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부활대축일, 2013 3 31일 오전 10시30분 @ 보령 동대동 성당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자존심의 밑바닥을 딛고 일어나다

'죽을 맛'을 보고 나서...!



교우 여러분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교우 여러분께 축하를 드린다는 저의 이 인사말이 빗나간 말이 아닌가 하고 의아해 하실 분이 계시지 않을까요? “오늘 예수 부활 대축일이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인데, 우리에게 무슨 부활 축하람?” 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 축하를 드림이 당연하지요! 그래서 우리 모두 예수님을 향하여 축하인사를 환호로 드립시다. “예수님! 축하합니다! 부활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돌아가실 때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어요? 그런데 부활하셨군요! 용하시네요! 잘 된 일이네요! 부활하신 예수님, 축하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 축하드리면 되는 걸, 왜 제가 교우 여러분께 먼저 부활을 축하드린다고 인사할까요? 그래서 혹시라도 어느 교우 분께서 이 축하를 받고 쑥스러워 하실 지도 모르겠군요. 제가 놀리는 줄 아실는지요? 또는 기분이 나빠지신 분도 계실는지요? “아니, 내가 언제 죽었었단 말인가?” 하면서 말입니다. 또는 아니, 나 보기 싫어서 죽어 없어지기 바라다가 살아있는 걸 보고 비아냥거리는 거 아냐?” 하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는지요? 아니면, 오랫동안 성당에 나오시지 않다가 오늘 나오신 분께서는 저 신부가 나 냉담하여 안 보이다가 오늘 나타나니깐 죽은 줄 알았나?” 하고 기분 나쁘신 건 아닐까요?


전에 제가 있던 다른 본당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할머니께서 편찮으시다기에 병자성사받으시라고 여쭈었더니 매우 기분 나빠해 하시더라고요. “아니, 내가 죽을 병 걸린 줄 아시오? 나 빨리 죽길 바라는가 보군!” 하시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교우 여러분께 재차 강조하여 인사드립니다. 교우 여러분,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더욱 노골적으로 인사를 드립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교우 여러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이 축제는 예수님의 부활 축제입니다만, 동시에 교우 여러분 모두의 부활 축제입니다. 여러분 모두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오늘의 부활을 마지하려고 여러분께서는 죽을 고생을 하셨습니다. 아니, 여러분 모두는 죽었다가 살아나셨습니다.


죽으신 일 없다고요? 여러분은 죽으셨다가 다시 사시게 된 분들입니다. 어찌 그러냐고요? 그 까닭을 말씀드립니다. 세례를 받으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세례란 예수님과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오로 사도는 콜로새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여러분은 세례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되살아났습니다.”(콜로 2, 12)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바오로 사도는 오늘의 제2독서에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콜로 3, 13)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오늘 부활 축제를 우리 모두 자신의 축제로 삼으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세례를 받은 지 오래 된 교우님들께서는 오늘 이 축제의 기쁨이 실감 나지 않는다고 말할는지도 모르겠지요. 하지만 지난 사순절을 열심히 지내오신 교우님들께서는 오늘의 기쁨이 곧 세례의 기쁨과 동일한 것임을 실감하실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부활 축제를 맞이하려고 사순절의 힘겨운 여정을 걸어왔습니다. 그 힘든 여정이란 교회의 사순절 관습대로 기도와 참회, 단식과 선행, 그리고 빈번하게 거행되는 전례 참여였습니다.


