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2주일, 2013년 2월 24일 오전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지금 여기, 하늘나라!
산 위에서의 체험으로 ...
사순절을 지내면서 그 두 번째 주일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측근 제자들과 함께 산위에 올라가셔서 보여주신 것을 전하는 성경기사를 읽게 됩니다. 이와 똑같은 복음 성경의 내용에 따른 축일을 교회는 매년 8월 6일에 지내기도 하는데, 그 축일의 명칭이 ‘주님의 거룩한 변모(變貌) 축일’이라 합니다. 옛적에는 이 축일을 좀 어려운 한자어로 ‘현성용(顯聖容) 축일’이라 했습니다. 그 뜻은 거룩한 용모를 찬란하게 보여주신 축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찬란하게 보여주시는 그분의 거룩한 모습을 볼 수 있었던 사람은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 세 사람이었음(루카 9, 28 참조)을 오늘 우리는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의 거룩한 모습은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러한 체험은 아무러한 때나 아무데서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오늘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보았듯이 그것은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시는 동안에 일어난 일입니다(루카 9, 28∼29 참조).
이렇게 오늘 복음서에서 주목해야 할 점을 제가 강조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사제 생활해오면서 수많은 애환을 겪어왔습니다만, 그 중에서 제가 가끔 자책하면서 가장 마음 아프게 기억하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20여 년 전에 일하던 본당에서의 일입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오래 근무하신 내외분을 예비교우로 맞이하여 저 나름으로 성심껏 교리와 신앙 지도를 해드려서 그 부부에게 기쁘게 세례를 베풀어드렸습니다. 그 부부께서 영세하신 후 저는 그분들 사시는 지역의 신자들과 잘 어울리도록 구역반 모임에 안내를 하여 드리고 본당의 성경 공부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권고를 했습니다. 당시 그 본당에서 저는 매주간마다 신자들께서 읽고 공부할 수 있는 성경 해설을 본당주보 형식으로 발행하여 배부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부도 그러한 성경 읽기 프로그램에 따라 점점 더 신앙적 기쁨과 신심의 성숙을 얻도록 이끌어드렸습니다. 그리고 본당의 전례 활성화를 위하여 전례공부와 전신자의 성가개창 연습을 시켰습니다. 헌데 그리 하던 중에 그 부부께서 저에게 항의조로 하시는 말씀이 “천주교회는 시키는 일이 너무 많아서 참 힘드네요.”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그 부부에게 저는“신앙생활이란 세례 받은 것으로 한 번의 자격증을 얻은 삶이라기보다는 끊임없이 노력함으로써 깊이를 더해가고 성숙해져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는데,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그분들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간 그 부부께서 보이질 않기에 방문하겠다는 전화를 드렸더니 오지 말라며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해서 그 구역장에게 그 부부의 사정을 알아본즉, 그분들은 천주교 믿기가 힘겨워서 마음 편하게 다닐 수 있는 불교의 절에 다니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불교 사찰에 다니면 우리 천주교에서처럼 매주간 정해진 날에 모이러 가지 않아도 되고, 우리 천주교회에서처럼 밥을 굶어야 하는 날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계속적인 공부를 하라는 닦달을 당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안면도 성당에서 지낼 때 느낀 것인데, 우리 천주교 신자들께서는 멀리서 주말관광으로 안면도에 와서도 성당이 어디 있는지 알아보고 찾아와 주일미사를 봉헌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일요일이라는 그 주말휴가의 기회에 관광지에 가서 일부러 사찰을 찾아가 불공을 드려야 하는 불교의 계율이 있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하여튼 우리 천주교 신자들께서 관광지에 가서까지 주일미사 봉헌을 위하여 시간과 노력을 바치는 그것은 참으로 갸륵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천주교 신자들의 태도는 곧 오늘 복음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예수님의 측근 제자들처럼 주님을 따라 힘들게 산에까지 올라 기도하는 모습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한 노력을 기울임으로써만이 신앙의 깊이를 더할 수 있고 신앙으로써 진정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 특별한 노력을 요구당하지도 않고 편리함을 도모하기만 하는 것이 신앙의 길은 아닌 것입니다.
신앙의 길은 힘들여 올라가는 여정인 것입니다. 해서 저는 신앙의 길이란 등산하는 것과 흡사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 산위에서의 체험을 전하고 있는 성경은 산을 특별한 장소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하느님께 바치러 올라간 곳, 모세가 민족을 구해야하는 사명을 하느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곳, 그리고 엘리야 예언자가 하느님을 체험한 곳이 산이었습니다. 그렇듯이 예수님의 측근 제자들이 주님께 대한 특별한 체험을 한 곳이 곧 산이었습니다.
