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수난 성지주일, 2013년 3월 24일 오전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네 주제에 뭘...!
딱 한 사람 구원한 십자가 사건!
제가 사는 여기 부여군에서는 다가오는 4월 24일에 국회의원 재·보결선거를 하게 됩니다. 그 선거를 앞두고 여기 부여·청양 선거구에 출마 공천을 받으려고 예비후보들이 인쇄물을 돌리고 거리에 현수막을 내걸어 자기 알리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당인 새누리당 공천을 신청한 사람들이 9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 새누리당으로 출마하면 따놓은 당선이 될 것으로 누구나 다 짐작하고 있어서인지 공천 경쟁이 아주 치열합니다. 그와 대비해서 야권에서는 아직 아무런 열의를 보이지 않고, 새누리당 공천의 귀추가 선거 본전보다 더 뜨거운 관심사항입니다.
며칠 전에는 ARS 설문전화가 저에게 걸려왔는데 아마 새누리당 쪽에서 질문을 보내온 것 같습니다. 9명의 공천 신청자들을 하나하나 거명하면서 아느냐는 질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9명 가운데 이름을 기억할 수 있는 인물은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이름 아는 사람 번호에 응답 다이얼을 눌렀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그다음 질문으로 어느 정당을 지지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서 제가 대답한 내용은 이 강론에서 밝히지 않겠습니다. 왜냐면 그것까지 밝히면 사제가 강론시간에 정치적 발언을 했다고 비난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강론 가운데 정치인들의 태도에 대한 일반적 비판은 사제로서 가능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들이 어떤 태도로 국민 앞에 나서야 하는지에 관하여는 사제가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거리에 나붙은 예비후보라는 사람들의 자기 PR 문구를 보면 한결같이 “내가 적격자이다.”라는 식의 내용입니다. 정치에 나서는 태도란 그런 식으로 자기 잘났다고 주장하는 것이어야 하는가 봅니다.
출마하는 사람이건 정당이건 간에 공통적으로 자기들이라야 나라의 새로운 앞날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후보들은 자기만이 부패한 정치를 청산하고 경제적 난국을 타개하여 국민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적격자라며 큰소리로 부르짖습니다. 그러한 큰소리들의 공통적인 주장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나는 훌륭하다.”라는 것입니다.
그렇듯 자기만이 훌륭하다고 떠들며 분위기를 달구는 사람들이 설쳐대는 이 요란한 선거기간에 우리 부여 지방은 성주간과 부활 축제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선거기간과 맞닥뜨려 맞이하는 우리의 성주간은 우연찮게도 몇 가지 공통점을 보입니다.
그 첫 번째 공통점은, 사람을 내세워놓고 사람들이 심판을 하는 점입니다. 앞에 나선 사람을 놓고 다중의 사람들이 이렇다 저렇다 평가를 합니다. 국회의원 후보자를 국민들이 평가하고, 예수님을 많은 사람들이 평가 심판하는 것이 그 첫 번째의 공통점입니다.
또 다른 공통점은, 선거를 통해서 그리고 성주간을 통하여 무엇인가 바뀐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공통점은, 선거를 통해서도 성주간을 통해서도 사람들 사이에 희비가 엇갈리는 결과를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의 공통점 즉, 사람을 내세워 사람들이 심판하는 그 공통점은 선거와 성주간에 그 내용을 전혀 달리하고 있습니다. 선거에서 사람들 앞에 나온 사람 즉, 출마자는 자기가 잘났다면서 스스로 나와서 사람들의 심판을 기다리는 입장인 반면에, 우리의 성주간을 통하여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그 사람 즉, 예수님은 스스로 잘났다고 나온 분이 아니라 사람들이 붙잡아다가 내세워놓고 심판하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의 공통점 즉, 무엇인가 바뀐다는 공통점에 있어서도 선거와 성주간에 그 내용을 전혀 달리하고 있습니다. 선거를 통해서는 이 사람의 자리를 저 사람의 자리로 바꾸는 일이 일어나는 반면에, 성주간을 통해서는 동일한 한 사람이 다른 삶으로 바뀌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공통점 즉, 사람들 사이에 희비가 엇갈리는 결과가 일어난다는 점에 있어서는 그 희비의 내용이 정반대로 다른 것입니다. 선거에서는 이긴 사람은 기뻐하고 패배한 사람은 슬퍼하게 될 결과를 내겠지만, 성주간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결과란 오히려 패배한 사람이 역설적으로 참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선거에서는 다른 사람을 제치고 살아남는 기쁨을 바라고 있지만, 성주간 메시지로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참 기쁨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선거기간과 성주간에 엿볼 수 있는 공통점들과 그 내용의 전혀 다른 점을 짚어보면서 이 모든 공통점과 상이점을 십자가 사건에서 한꺼번에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심판, 사태의 바뀜, 그리고 엇갈리는 희비의 결과를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점은 예수님 옆에 좌우로 함께 못박혀 십자가에 달려있던 죄수 두 사람의 말에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한 죄수가 예수님께 빈정거려 모욕적인 말을 합니다.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루카 23, 39)하고 말입니다. 그러자 다른 죄수가 그를 꾸짖어 말했습니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루카 23, 40)하는 꾸짖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선거를 통하여 선택할 후보자에게 말할 수 있겠지요. “당신이 승리해서 우리가 편히 살게 하시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누군가 옆에서 나에게 말합니다. “너 같은 주제에 그 같은 말을 할 수 있느냐? 양심이 두렵지도 않으냐?” 하고 누군가 나를 꾸짖습니다.
