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3주일, 2013년 3월 3일 오전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사순절은 정치적인 기간
아름다운 세상은 회개로써 시작된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 시대의 우리나라 국민이라는 것이 참담할 정도로 부끄러운 게 있습니다. 새로 취임한 대통령이 지명한 국정 책임자들의 대다수가 이른바 ‘비리 백화점 사람들’이라는 것인데, 이게 이번의 새 정부 꾸리는 마당에서만 드러나는 현상이 아니라 늘 있어온 것이고, 그것이 갈수록 그 도를 더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이렇게 더러워진 나라인가 하는 비애감이 들어 슬프고 부끄럽습니다. 인사청문회를 보면서 그렇습니다. 깨끗한 삶을 보여주는 지도자, 사욕 없이 헌신하는 봉사자, 본받고 싶은 인격자를 우리나라에서는 찾기가 정말 힘든가 하는 자조적 쓴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이러한 인사청문회 뉴스를 외국 사람들이 알까봐 걱정스럽고 부끄럽습니다.
과연 이러한 우리 현실에서 좋은 사람을 찾아볼 수가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의 복음서 읽는 중에 답답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과수원 주인이 살펴보다가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는 대목을 오늘의 복음서에서 읽게 됩니다(루카 13, 6 참조). 새 대통령이 인물 밭에서 제대로 된 ‘깜’을 찾기가 이렇게 어려운가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그래서 일부 국민들은 오늘의 복음서에 등장하는 과수원 재배인처럼 말합니다.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루카 13, 8)하고 말입니다.
오늘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소개하신 과수원 주인과 재배인 사이의 대화 내용에 따라 우리의 요즘 정국뉴스를 빗대봤습니다. 저 같은 사제가 미사 강론 중에 시국 정치상황을 거론하면 교우님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기분상해 하십니다. 신부가 왜 정치 얘기를 하냐면서요. 그러나 저는 정치얘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것이 하나로 융합한 삶의 마당입니다. 거기서 혹 한 분야라고 잘못 치부되는 종교적 삶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정치의 영향을 벗어나 살 수 없고, 경제행위를 포기하고 살 수 없고, 종교나 예술이나 취미를 향유하지 않고 살 수가 없습니다. 종교를 거부하는 무신론자도 그 자신의 무신론이라는 신념 자체가 이미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종교적 결의에 의한 것입니다.
그렇듯이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땅위에 서있다는 자체가 정치적 테두리 안에서의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든 한 사람은 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반쪽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한 사람이 반쪽은 정치의 영향 하에 살고 다른 반쪽은 경제적이지 않습니다. 한 사람 전체가 정치와 경제와 문화적 그리고 사회적 모든 삶의 주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직자는 종교적인 일만 하고 세상 사람들의 정치경제적 삶과는 아무런 관련 없이 살아야 하는 게 아닙니다. 만일 그러한 종교인이라면 성당에서 좋은 말을 하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잘못 된 것이라 하더라도 아무런 생각이나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사람들이 부조리하고 불행한 사태를 초래하더라도 못 본 것으로 눈을 감고 살아야 하는 것이 성직자의 본분일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과수원 주인과 그 농부 사이의 대화 내용은 상당히 정치적인 것입니다. 주인과 농부 사이에 서로의 마음을 살피는 상황이 바로 정치적 상황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때문에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루카 13, 7) 하고 주인이 농부를 떠보는 질문을 합니다. 그러자 그냥 한해만 더 놔두었다가 그 다음의 결과를 보자면서 혹 좋은 결과를 보기 위해 투자를 좀 해보겠다고 농부가 주인에게 의견 제시를 합니다. 만일 그래도 결과가 좋지 못하면 그때 가서 결단을 내리시라는 건의를 하면서 말입니다(루카 13, 8∼9 참조). 참으로 바람직한 정치적 타협의 과정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그래서 현명한 결단을 해야 할 지도자(주인)와 그 결단을 슬기롭게 이끌어내도록 조언을 하는 협력자(농장 재배인)의 아름다운 정치 행위를 여기서 우리는 봅니다.