성경에서뿐만이 아니고 우리의 일반적 체험으로도 산은 그 영험함으로 인하여 거기 들어가는 인간으로 하여금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하여줍니다. 그리고 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땀을 흘려야하고, 정작 산꼭대기까지 오르면 거기 오르면서 흘렸던 땀처럼 잡다한 생각과 자만과 모든 욕심을 자신에게서 떨쳐낸 마음이 되어 산 아래 세상살이 사이의 갈등이 부질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마치 산이 하늘과 가까운 곳이듯이 거기 오른 사람은 하늘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마음이 되어 잡다한 세상의 일거리에로의 집착을 벗어버리는 순간이 됩니다.
저는 15년 전에 개인적으로 백두대간을 종주하였습니다. 그 종주는 일주일에 하루씩 구간을 나누어 가는 산행이었습니다. 하루의 구간 목표로 삼은 산의 허리에 접근하는 그날그날의 새벽마다 여명의 하늘 아래 마루금을 드러내는 그 산의 정상을 바라보게 되면 가슴이 고동치곤 했습니다.
하늘과 맞닿은 저 산꼭대기의 기상으로 이 땅위에서 버둥대는 나 자신을 이겨보자는 결의에 차서 가슴이 뛰는 것입니다. 한번은 영하 10여도로 떨어진 추위 가운데 한 밤을 자동차로 달려서 강원도 태백과 정선 사이의 만항재에 이르러 새벽 4시에 함백산을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눈밭의 어두운 산허리를 오르면서 정상의 턱밑에서 신비스럽게 밝아오는 여명을 따라 꼭대기에 빨리 올라 해돋이를 보고픈 마음으로 성급히 기어오르느라고 넘어지기를 여러 번, 드디어 1,573m의 정상에 오르는 순간 험준한 동녘 준령위로 떠오르는 찬란한 태양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 환희를 전하기 위해서 대전에 있는 친구 신부에게 휴대전화를 걸었습니다. 아직도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면서 짜증스런 대답을 하는 그분에게 그 일출의 장관을 전하기에는 저의 말이 참으로 한계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순간의 장관을 볼 수 없는 산 아래의 사람들이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의 그 순간 심정은 아마 오늘 복음 성경에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면서 예수님께 거기 머물러 지내자고 말한 베드로(루카 9, 33∼34 참조)의 기분과 같은 것이었다 할 것입니다. 그 순간을 붙잡아두고 싶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체험한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은 아마 제가 함백산 정상에서 바라본 일출의 장관보다 훨씬 찬란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태양보다도 더 빛나는 그분의 모습을 체험한다는 것은 곧 땀 흘려 산을 오르듯이 우리가 노력하고 또 노력하여 얻어야 할 신앙의 체험인 것입니다. 목적도 없이 세상의 편안한 길을 배회하는 삶이 신앙의 길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 영광의 주인공이신 그분에게 다가와 이야기를 건네는 예언자들(모세와 엘리야)은 예수님께서 머지않아 당할 고난과 죽음에 관한 대화를 하던 것이었습니다(루카 9, 30∼31 참조). 그러한 영광의 순간은 고난과 죽음을 전제로 한 미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 미래가 당도하기까지는 자기들이 본 바에 대하여 뭐라 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루가 9, 30∼31 참조). 그것은 우리 또한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기까지는 지금의 현실을 가지고 진정 신앙으로 성취할 목표를 잣대질할 수 없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신앙으로 성취할 진정한 목표를 달성하기까지는 오로지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 35)하는 말씀에 따를 수밖에 다른 기준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목표를 향하여 걸어가야 할 신앙의 길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오리무중에 즉, “구름 속에서”(루카 9, 35) 오로지 예수님 가시는 길을 찾아 그분 말씀 따라 갈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 사순절의 길을 걷는 동안에도 그분의 영광스런 모습을 찾는 발걸음이 되어야겠기에 교회는 그분의 수난을 예견하는 순간적 빅 이벤트로써의 그 영광 체험으로 우리의 용기를 북돋우고 있습니다. “임께서 가신 길은 영광의 길이었기에 그 모진 길을 가셨으리라”는 말은 옛 유행가의 노랫말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길임을 오늘 복음이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읽는 복음 성경의 단락에서 그 첫 구절을 잘 살펴보자는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여드레쯤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루카 9, 28)라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번 2월의 <매일미사>책 24쪽에 수록되어 있는 것은 이 구절에서 앞부분을 빼고 ‘그 때에 예수님께서(…)’라고 인쇄되어 있습니다. 오늘 봉독할 내용을 <루카 9,28ㄴ-36>라고 제시하고 있는 지침에 따른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거두절미하고 편의성을 따른 지침에 대해서 저는 개인적으로 불만스럽습니다. 미사 참례하는 신자들이 성경의 전후 배경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래서 교우님들께서 <매일미사>책에 의존해서만 전례를 참례하는 게 불만스러워서 전에 본당신부 노릇하던 시절에는 <매일미사>책이 아니라 성경책을 가지고 다니라고 교우들을 닦달했습니다. 그것 때문에도 앞에 예를 든 부부 교우께서 힘들다면서 불교로 개종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본론에서 비껴나간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만, 게재에 저의 주장을 해보았습니다.
