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5주일, 2013 3 17일 오전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예수님은 누구편? 그 여자 편?

나는 나를 고발해야 한다.



이즈음에 연예가 뉴스에 참으로 낯 뜨거운 이야기 오가는 게 보도되고 있습니다. ‘박 모라는 인기 연예인의 성폭행 사건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의 전모를 제가 미사강론 중에 입에 담을 수가 없습니다. 그 연예인의 부끄러움모르는 태도 이전에, 우리 사회에서 이른바 성폭행또는 성추행등등의 용어를 보도매체는 물론이고 일상인들의 대화 가운데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는 실태가 이미 우리 모두 부끄러움을 상실한 사람들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일들이 일어나도 마치 교통법규 위반한 것 정도의 비일비재한 일상적 이야기처럼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우리 교회 안에서도 그랬다더라.’ 하는 식의 무덤덤한 대화 속에 섞여 말해지고 있습니다. 성직자들의 아동 성추행 운운하는 뉴스 꺼리에 대해서 혀를 차는 표정들이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당혹감이 무뎌지고 있는 것입니다. 가만 앉아 생각해보면 이를 어쩐단 말인가!’하면서도 저는 뚜렷하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 자신도 한 성직자로서 강 건너 불구경이나 하고 돌아서서 얼른 다른 생각을 해버리는 식이고, 나 자신과 아무런 상관없는 것인 양 아무런 문제의식이나 부끄러움을 지니고 싶지 않습니다.


이러한 우리 현실을 진단하자면, 사실은 우리 모두 비겁해진 양심으로 살고 있다 해야겠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비겁하게 무뎌진 우리 양심이 더욱 깜깜한 무감각에 절여진 것을 우리는 문득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남 탓돈의 힘으로 우리 양심이 깜깜해졌다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박 모연예인 이야기는 보도에 의하면, 한 마디로 진흙탕 이야기입니다. TV인터뷰에 미소 띤 얼굴로 무슨 말인가 하는 그 사람의 변명에 대해서 그 진위 여부를 떠나 저지른 짓에 대한 부끄러움은 이미 실종되었고, 피해자라는 여성을 더욱 치졸한 인간인 것처럼 보도하는 언론매체들 또한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찾을 기미마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국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합의서를 써주는 마무리를 향하는 수순으로 나아갈 것을 예상하게 하는 보도입니다. 아마 피해자라는 여성이 가해 혐의자에게 다음과 같은 합의서를 써주고 마무리 될 것을 우리 사회는 점치고 있습니다.


피해자는 가해자로부터 육체적 정신적 피해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받았다. 그리고 가해자가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있기에 고소를 취하하고, 이후 그 어떠한 민형사상 문제를 제기하지 않겠다.” 이러한 합의서 이후에 가해 혐의자는 법률적 무혐의로 뉴스 깜에서 벗어나게 되겠지요.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그에게 윤리적 유죄까지를 더불어 묻지 않겠지요. 그러면서 우리 사회의 무덤덤한 양심의 비겁함을 모두가 깨닫지 못하겠지요.


그리 된 다음에 그 피해자였던 여성은 어떠한 삶을 살아갈까요?


저는 여기서 그 여성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나 자신들의 처지에서 짚어보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여성이 나 자신이라고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아마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치졸하다고 볼 것인가, 아니면 억울하지만 그만하면(보상 받았으면) 됐다고 봐줄 것인가

저는 생각의 이 지점에서 오늘 복음 성경의 현장을 봅니다. 그 현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진정 누구의 편이셨나? 오늘의 이 성경 대목을 읽는 어떤 분들은 선뜻 대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결론적으로 그 불쌍한 여자 편을 들어주셨다.”라고 말입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싶습니다. “옳소! 예수님께서는 결국 그 여자 편을 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더욱 인간의 편을 들어주신 것이 정답입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인간의 편을 들어주신 것입니다.” 하고 말입니다. 저의 약간 모호한 이 대답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해명해보겠습니다.


우리가 우선 알고 있어야 할 것은, 오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들이댄 모세율법이라는 것의 내용입니다. 그것은 레위기 2010절 이하와 신명기 2220절 이하에 수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개략적으로 보자면, 간음 당사자는 남녀 모두 처벌하라는 것입니다. 가혹하게 돌로 쳐서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 두 사람 모두를! 가혹하지요! 아마 그 시절에 성문란이 얼마나 심했으면 그리 가혹한 법이 생겼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그렇지 않은가요?


그런데 말입니다. 구약의 그 율법을 자세히 읽어보면, 어떤 경우에는 여자는 놔두고 남자만 죽이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저는 오늘 예수님 서 계시던 그 현장에서 점검할 것이 있습니다. 왜 그 자들이 여자만 끌고 왔으며, 예수님께서는 너희들, 그 남자는 왜 끌고 오지 않았느냐?”고 호통 치셨어야 하는데 그 말씀은 왜 하시지 않았을까? 예수님께서 혹 율법 공부를 제대로 하시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저는 이 생각의 지점에서 다시 앞의 연예인 사건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 봅니다. 언론보도의 맥락이 이른바 성범죄에 관한 것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고, 귀추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주목하도록 보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결국 억울하다 하더라도 그만한 보상이 따르고 합의 될 것이다라는 통념에 대한 우리의 무덤덤한 양심을 반영할 것이라는 점을 저는 오늘의 복음 성경 현장과 대비하고 싶습니다.