그 사순절 과정 중에서 가장 달갑지 않은 것이 있었다면 아마도 참회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형식적일 경우에는 그저 판공성사라는 것을 해야 하는 부담감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고해성사라는 것을 꼭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의 죄를 들추어내어 자백한다는 것은 실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을 하기란 속된 말로 죽을 맛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순절의 실천사항으로 강조되는 다른 일들 즉, 기도와 단식과 선행 등은 그래도 해볼 만 한 일들이지요. 그것들은 자존심과 상관없는 일들이니까요. 나 잘되게 해달라고 비는 것 정도를 기도로 아시는 분들 같으면 기도해서 마음 편해지지요. 그리고 단식이란 건강이나 몸매 가꾸기를 위해서도 기꺼이 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선행을 한다는 것은 명분을 세우기도 하고 이웃을 돕는다는 것이 나 자신을 즐겁게 하는 일이기도 하지요. 허지만 나 자신의 죄과를 꼬치꼬치 살펴서 그걸 잘못한 일이라고 나 스스로 인정해야 하는 일이란 즉, 참회하는 일이란 실로 즐거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히 자존심을 심하게 상하는 일이지요.


그렇듯 자존심 상하는 참회란 실로 죽을 맛입니다. 저는 여기서 죽을 맛이라는 속된 말을, 가장 꺼리는 일에 대한 우리 인간 누구나 공감하는 느낌의 단적인 표현이라고 봅니다. 얼마나 하기 싫으면 죽을 맛이라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자존심 상하는 일이란 그렇듯이 죽는 일과 같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참회 즉, 죄의 고백이란 자존심을 지닌 인간에 있어서 최악의 처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아존재(自我存在)를 존중(尊重)하는 마음()을 즉, 자존심(自尊心)을 업신여기게 되는 것이랄 수 있을 정도로 자신에게 잘못의 탓을 스스로 돌린다는 것은 자신을 죽이는 일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를 드러낸다는 것은 죽는 일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렇듯이 자신의 죄를 자신에게 물어 참회하고 고백하는 과정을 사순절 동안 지내왔습니다. 그야말로 죽는 일을 해온 것입니다. 그렇듯 죽는 일을 하고나서 오늘 새로이 일어섭니다. 나의 죄악들을 그리스도처럼 죽음의 십자가에 못 박아 없애버렸습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당신의 몸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 없애신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듯이,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신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처럼 우리를 다시 일으켜주십니다. 사순절 참회의 과정을 지낸 우리의 부활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죄를 못 박아 없앰으로써 자존(自尊)의 죽음을 지나온 우리의 다시 일어섬이 곧 세례이고 참회이듯이, 우리는 그 세례를 참회로 반복하면서 사순절에서 부활로 건너온 것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자존심을 없애기까지 한 우리의 처지가 곧 무덤으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그 무덤은 죄악의 찌꺼기랄 수 있는 죽은 몸이 거기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무덤은 비어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활은 이른바 빈 무덤의 체험입니다. 그것은 곧 오늘 부활절의 여명에 무덤에 달려갔던 마리아 막달레나와 두 제자의 체험입니다(요한 20, 1-9 참조).


오늘의 이 미사에서 읽은 부분까지의 요한복음서 구절은 그 빈 무덤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고 보도한 내용으로 멈추고 있습니다(요한 20, 9 참조).


그 여명에 무덤을 찾아간 그들이 빈 무덤에 대한 깨달음을 아직 얻지 못한 반면에 우리는 오늘 보도가 멈춰진 요한복음서의 그 이하 구절(요한 20, 11-18 참조)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빈 무덤의 허망함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울고 있던 마리아가 정원지기인 줄로 오인하며 만난 예수님께 그 무덤의 시체를 누가 꺼내갔는지 알려달라고 애원하였지요(요한 20, 11-15 참조). 그러자 평소 자기를 부르시던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채고 나서 그분을 붙잡으려 하는 마리아에게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요한 20, 16 참조). 그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하고 전하여라.”(요한 20, 17)

이 말씀에서 저는 예수님의 부활이 어떠한 것인지 번쩍 깨닫게 됩니다. 그 깨달음은 저 유명한 달라이 라마의 강연집에서 도움을 받아 얻은 것입니다.


