원 등에서 약한 하위집단을 보조하라. 보조하기 전에, 그러니까 다치기 전에는 내버려둬라. 싸가지없다, 얼굴이 왜 그모양이냐 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고, 그 대신 제 기능을 못할 때, 다리를 절거나 할 때 보조역할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사실 문화적 충돌일 수 있습니다. 상명하복이나 권위주의 등이 존재하죠. 그런데 미국의 경우를 예로 들면, 오바마 대통령이 모든 것을 다 하지 못해요. 외교와 국방은 연방 차원에서 움직이지만, 주정부 주지사가 대통령 쯤 되죠. FTA 때 그렇죠. 한미 FTA가 그렇습니다. 각 주에서 싫어하면 강제할 수 없죠. 그러나 개입하는 건 외교문제 같은 거죠. 우리나라 지방자치가 비슷하긴 하죠. 예전에는 내무부장관이 도지사를 임명하죠. 그 밑에 군수, 읍장, 면장, 이장 이렇게 되어있죠. 좌아악 내려가죠. 대표적인 게 반상회입니다. 이렇게 힘으로 내려가죠. 그런데 거꾸로. 이 힘은 가만히 있는데, 못하는 일이 있을 때 보조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빠져라 하는 겁니다. 우리의 경우 자율성의 원리라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약한 편이죠. 못 봐주죠. 애 보고 청소하라고 하니 꼼지락거리고 그러니 답답해서 내가 그냥 싸악 해버리는 거죠. 우리나라 지방자치 폐해를 말하죠. 돈은 많은 데 자율적 하도록 돈 줘야하는데, 돈 안주고 내 말 들어라 안 들을래? 그런 식이죠.

 

책임있는 참여


여섯번째는 책임있는 참여입니다. 개인이 이런 걸 할 수가 없어요. 우린 사회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참여하지 않으니까, 책임 없으니까, 어떤 일 벌어지죠? 이런 것들 훼손되거나, 실현되지 않는 일이 마구 벌어져도 그냥 있는 것입니다. 나서려고 하면 막 뭐라 하는 것입니다. 정치는 정치인이, 경제는 경제인에게 문화는 문화인에게 시민은 생업에 충실하도록. 시민의 생업이란 뭐죠? 먹고 자는 것 아닌가요?

 

경제는 내게 직접적 영향 미치는 건데 손 놓고 있으라, 직접 영향 미치는 제도를 미치는 정치에서 손 놓고 있으라. 그게 사실 전근대와 근대를 구분 짓는 것인데 말이죠.

 

암튼 저것들은 아무나 낀다고 그러죠. 그러나 근대사회는 아무데나 끼는권리가 있는 게 근대사회의 특징입니다. 국회의원 내가 뽑고, 대통령 내가 뽑는데, 그래서 아휴 시끄러워 어지러워. 옛날처럼 싹 쓸어버려야 해! 옛날이 좋았어! 그렇게 말하죠. 그렇게 말하는 분들끼리 모여 사시면 됩니다.

 

점점 더 커지는 형제적 사랑의 중요성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허구헌날 말씀하시는 연대가 있습니다. 신촌에 있는 연대가 아닙니다. 연대는 뭐죠. 프래터너티(Fraternity), 형제적 사랑. 점점 더 중요해집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더욱 노골적입니다. 무관심의 세계화. 뿐만 아니라 금융 및 투기 그리고 시장의 단일세계화. FTAFree니까 세금 안 매긴다는 거죠. Duty Free가 그런거죠. 그런데 물건은 크지 않아요. 금융 상품이 장벽 없이 세상을 돌아다니게 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문제입니다. 통신을 통해 수조 수천억이 돌아다닙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얼마 전 메시지를 냈죠. 노예노동의 규모가 전세계 차원으로 네트워킹이 되어 있으니 이것과 맞서려면, ‘사랑합니다 이웃형제 여러분이 정도가 이니라, 이 악의 세력의 규모에 걸 맞는 세력 필요하다는 겁니다. 국가도 연대하고 회사도 연대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도 연대해야 악의 세력을 막을 수 있다는 겁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연대를 강조하는 것은 지금 벌어지는 일들의 규모와 범위가 세계화 수준으로 가고 있으니, 이것이 사람들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는 지를 목도하고 있으니 형제애의 세계화가 필요하다. 언제 그런 얘기했죠? 우린 하루 지나면 잊어버리지만, 814일 충무홀에서 대통령과 외교부장관 등 공직자에게 말하는 마지막 문장입니다. ‘이 나라가 형제애를 앞당기는 데 앞장서기를 기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연대'란 무엇인가