저의 이러한 생각의 지점에서, 오늘의 성경 대목을 읽는 분들 가운데 예수님의 대답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 7)하신 말씀에 통쾌한 느낌을 가지실 분들에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속 시원 하십니까? 그리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하나씩 사라졌다는 보도(요한 8, 9 참조)에는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하고 말입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다른 질문을 해봅니다. “예수님 덕분에 죽음을 면한 그 여인은 그만하면 잘 되었다고 행각하십니까?”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참으로 지혜로운 분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그렇지요.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지혜로운 분 맞습니다. 그분 당신 자신이 지혜 자체이신 분이시니까요. 그분께서는 이 당혹스런 상황에서 속된 말로 머리를 잘 굴리셔서 사면초가로 닥친 당신 자신의 위기를 타개하신 분이시지요. 그러나 저는 오늘 복음 성경의 보도 기사의 행간에 숨어 있는 것을 오늘 미사 강론의 주제로 삼고 싶습니다. 그 행간에 예수님의 본마음이 들어계십니다


그분께서 진정 인간을 사랑하시는 마음이 그것입니다. 그분께서는 거만하고 음흉 교활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 그리고 불쌍하고 더러운 창녀를 모두 사랑하셨습니다. 그들 모두를 참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양심을 되찾게 하셨습니다. 그들 모두에게 부끄러움을 되찾아 주셨습니다. 그들을 인간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오늘날 네 탓돈의 힘에 절여있는 양심에도 예수님께서는 오늘 묵묵히 말씀하십니다.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그리고 여인아,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 여인이 그 후 어떠한 삶으로 돌아가 살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서는 그 여인에 대해서 더 보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해서는 그 후 요한복음서가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자들은 집요하게 예수님을 괴롭히고 결국 그분을 죽이는 일에 주동적 역할을 합니다. 요한복음서는 그 앞의 많은 보도 기사 중에 예수님의 반대세력 주역들을 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로 보도하였고, 그 후의 예수님 처형 경위를 보도함에 있어서도 그들이 앞장섰음을 보도합니다. 그들은 간음한 여인 앞에서 속된 말로 쪽팔린 처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진정 인간의 양심에로 돌아가지 않았지요. 그들은 왜 그렇게 간악스러웠을까요?


제가 앞에 언급했듯이, 네 탓만을 일삼고, 세상 권력인 돈의 힘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기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어떠한가요?


오늘의 간음하다 잡힌 여자에 관한 일화(요한 8, 111)는 교회 초기부터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교훈으로 이용되어 왔습니다. 오늘날에도 단계적 세례예식에 있어서 예비자들에 대한 마지막 단계의 수련식 때에 이 이야기를 복음으로 들려줍니다. 부활절에 세례를 받기 위한 정식 절차의 수련식을 사순 제5주일에 거행하는 복음 성경 내용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이 복음 성경 내용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 앞에서 저는 죄인입니다.” 하고 자인하라고 독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돌멩이를 우리 자신에게 던지라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차마 쪽팔린 처지에 돌을 여인에게 던지지 못했지만, 진정 자기 자신들의 양심에 던지지도 않았습니다. 비겁했지요. 그래서 진정 회개한 사람들이 되질 못했습니다. 네 탓만 일삼는 비겁함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용기를 내어 우리 자신에게 돌을 던져야 합니다. ‘나의 탓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들 중에서 죄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죄인인 우리들 모두는 곧 주님 앞에 끌려와 단죄 받을 것밖에 없는 그 여인의 처지인 것입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과 만난 것은 모든 사람이 저마다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만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주님께서는 자비가 넘치도록 풍성하여, 가장 심각한 죄까지도 언제나 용서하시지만, 또 한편으로는 용서받은 죄인이 온갖 죄를 피하고 버리기를 기대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입니다.


이 이야기는 사순절 동안의 복음독서로 알맞은 것인데, 사순절은 온 교회가 세례의 약속을 하거나 새롭게 하기 위한 준비로써 참회와 회개의 자세를 갖추는 시기이고, 그런 정신으로 고해성사를 보게 됩니다. 고해성사 때마다 우리는 그렇게 주님을 만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한 비난을 일삼는 습성을 이 사순절 피크에 이제 그만 멈추면서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돌을 던져야 할 것입니다. 모두가 나의 탓, 나의 잘못이라는 자신의 죄의식을 회복함으로써만, 우리는 사실상의 올바른 사회와 새로운 삶으로의 부활절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권력 돈의 힘으로 우리의 모든 비겁함을 해결하려는 그 비겁의 수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선언합시다. “나를 쳐야 할 돌은 나의 양심이요, 내가 나를 고발해야 한다.” 하고 말입니다. 나는 나를 고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양심이 마비된 세상의 진흙탕에 허우적거리지 말고, 진정 인간의 인간다운 상태로 돌아가는 부활의 삶에 주인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7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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