여기서 저는 정치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간단히 저의 대답을 하고 싶습니다. ‘정치란 최선을 찾되 나 홀로가 아니라 함께 찾아서 잘 살자고 하는 인간들의 행위이다.’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뭉치는 것이 정치집단입니다. 과수원 주인과 농부는 그렇게 최선을 찾고 있습니다. 과수원에서 정치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러한 정치적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그 까닭은 오늘 성경의 바로 앞 단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아주 정치적인 질문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바치려고, 즉 종교 행위를 하려고 모였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정치인 빌라도가 죽였는데(루카 13, 1 참조), 이를 어찌 보시느냐고 질문했던 것입니다. 종교적 상황과 정치적 상황의 동시적 사건에 대한 견해를 예수님께 질문한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정치와 종교의 차원을 함께 하는 인간 자신의 문제를 들어서 대답하십니다. 그것은 정치적 인간 따로 있고 종교적 인간 따로 있은 게 아니라, 한 인간이 근본에서부터 짚어야 할 과제를 지적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 과제란 곧 ‘회개’인 것입니다. 인간이 변해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즉 사람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서 국민 앞에 한 점도 뉘우치지 않으면서 정치 지도자로 나서겠다는 사람들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은 잘못 한 게 없다는 듯 그보다 더 그렇게 얼굴이 두꺼울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양심에게 책임을 물어보는 태도를 터럭만큼도 엿볼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이 차지할 부와 권세만을 집착하여 부끄러움도 상실한 모습으로 지도자연 합니다. 참으로 안타깝기만 합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과오에 대한 책임을 회피합니다. 그러므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만 하면 다 되는 세상인 것입니다. 모두가 다 그렇다면 거기엔 참다운 정치도 실종 되고 있습니다. 정치는 없고 독단(독재)만 있습니다.
사람은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사람입니다. 그리고 과오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물을 줄 알아야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끼친 잘못에 대한 배상을 자신에게 청구하는 마음 즉, 뉘우칠 줄 아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의 사람은 그래서 아름답습니다. 인간이 인간으로 돌아올 줄 알 때 아름답습니다. 뉘우칠 줄 모르는 건 짐승입니다. 우리말에 아주 못된 짓을 하고 깨닫지도 않는 사람을 일컬어 ‘개만도 못한 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데리고 사는 우리 집 강아지 ‘오카미’라는 녀석은 들어오지 마라는 방에 언뜻 따라 들어왔다가 주인인 제가 뒤돌아보면 슬그머니 저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뒤돌아 나갑니다. 그 녀석은 그렇게 잘못을 깨닫고 뉘우침(?)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자신의 못된 짓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개만도 못한 놈’이라 하는 말에 이해가 갑니다.
우리의 오늘날 정치 상황에서 뉘우치는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사람들 끼리 화합을 이루는 단초는 뉘우치는 일에서부터 가능합니다. 그래서 서로 믿고 살맛나게 살 수 있습니다. 뉘우치는 사람의 얼굴에 대고 차마 삿대질을 하지 못하는 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선량한 본성이기에 그렇습니다. 진정으로 뉘우치는 태도는 사람의 모습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인 것이기에 거기서 서로간의 증오도 녹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해서 그러한 뉘우침으로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 인간의 본래적 선성(善性)을 되찾는 마당이 열리고 기왕의 난국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전기(轉機)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뉘우침을 우리는 회개(悔改)라 합니다. 회개하는 사람이라야 새로워지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사순절 제3주일의 복음 메시지로 그러한 회개 촉구를 강렬하게 전해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행을 당한 사람들을 놓고 그들이 잘못 한 게 많기 때문이라고 평가하기에 앞서 스스로들 먼저 회개하라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 13, 5) 오늘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과수원 주인과 농부 사이의 대화를 소개하셨습니다. ‘회개’를 주제로 하는 비유로써 과수원 주인과 농부 사이의 마음 떠보기 대화 즉, 정치적 대화를 제시하셨습니다.