헌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진정 누구이겠습니까? 유권자로서 후보자에게 “당신이 승리해서 우리가 편히 살게 하시오!”라고 말하는 사람, 그리고 “너 같은 주제에 그 같은 말을 할 수 있느냐? 양심이 두렵지도 않으냐?” 하고 꾸짖는 사람은 사실 동일한 나 자신입니다. 우리가 과연 누굴 심판할 수 있으며 또 누굴 빈정거리거나 누구에게 기대할 수 있겠는지, 그리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양심을 지니고 있는지, 그건 우리 각자가 자신에게 먼저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감히 다른 사람을 심판하여 살게 하거나 죽게 할 수 있습니까? 유다인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규탄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 했었지요.
그리고 선거로 이 사람을 저 사람으로 바꾸어 책임을 맡기기에 앞서서 사태를 바꾸기보다는 나 자신이 바뀐 사람 되어야 진정 함께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지 않겠습니까?
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딛고 일어서는 승리를 통해서보다는 자신을 죽임으로써 새로운 삶을 얻는 기쁨을 얻어야 하는 것이 십자가 사건임을 깨달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너 같은 주제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고 친구를 꾸짖던 죄수가 한 말을 우리의 고백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 41∼42) 하고 우리는 고백해야 합니다. 이 때 십자가에 함께 못박혀 죽어 가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 42) 하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런 죄도 없이 우리 인간들의 죄악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는 그분께 우리는 나 자신의 죄악으로 못박혀 죽게 되었음을 고백하여 그분이 나를 생명에로 이끌어 가시기를 간청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 그리고 이번의 4·24 재·보결선거철에는 언제나 선거전에 그렇듯이 자기 잘났다고 나선 사람들이 상대 후보자들을 깎아 누름으로써 이기려 합니다. 그리고 서로를 비난하고 나쁘다고 판단합니다. 그러한 인간들의 짓거리들은 옛적에나 지금에나 마찬가지 입니다. 도무지 사람들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 비난의 화살로 옛적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정치판에서 어제는 친구인척 하다가 오늘은 원수가 되어 서로 죽이려 하듯이,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칭송하여 환영하다가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돌변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부르짖었습니다. 허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살기 위해 맞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저주 속에 죽으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최후 순간에 그분은 사람 하나를 변화시키시는 소득을 올리셨습니다. 회개하게 된 죄수 하나를 데리고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신 분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는 예수님이셨습니다.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복음을 설파하시고 회개하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죽으시는 순간에서야 이렇듯이 딱 한 사람 바꾸는 것으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의 오랜 노력이 막판에 가서 그저 미미하게 딱 한 사람만 구원하신 걸 보면 그분의 실적은 아주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실적이라 할 것도 없는 것이지요. 정치인들이 나라를 바꾸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 나서는 것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셨습니다. 그분은 다만 죄인 하나를 회개시키시는 마지막 소득으로 생을 마감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고자 하기보다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속에서 죄인 한 사람이나 바꾸는 것을 그 목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바뀌는 그 한 사람, 그것은 나 자신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해의 주님수난성지주일에 읽는 마태오복음서나 마르코복음서 또는 요한복음서는 예수님 좌우에 죄수 두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혀 함께 죽게 되었다는 것을 보도하면서도, 그 두 죄수들 사이에 주고받은 말이나 예수님께서 죄수 하나를 함께 낙원에 데리고 가신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 보도되고 있지 않습니다만, 올해의 이 주님수난성지주일에 읽는 루카복음서의 수난기에서는 그 두 죄수 사이의 이야기와 예수님의 말씀을 특징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분이 자기 자신의 죄 때문에 죽게 된 죄수와 동행하여 죽으시는 것을 루카복음서는 특징적으로 보도합니다.
그러한 분이셨기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서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루카 23, 34)하고 기도하셨습니다. 루카복음서에만 기록되고 있는 이 예수님의 기도는 진정 그 성과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최후 순간에 사람들의 추악한 마음이 변화를 보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루카복음서는 강조하여 보도하고 있습니다. 죄수 하나의 회개는 물론이려니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의 깨달음과 뉘우침이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던 순간에 그분의 십자가 처형을 집행한 백인대장이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 하고 말하고 거기 함께 있던 사람들이 또한 가슴을 치면서 돌아갔다고 보도하는 오늘의 루카복음서(루카 23, 47∼48 참조)는 우리 또한 그렇게 뒤늦게라도 각자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제를 알아야 합니다. 모두 세상을 죄악으로 더럽히는 주제에 선거에 나선 사람들 모두 자기선전만 일삼고 잘났다고 하면서, 편을 가르고 다른 사람 깎아내리려고 애쓰면서 스스로의 부족한 점 또는 약점은 감추려고 합니다. 그렇듯이 모두 내가 이겨야 하고 다른 사람이 져야 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잘 살아가는 이치입니다. 자기 손해 보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자기 탓이 아니고, 모든 것이 남의 탓이어야 하는 세상입니다. 자동차 운전하다가 무슨 사고가 나면 내 탓은 없고 상대방 탓이라고 우선 우기고 보는 식이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우리는 각자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네 주제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하고 말입니다. 그러한 우리네 모습을 보시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라고 기도하시고 죽으시는 저 죄 없는 분의 십자가 사건을 우리는 목격합니다. 그러한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고 가슴을 치는 회개로써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할 부활절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이번 성주간은 그렇게 루카복음서의 수난기를 통하여 이끌어주고 있습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8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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