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4주일, 2013 3 10일 오전 9시 @ 도화담공소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자식 이길 수 없다는 데 ...!

자녀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



오늘 사순 제4주일로 우리는 사순절을 벌써 반절 이상 지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사순절의 지루한 여정에서 혹 힘겨워 하고 있을 신자들을 위로 격려하는 노래로 교회는 오늘의 미사 전례를 시작 합니다(사제의 장미 빛 제의 색깔도 그 뜻을 표시함). 


그것은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는 오늘 미사의 입당송입니다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그를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모여라. 슬퍼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 오늘의 이 입당송은 이사야 예언서 6610-11절의 메시지입니다.


이 기쁨의 메시지는 오늘의 복음 성경 내용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 유명한 탕자(蕩子)의 비유입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발견되지 않는 이 유명한 비유를 단독으로 전하는 루카복음서에서 우리는 이 내용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잘 식별해야 합니다. 성서학자들은 루카복음서가 다른 복음서들에 비하여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많이 수록하고 있는 것으로 그 특징을 짚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활동 벽두부터 그런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큰 관심을 보여주셨음을 주요 기사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 예로써 예수님의 첫 설교(나자렛 회당에서의 설교)는 그 주제가 이사야 예언서(61, 12 ; 58, 6)를 인용한 가난한 사람들, 포로들, 소경들, 억눌린 사람들에 대한 은총의 선포였음을 전하고 있습니다(루카 4, 1819 참조).


그리고 이어서 루카복음서는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과 불쌍한 사람들과 멸시받는 여인들과 죄인들을 각별히 아끼시는 바에 대하여 그 말씀과 기적을 행사하심과 행적 보도 가운데 수십 편 수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루카복음서에 소외된 사람들의 복음서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도 그렇듯이 소외된 사람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으면서 알아들어야 할 내용입니다. 즉 이 비유의 내용은 주님께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하여 최우선적으로 지극한 관심을 지니고 계시다는 것을 그 주제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의 탕자의 비유가 그것 한 가지만 불쑥 여기에 수록된 것이 아니고, 그 앞에 다른 두 가지 비유를 연이어 루카복음서 15장에 소개하는 걸 보면 쉽게 깨달을 수 있는 바입니다. 루카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먼저 잃었던 양 한 마리를 되찾은 사람의 기쁨’(루카 15, 47)잃었던 은전 한 닢을 되찾고 기뻐하는 여인’(루가 15, 810)의 비유를 들려주셨다고 전하고, 이어서 탕자의 비유’(루카 15, 1132)를 말씀하신 것으로 편집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루카복음서의 이 15장은 이야기 세 가지로, 잃었던 것을 되찾은 주인공의 기쁨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야기 세 가지의 주인공은 공통적인 존재입니다. 따지고 보면 그 주인공은 한 분, 주님입니다. 앞의 두 가지 비유는 세 번째 비유의 내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서론적인 도움말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의 비유에 대한 제목을 잃었던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기쁨이라고 붙여야 합니다.


해서, 루카복음서 15장의 전체적인 제목을 간단하게 붙이자면 아버지의 기쁨이라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기쁨이라는 주제(主題)에 대한 부제(副題)자녀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이라고도 붙이고 싶은 게 저의 마음입니다. 가출하여 객지에 나가 소식 없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매일 대문 앞에 서서 동네 입구만 하루 종일 쳐다보고 있던 아버지께서, 멀리 거지꼴로 터벅터벅 돌아오고 있는 작은 아들이 보이자 측은한 마음으로 달려가 그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그 장면은, 그분이 아버지이든 어머니이든 자녀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과 동일하게 자식 사랑을 보여주는 감동적 장면인 것입니다


여기서 주인공은 아버지이시지만, 그분은 일반적인 의미의 아버지나 어머니이기보다는 하느님 당신 자신이십니다. 그분의 마음과 태도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과 태도, 그리고 어머니의 마음과 태도가, 다 융합되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느님께서는 아버지이시고 동시에 어머니이신 분으로서 자녀를 그렇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만 하느님의 마음을 전하는 성경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한계성 때문에 그분을 아버지의 모습으로 전하고 있습니다만, 하느님은 아버지도 되시고 어머니도 되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아버지의 마음 또한 어머니의 마음 못지않은 자식 사랑으로 녹아드는 간절함을 지닌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라는 우리말이 있듯이, 오늘 복음서에 묘사된 아버지의 모습이 곧 아들을 이기지 못하고 애간장만 타는 모습입니다. 10여 년 전에 세상을 터나신 저의 아버지께서도 그런 분이셨습니다. 제가 사제 생활하면서 되도록이면 교회 관습에 따라 부모가 저의 사제직 수행에 관여치 못하시도록 저의 성당 일에 대하여 궁금해 하시는 부모님께 일체 알려드리지 않고 살았습니다. 헌데 오래도록 병석에 누워계시던 저의 아버지께서, 제가 일하던 대전의 D성당을 보고 싶어서, 아들인 저 모르게 다른 사람의 자동차를 빌려 타고 슬그머니 그 성당에 다녀가신 일이 있음을 뒤늦게 알게 된 저는 그분 세상 떠난 지금에까지도 마음이 아픕니다. 그토록 아들 있는 곳을 알고 싶으셨던 병석의 아버지 마음을 아들인 제가 몰랐었던 것이 그렇게 후회스럽습니다. 그렇듯이 아버지 또한 어머니 못지않게 자식 걱정 때문에 늘 조이는 마음으로 사는 분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정서적으로 표현할 때는 집 나간 자식을 기다리는 분의 모습을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그립니다. 그런 표현이 주는 감상으로 제가 오래 전 봄철에 글을 쓴 것이 있습니다. 안면도성당에 살던 시절의 것인데, 본당의 열악한 경제사정으로 밥해주는 분을 둘 수 없어서 저 혼자 밥해먹고 살았지요. 그러면서 매 끼니를 챙겨먹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라서 주일에는 대개 가까운 음식점에 가서 사먹곤 하였는데, 봄철의 어느 주일에 본당의 주일미사를 끝내고 오후 공소의 미사를 드리러 출발하기 전에 음식점에 점심밥을 사먹기 위해 서둘러 나가던 길에 느꼈던 마음을 다음과 같이 그날 일기장에 썼던 것입니다.