 

그러면 연대라는 게 뭐냐? 이것은 공동선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힘 모으자는 게 아니라. 힘 모으는 거 좋죠. 그런데 공동선에의 헌신입니다. 

 

4가지 사회생활의 근본가치... 진리와 자유와 정의와 사랑


4가지 사회생활 근본가치는 자료 보시고, 시간상으로 아마 다음 주는 <새로운 사태>라는 문헌 보시고, 나중 분야별 할 건데, <사회생활 근본가치>는 마지막 날에 다시 설명드립니다. 이것은 진리, 자유, 정의, 사랑인데요. 자료보시고요, 이것은 실현해야 할 것들입니다.

 

진리란 뭔가? 여러 가지 해석 가능한데, 사회교리에서 말하는 진리는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토론의 내용이고 실현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시간에 짧게 얘기하겠습니다. 진리, 자유, 정의, 사랑 다 좋은 말씀이죠. 예수님 말씀이고요. 그런데 한가지씩 생각해보면,

진리를 가로막는 장애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교리에서 말하는 것은 특히 경제분야와 대중매체에 관심을 특히 둡니다.

 

자유는 할 자유도 있지만, 싫은 걸 안하는 자유도 있습니다. 거부할 자유입니다. 거부할 자유를 더 힘든 것이죠. 하기 싫은 건 안하는 것인데, 그걸 우리 사회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정의는 사회정의란 말을 쓰는데, 사회정의란 뭔가 생각해봐야 합니다.

세 가지입니다. 하나 교회 내 전통적 하느님께 돌릴 것 이웃 것은 이웃에게 또 하나는 일반 사회적 정의인 계약적 정의입니다. 갑과 을이 서로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법적 정의. 개인이 공동체 사회에 마땅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법대로.’란 말 있죠. 우리나라에서 법대로.’는 이상하게 이해되는데, 법대로는 힘센 사람의 남용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한 남용을 막기 위한 가장 큰 제도가 삼권분립입니다. 그게 서로 협력하면 괴물이 됩니다. 그런데 우린 자꾸 협력 요구하면서 괴물이 되는 것입니다.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가 있죠.

 

우리가 생각하는 법은 일제 때부터 법을 지켜야 하면, 착한 시민이란 생각하는데, 그러나 법의 본성은 권력남용 방지입니다. 누가 살인하죠? 힘센 사람이 살인합니다. 도둑질 누가 하죠? 힘센 사람이 도둑질합니다. 법은 만들면 따라야 하는데, 입법부 만들고, 사법부 판단하고, 행정부가 집행하죠. 그런데 합쳐봐요. 그냥 법에 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배정의가 있어요. 집단이 개인이게 줄 것을 주는 겁니다. 이런 거 있죠.

국가가 너희에게 뭔가를 해줄지 생각하지 말고, 이런 말 있죠? 똑같습니다. 내가 국가에게 뭔가를 해줄지 생각하기 전에 국가가 나에게 무엇을 해주는 지 생각하는 게 분배정의입니다. 조국이 나에게 해줄 것을 해주는 것 그것이 분배정의입니다. 회사가 노동자에게 정당한 대우를 하는 것이 분배정의입니다. 개인이나 구성원을 부품화시키는 세상, 전체의 일부분으로 보는 것 그런 게 아니라는 거죠.