하여튼, 오늘 복음의 첫 구절 루카 9장 28절에서 “이 말씀을 하시고 여드레쯤 되었을 때”라는 시간과 “산에” 오르셨다는 장소를 강조한 내용을 주목하자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 장소와 시간은 곧 하늘나라가 성립되는 ‘때’와 ‘곳’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3명의 제자들이 산위에서 체험한 그 ‘때’는 언제였을까요? 그것을 눈치 채려면 그 구절의 바로 앞 구절을 읽어보면 됩니다. 루카복음 9장 27절이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고는 “이곳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를 볼 사람이 더러 있다.”고 하셨습니다(루카 9, 27). “이 말씀을 하시고는 여드레쯤 되었을 때”(루카 9, 28) 예수님께서는 세 사람을 데리고 “산에” 오르셔서 오늘의 체험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를 볼 사람이 더러 있어야 하는데, 그 사람들이 누구들일까?’ 하고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3명 제자들과 같은 예수님 최측근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우리 열심한 신자들이어야 합니다. 그 열심한 신자들은 누구이겠습니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 뒤를 따라가면서 예수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들’(루카 9, 23∼24 참조)입니다. 그런 사람들이어야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를 볼 사람들”(루카 9, 27)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는 “여드레쯤 되었을 때,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습니다(루카 9, 28).
그렇다면 그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죽기 전에 이미 ‘하느님 나라’를 본 사람들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는 곧 번쩍이는 옷을 입으신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곳입니다. 그곳에서 나누는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곧 세상을 떠나실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루카 9, 30∼31 참조). 이때 베드로는 넋이 나간 채 말을 합니다. 그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 현실에 붙잡아 두기 위해서 초막 셋을 짓자고 말입니다(루카 9, 32∼33 참조).
그러나 정신 나간 베드로가 얼마나 착각하고 있는 지를 그 다음 구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모습은 어느 듯 구름으로 덮이고 맙니다. 그 구름 속에서는 “너희는 예수님의 말을 들어라.”하는 말이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베드로와 그 동료들에게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아무에게도 그 본 것을 말하지 못하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루카 9, 34∼36 참조). 그리고는 다음 날 산에서 내려와 세상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사람들은 마귀 들린 사람 때문에 소란을 떨고 있었습니다(오늘 읽은 루카 9, 28∼34의 다음 단락 참조). 산에서 체험한 천국과 대비되는 세상의 현실로 돌아온 상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 우리의 현실은 이렇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현실’과 ‘하느님 나라’의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점에 관하여 마침 빌그림 신부님(Fr.B.Grimm)의 이번 주 강론 말씀을 참고하고 싶습니다. 그분은 아시아 가톨릭 뉴스(UCANEWS.COM)의 ‘주일 복음 묵상’에서 다음과 같이 강론하고 있습니다. 'The problem is that words just do not suffice'라는 제목의 강론인데 그 내용이 대충 아래와 같습니다.