과수원에서의 그 대화를 제가 정치적 대화라고 일컫는 까닭을 앞서 설명했습니다만, ‘회개’에 있어서도 정치성이 게재돼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그것이 정치적인 까닭은 ‘회개란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회에 따름’이라는 뜻에서 그렇습니다. 좋은 꼴을 보이진 못하면서 찾이할 것만 욕심껏 누리는 무화과나무처럼 백해무익한 물건은 없애버려야겠지요. 세상에서 부정부패만 골라가면서 저지르면서도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들이 하느님께 벌 받지 않고, 착한 사람들은 불행하게 사는 현실의 불합리를 개탄할 수 있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불합리의 현실을 아직 참아 기다리시는 듯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함께 좀 참아보자고 말씀하십니다. 참아나가면서(undergoing) 좋은 앞날을 보자고 하십니다.
참아나간다는 것은 불합리를 인정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을 심자는 것입니다. 그 희망은 다른 곳에 있지 않고, 우리 인간의 내면에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인간 내면에서 희망이 심어진다는 것은 곧 인간 마음이 회개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건 사람이 변함으로써 좋은 내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회개’는 곧 ‘희망의 가장 확실한 씨앗’입니다.
우리가 지금 나아가는 이 사순절의 길은 바로 그 ‘회개’를 그 바탕으로 합니다. 극기와 보속으로 자신을 갈고 닦음으로써 새롭게 되는 사람의 진정한 변화란 그 근본이 회개인 것입니다. 그 회개란 자신의 속을(내면을,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생각을, 마음을, 의지를 바꾸는 것이 곧 회개인 것입니다. 그것은 곧 자신을 바꾸는 것입니다. 회개, 그것은 나를 내가 바꾸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한 ‘나의 바꿈’, 즉 회개가 아니고서는 우리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해서 우리는 말합니다. “내가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고 말입니다. 오늘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과수원주인과 농원지기 사이에 오간 말의 예화로, 우리 자신이 지금까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였다면, 이제 앞으로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무화과나무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루카 13, 6∼9 참조). 열매를 맺기까지 기다려주시는 하느님의 뜻을 예수님께서 전해주시는 것입니다. 고도의 멋있는 정치적 메시지이지요. 하느님께서 기다려 주신다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무화과나무로의 변화를 기다려주시는 하느님께서는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시는 분(루카 13, 8∼9 참조)으로 당신의 성자(예수님 자신)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러한 하느님을 찬미하는 우리는 화답송으로 다음과 같이 오늘 노래합니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 하늘이 땅에 드높은 것처럼, 당신을 경외하는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네.”(오늘의 제1독서 화답송 중 시편 102, 8∼11의 내용)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자하셔서 분노에 더디십니다. 혹여 잘못을 저질러 온 것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당장 징벌하시지 않고 우리가 그 잘못을 청산하여 변화되는 날을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늘이 땅에서 높고 높은 것처럼 인자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변화되기까지 기다려주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허약한 무화과나무라면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시듯이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교회를 통하여 은총의 거름을 얻을 수 있게 하여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변화될 수 있는 기회로써 사순절이라는 은혜의 시기가 설정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그 사순절 과제로써 회개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행보를 걷는 것입니다. 즉 사순절은 회개를 위한 정치적 배려의 기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치권의 사람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들도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치고 변화를 이룸으로써 세상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우리의 정치적 이 시점에서 뉘우치고 책임을 스스로에게 묻는 모습이 간절히 요구되듯이, 우리는 스스로의 변화, 즉 회개로써 거듭나는 사순절의 길을 가야겠습니다. 우리 각자가 모두 자신에게 책임을 묻고 뉘우치는 거기에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집니다. 뉘우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벌써 변화되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본모습을 되찾는 것이 뉘우침이기 때문입니다. 회개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정 뉘우침을 보이는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자기의 죄를 인정하는 사람이라야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죄를 자신의 탓으로 읽을 수 있는 양심 속에서 새롭게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이 다시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로써 세상 또한 아름답게 변화됩니다. 부활절이 그렇게 다가올 것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5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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