티베트의 영적 지도자이며 불교를 세계적으로 대표하는 지도자 달라이 라마를 영국의 저명한 가톨릭 신학자들이자 베네딕토회 수도사제들이 초청하여 런던의 한 대학에서 사흘 동안 세미나를 개최했던 강연집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 강연집은 달라이 라마, 예수를 말하다라는 책입니다. 불교 지도자의 지혜로 성경의 복음서를 강의한 내용을 세미나 기록형식으로 수록한 책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그 불교 지도자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이해한 내용에 경탄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죽음과 부활을 동시적 실존 양상이라는 식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불교의 환생에 대한 설명을 곁들여 다음과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전부인 부활을 표현했습니다. “환생을 믿는 사람에게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곧 환생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환생은 죽음 다음에야 올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달라이 라마의 말을 듣고 거기 세미나를 함께 하던 가톨릭의 수도사제 로렌스 신부가 한 마디 했습니다. “부활(復活)은 환생(還生)이 아닙니다.”라고요.


가톨릭 사제의 그 이의제기에 대하여 달라이 라마는 대답했습니다. “물론 저는 윤회(輪廻)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자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영적으로 성장을 해나가면, 그의 육체까지도 더욱 더 미묘해집니다.”


이 달라이 라마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의 예수님의 몸은 육체적인 몸입니다. 부활은 했지만 아직 하느님 아버지께로 승천하지 않은 몸은 미묘한 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께로 올라간 후의 몸은 영적인 몸입니다.”


달라이 라마의 이러한 설명은 불교적 표현입니다만, 저는 우리가 예수님께서 가신 죽음과 부활의 길을 따라가는 데 있어서 좋은 힌트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부활은 미묘한 몸이 되는 것이고 승천은 영적인 몸이 되는 것이라는 표현이 그렇습니다.


달라이 라마의 예수님 부활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가톨릭 수도사제 로렌스 신부께서 설명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죽기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세상에 일정한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죽은 후의 예수님은 다르게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사후에 마리아 막달레나와의 만남이 그렇듯이, 이제는 우리가 그분을 알아보아야만 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존재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새로운 눈을 가져야만 합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죽어서 부활하고 승천하기까지의 중간단계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예수님은 거기에 적혀 있는 것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로렌스 신부님의 말씀대로, 십자가 이전의 예수님은 그 옆에 있던 일반 사람들의 눈에 보이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 이후의 예수님 즉 부활하신 예수님은 언제나 어디서고 우리 곁에 계시지만 그분의 모습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새로운 눈을 가진 이들 뿐입니다


그분은 십자가 이전처럼 육체의 손으로 붙잡아 만져서(한정적으로-물체로써) 확인할 수 있는 분이었지만, 십자가 사건 이후의 그분은 언제 어디서고 새로운 눈 즉 영신적(신앙적) 깨달음으로 만날 수 있는 분입니다. “내 아버지 하느님이시고 너희의 아버지 하느님이신 분께올라가신다던 분이시기에, 즉 하느님과 합일 되신 상태의 분이시기에, 즉 성령을 통해 존재하시기에, 우리는 그분을 언제고 어디서고 만날 수 있게 되셨음이 곧 그분의 부활입니다.


그렇듯이 그분을 만나는 것이 곧 부활의 체험입니다. 이 세상 모든 죄악의 찌꺼기를 다 없애버린 우리라면, 즉 우리 또한 죄악에 죽고 다시 새로운 삶으로 일어선다면, 그분의 그 부활 세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부활에로 건너가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죄악을 참회하는 사순절을 다 지나고 이렇게 새로운 날 곧 부활의 날을 맞이한 것입니다. 세례로써 그리 하였고, 참회로써 그리 하였습니다. 우리 자존심의 저 밑바닥 아래에 내려가는 죽을 맛같은 참회로써 나 자신의 찌꺼기인 죄악을 떨구어 낸 우리는 새로운 나의 참 자아를 예수님과 함께 되찾은 것입니다. 모든 자존심을 팽개치고 나서 저 밑바닥을 딛고 일어선 그것이 오늘의 우리 부활입니다.


부활하신 교우 여러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20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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