 

사회정의는 다릅니다. 그것은 새로운 개념입니다. 이게 맘대로 안 됩니다. 사회가 이런 정의를 실현하도록 제도와 꼴을 갖추는 걸 사회정의라고 합니다. 제가 말한 적이 있는 것이죠. 편의점 알바 두고 하는 데 잘 안됩니다. 장사 안 되어서 알바 그만두게 하고 열심히 했지만, 안됩니다. 그리고 회사에서 경영이 악화되었습니다. 그런데 노동자가 월급주세여? 나쁜가요? 월급 못주는 사장 불의합니까? 달라는 노동자가 불의합니까? 그럴 때 사회가 테두리를 만들어줘야죠. 보험 같은 걸 말합니다. 사회가 그런 조건 만드는 게 사회정의라고 합니다. 우리가 파출소 앞에서 사회정의 외친다고 사회정의가 아닙니다.

 

사랑은 누가 말했습니까? 사랑 사랑 누가 말했죠? 우리가 어려운 이들 도와주는 걸 사랑이라고 하는데, 사회적 중재를 이용해서 이웃을 고통 안 빠지게 하는 것. 고통에 빠졌을 때 구해내는 것 Social Political Charity, 사회정치적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회 제도를 잘 만들어놓으면, 건강보험이 그런 것, 실업급여, 산재보험 등 그런 걸 잘 만들어두는 게 사랑인 겁니다. 그런 게 제도입니다. 사회적 중재입니다. 그러면 어떤 이가 넘어졌을 때 그것을 일으켜 세우고, 고통에 쳐박히지 않게 하는 것. 그런 기회를 만드는 것도 사랑입니다. 그런 걸 만드는 게 싸우는 게 아닙니다. 그런 사회적 중개나 많은 이들을 고통 속에서 보호해줄 수 있다. 이런 취지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해석하면 투쟁이 되지만,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정치적 협의와 프로세스가 필요한 것이기에 Love가 아니고, Social Political Charity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린 그런 것을 정치적 활동으로 쳐다보고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맨날 사순시기 작년에 프란치스코 담화 내용이 그것이었죠. 그런데 우리 주보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자.’고 했죠. 그러면 기도하다 죽으면 어떻게 해요? 겨울에 얼어죽지 않게 춥지 않게 하는 제도를 만들어야죠. 얼어 죽으면 어떡하죠? 따뜻하게 해줘야 하겠지요. 그것이 지역차원이든, 국가차원, 국제차원에서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적극적 지지 보내거나, 할 게 얼마나 많은 데, 눈을 들어보면 할 일이 많습니다. 개인적인, individual한 행위를 재촉하는 사랑의 실천도 있지만, 소셜하고 폴리티컬한 과정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고통에 빠진 사람을 지켜주거나 일어서게 하는 행동들이 있는데 그것이 사랑이다. 그것은 싸움이 아니다.

 

우리나라 가톨릭 교회에 자선단체가 얼마나 많습니다. 그러면 좋은 제도 만드는 자선단체를 만드는 것도 가능합니다. 좋은 제도가 만들어지면, 싸가지가 없어서 고통에 빠지면 그렇다고 쳐도, 매우 열심히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넘어지거나 하는 이들을 일으켜 세워야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기 걸어가다가 을지로 3가에서 노숙하는 사람을 데려다가 집에서 재울 수 있겠습니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이들을 사회에 복귀시키는 프로그램을 만들라고 시의원에게 요구하는 것이죠. 재원이 필요하니까요. 그냥 집에 가서 을지 3가에서 노숙자 봤는데, 마음에 걸리는 데 주님 어찌하오리까. 그것만 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912분 종료

 

201529() 열린 제109차 사회교리 기본과정 2회차 강의(2시간) 2교시 끝.

 

위 내용은 2회 강의(총 2시간)의 자료를 바탕으로 강의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이 글 작성에 도움을 주신 분의 제공 자료(녹음과 필기사진자료 등)를 바탕으로 재정리된 것이며부정확한 내용과 맥락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실제로 강사님의 의도와 맥락과 다른 표현이 발견될 수도 있음을 참고해야 합니다.

 

가톨릭 사회교리학교 109차 일정 http://univnote.tistory.com/293



2015년 2월 9일 월요일 밤 9시 20분 경의 명동성당


2015년 2월 9일 월요일 밤 9시 20분 경, 명동성당에서 바라본 명동번화가의 모습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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