그리스도 신자들은 자신들이 걸어가고 있는 현실의 세상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하늘을 목표 삼아 열중하는 사람들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데, 일부 그리스도 신자들은 그렇기도 하지만 그렇다 해서 하늘나라를 지향하는 우리의 신앙이 그런 식으로 비난받을 일은 아니라는 그림 신부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림 신부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늘나라’란 어느 장소와 어느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공(時空)이란 우주 안의 것입니다만, ‘하늘나라’란 그걸 초월한 것입니다. 그렇다 해서 천국은 시공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 있어서는 ‘하늘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였던 것입니다. ‘하늘나라’란 여기 언제가 있었던 것 혹은 얼마간 있다가 없어지는 것 또는 앞으로 생길 어떤 것인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생각은 부질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말한 바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이 있는 사람들이다.”(필리피서 3, 20)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시민권이란 이 세상의 이 사람 저 사람의 정치적 시민권과는 다른 것입니다. 천국의 시민권이란 진정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응답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세 제자들이 예수님 따라 산에 올라갔는데, 거기서 세상에서 보지 못한 현상으로 달라진 것을 체험합니다. 그분의 옷이 번쩍번쩍 빛나며 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인이나 또는 하늘의 현상을 그릴 때 빛나는 형상과 훈광(暈光)을 넣어서 묘사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현상은 우리 현실에서는 감지할 수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란 우리가 죽은 다음에야 볼 수 있는 것인 양 생각합니다. 이건 맞는 말이지요. 그러나 동시에 틀린 말입니다. ‘하늘나라’는 아직 오는 중입니다. 그렇지만 현실로 와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우리는 지금 ‘하늘나라’의 시민권자로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는 이미 우리의 것입니다. 아직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그 ‘하늘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희망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하늘나라’는 지금 오고 있는 중이고, 우리의 삶 속에는 이미 ‘하늘나라’가 성취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례 받음으로 인하여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하늘나라’가 이미 주변 현실로 우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그림 신부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다음과 같이 확신할 수 있습니다.
세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랐을 때 거기가 ‘하늘나라’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곳이라면 거기가 이미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리, 그곳이 ‘하늘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그상태가 ‘하늘나라’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고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공동으로 하느님을 향하여 예배를 올립니다. 마치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곳에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끼었듯이, 우리가 하느님 섬기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그 상태가 곧 이미 ‘하늘나라’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그 ‘하늘나라’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란 한국이라는 나라, 미국이라는 나라, 등등의 현실 정치적 단위의 국가 즉 어떤 곳과 어떤 시기에 존재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내가 사는 삶 속에 있는 나라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 삶속에 있는 ‘하늘나라’ 사람이 바로 ‘나’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는 여기, 내가 사는 곳에 있습니다. 그러한 ‘하늘나라 사람’임을 확인하고 그 시민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사순절이라는 특별한 시기를 각성하여 지냅니다. 그 각성하는 방식이 기도, 참회, 근신, 자선행위인 것입니다. 그렇게 나는 예수님의 최측근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각성을 위하여 우리는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우리의 것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산에서 내려오면서 제자들이 아무 말도 못하였듯이 우리는 입으로 말하는 하늘나라 체험이 아니라 마귀 들린 사람들로 소란스런 현실의 세상에서 악을 추방하면서 우리가 당하는 고뇌를 묵묵히 걸머지고 부활의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분 따라서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듯이 우리도 부활절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사순절의 길, 즉 고뇌와 참회 보속의 길을 가는 것은 진정 우리가 주님과 함께 얻고자 하는 영광의 길인 것입니다. 그러한 길을 가면서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그 사순절 속에 영광의 부활의 날이 이미 함유되어 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봄이 왔음을 느끼고 깜짝 놀라서 땅속의 모든 미물들이 잠을 깨어 뛰어나온다는 경칩(驚蟄)이 멀지 않은 이즈음에 아직도 추위가 풀리지 않는 날씨라서 혹여 봄은 아직도 먼 데 머물러 있지 않은가 하여 움츠러들 수 있습니다만, 분명히 봄은 지금 우리의 산야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오히려 찬바람으로 깜짝 잠을 깨고 서둘러 새로운 생장을 준비하라는 메시지가 이 사순절 중반의 소식인가 합니다.
그렇듯이 부활절은 멀기만 하고 우리의 사순절이 길게만 느껴질 수 있습니다만, 기쁨을 향하여 가기까지는 고뇌와 참회로 우리 자신을 일깨워야 함을 오늘 복음은 그 사순절 메시지로 전하고 있습니다.
(이 강론 원고를 작성하다가 내다본 밤하늘은 정월 열나흘 달이 휘영청 뜬 하늘입니다. 잡곡밥 아홉 그릇까지 먹으며 맞이해야 한다는 대보름이 내일입니다. 원고를 작성하다가 한숨 돌리고자 밖으로 나가 바라본 열나흘 달은 두어 시간 전에 앞산 안테나에 걸려있더니 어느 듯 중천에 떠서 웃고 있네요. 만월에 아직 못 미친 열나흘 달이 오히려 더 예뻐 보입니다. 나를 내려다보면서 윙크하느라고 얼굴 옆모습이 조금 일그러져 있군요. 그러면서 내일 밤 다시 만나자 하는군요. 그렇게 보름달 다시 2월(음력)에 뜨게 되면 부활절이 오는 것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4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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