점심을 사먹으러 가다가 길가의 외딴 집 앞 늙은 살구나무를 보게 되었다. 꽃봉오리가 막 터지고 있느라고 가지마다 불그레한 물감을 흘리고 있는 듯한 그런 살구나무다. 그 외딴집 앞의 살구나무를 보자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쩌면 해가 긴 봄날 오후에 학교에서 돌아오던 어린 시절의 어느 날, 배가 고프던 추억처럼 어머니 생각이 났다. 집에 돌아오면서 대문 앞에 나와 나를 기다리시는 어머니를 보자 더욱 배가 고프던 그런 옛적 어느 날 같은 마음이었다. 집에 가면 어머니가 밥을 주신다는 생각으로 달려가다가 나를 기다리고 계신 어머니 모습을 집 앞에서 문득 보게 되는 그런 마음이었다.”


사실 그렇게 시골 집 앞에 서있는 살구나무의 모습은 밖에 나간 아들을 기다리고 서계신 어머니의 모습 같습니다. 그래서 어디고 살구꽃이 피면, 그게 나를 기다리며 대문밖에 나와 계시다가 내가 집에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반가워하시던 어머니의 얼굴 색깔로 그렇게 피는 살구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들이 괴로울 때 언뜻 간절해지는 것이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저의 어머니께서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나셔서, 저는 지금 아버지도 어머니도 찾아가 볼 수 없고 어쩌다가 그분들의 무덤에나 가보는 신세입니다. 가끔 미사 봉헌하면서 죽은 이들을 위한 성찬기도 대목에 잠시 부모님을 생각하곤 합니다. 지금 이 강론 원고를 쓰면서도 문득 어머니 생각에 눈물이 납니다. 봄철이 되어 꽃피는 살구나무를 만나면 또 그렇게 어머니 생각으로 가슴이 멍멍 해집니다.


부모의 입장으로 자식 걱정에 있어서는 아버지든 어머니든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자식 걱정을 하시는 분의 모습으로 대문 앞에 매일 종일토록 나와 계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라고 오늘 예수님께서 잃었던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라는 우리말처럼, 우리 인간들을 이기지 못하시는 하느님께서 밤이나 낮이나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 걱정을 하시는 분이시라고 오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자녀들인 우리는 하느님의 그 마음도 모르고 세상살이에 취하여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하느님 뜻과는 달리 죄를 짓고 삽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문밖에 나와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우리가 당신의 품속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 어머니의 마음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건 또는 얼마나 많은 나쁜 짓을 저질렀건 개의치 않으십니다.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이기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가 당신의 아들다운 모습으로 되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아버지의 재산을 들고 객지로 나가 다 까먹고 타락과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며 당신의 아들 자격마저 상실해가지고 거지꼴로 돌아와 아들이 아닌 종으로 받아달라는 그 아들에게 과거를 묻지 않으시며 무조건 당신의 아들 자격을 되돌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아들 자격을 무조건 되돌려 주시는 표시로 아버지께서는 당신 아들이라는 상징의 가락지를 끼워주시고는 기쁨의 잔치를 베푸십니다(루카 15, 2024 참조).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 처지가 어떻든지 간에 하느님 마음은 하늘보다 더 높고 넓은 자비로 가득 차 계시다는 것을 오늘의 비유로써 예수님께서 강조하시고 계심을 우리는 새삼 깨달으면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사순절 회개의 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아버지의 자녀라면 오늘 비유의 끝 장면에 등장하는 큰아들처럼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심보(루카 15, 12 참조)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루카 15, 2530 참조), 행여 우리 이웃의 형제자매와 함께 하는 하느님 나라의 참 뜻을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스런 자녀들이기에 그렇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우리 모든 자녀들을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오늘 예수님께서 이렇듯 강조하시고 계십니다.


이제 사순절 길이 반절을 넘겼습니다. 부지런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아들이 되어 부활의 기쁨을 향한 회개의 발걸음 서둘러 나아가기로 합시다. 그렇게 살구꽃 피던 봄날처럼 부활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6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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