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수요일, 2013년 2월 13일 오전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정초에 재수 없게?
왜 재를 뿌려?
우리는 오늘부터 사순절을 시작합니다. 단식 그리고 금육으로 정신무장을 하고 머리에 재를 얹으면서 ‘인간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회개하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이런 재를 받는 전례예식을 집전하는 사제로서 저는 오늘 참례하시는 교우님들께 다소 미안한 생각을 합니다.
제가 미안한 생각을 하는 까닭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는, 저 자신부터 ‘회개’를 옳게 하고서 교우님들께 ‘회개하라’는 말을 하는가하여 저의 마음 한 구석이 찔리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오늘이 정월 초나흘인데 설날을 갓 지난 명절 분위기를 망치는 말을 하게 되어 그렇습니다. 사람을 두고 먼지(흙)에서 왔으니 먼지로 돌아가라고 을러대고 있으니 말입니다. 정초에 재수 없게끔 말이에요. 우리네 미풍양속에 설날부터 대보름까지 정초엔 새해 복 많이 받으라면서 새해의 좋은 일을 서로 축원해주는 게 인사인데, 이 새해의 벽두에 재를 뿌리니 정말 기분 잡칠 일이지요.
이러한 재의 수요일을 설날과 같은 날짜로 맞이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2005년의 설날이 그랬었습니다. 그해의 양력 2월 9일이었는데 그날이 마침 ‘설날’이자 ‘재의 수요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명절과 교회 전례가 상충되어 교우들께서 당혹스러워 할 것을 염려하신 주교님께서 그 얼마 전에 공문을 내려 보내셨는데, ‘재의 수요일을 이틀 연기하여 금요일에 지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다시 정정 공문을 보내시길 ‘재의 수요일은 중요한 전례의 날이므로 생략할 수 없는 것이니, 그 재의 수요일 미사 중에 설날의 조상을 기억하는 기도를 하고, 단식과 금육의 의무를 관면하지만 재의 예식은 다른 적당한 날에 꼭 거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일선 사목 현장의 본당 공동체에서는 혼선이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올해엔 다행스럽게도(?) 설날과 4일의 시차를 두고 재의 수요일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정초에 재를 머리에 얹는 것이 좀 찝찝한 기분이 듭니다. 명절 당일이 아니라 해도 며칠 상간의 정초 기분을 좀 상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설날부터 보름 동안의 이러한 정초는 우리네 민간 습속에서 신성시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초신수는 곧 일년신수’라고 하며, 정월 보름까지 치성을 올리는 습속이 바로 그런 ‘정초신수’를 신성시하는 심성입니다. 그러한 우리네 심성을 정반대로 거슬려서 교회는 ‘재의 수요일’이라면서 머리에 재를 뒤집어쓰고 단식을 하라 하니 이 어찌 고약한 일이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까? 올해처럼 며칠 상간이 아니더라도 으레 재의 수요일은 설날과 그리 멀지않은 기간으로 만나는 절기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달력으로 맞이하는 정초와 절후로 맞이하는 입춘에는 새해 운수를 조심스럽게 점쳐보는 습속이 있습니다. 그래서 입춘과 정초에는 점집의 문턱이 번잡하기도 합니다. 봄맞이와 새해맞이는 그렇듯 민간에서 행운의 창을 열고 그것을 맞이하려는 간절한 염원을 표출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민간 심성을 미신이라 해서 타파하자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저는 백성의 그러한 연약한 심성에서 우러나오는 염원을 무조건적으로 배격하기란 좀 잔인하지 않은가 생각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러나 이러한 ‘정월신수(正月身數)’와 ‘사순절 맞이’의 만남을 절묘한 조화로 읽고 싶습니다. 정월신수란 먹고 마시며 즐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심신을 곧바로 세워서 치성(致誠)함으로써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사순절 맞이의 ‘재를 머리에 얹음’은 우리의 ‘치성’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네 말에 “시작이 반이다.” 하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새해맞이로 살피는 정초신수로써 한해 목표성취의 반절이 달려있다 할 수 있고, 가족과 이웃과 위아래 사람들 사이에 도리를 찾고 다짐하여, 하늘과 사람들에게 감사할 줄 알고 그 뜻을 실천에 담도록 새로운 각오를 세우는 사순절 정신은 매 한가지 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소홀히 된 우리네 사이의 그늘진 곳에 대한 새삼스런 보살핌의 마음을 다시 지니게 되고, 대동 공영의 복을 함께 비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늘 재의 수요일에 다짐하는 40일간의 사순절 행보에 대한 기초로써 참회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의 결심 하에 부합되는 동일맥락으로 마음의 다잡음을 하는 것은 정초의 마음과 같은 정신인 것입니다. 참회로 묵은 때를 씻음은 정초의 새로운 마음과 같은 것이며, 자선은 서로 간에 혹여 잊었던 마음 씀씀이를 되살려 사랑하는 사이로 만남의 축제를 이룸과 같고, 기도하는 자세를 새로이 간추리는 것은 자신의 내면과 하늘과 생의 근본에 대한 경외심의 발로이며, 몸과 마음을 삼가 다잡는 설날이었듯이, 오늘 우리는 진정 단식과 금육의 뜻을 올바로 찾기 위해 재를 머리에 얹습니다.
그러므로 설날에 정신을 삼가 뜻을 세웠듯이, 오늘 머리에 재를 얹는 경건한 참회를 통하여, 흙에서 온 우리의 실상을 하늘에 향하도록 하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흙에서 온 몸의 욕망을 제어하여 단식을 합니다만, 그것은 몸의 단련에 앞서 정신으로 먼저 나 자신을 곧게 세우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단식이란 입으로가 아닌 몸으로 바치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율법적 명령으로서의 금육과 단식을 실천하기보다는, 오늘로 시작되는 사순절 기간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내어주기 위하여 나 자신의 정당한 몫을 조금이라도 포기하는 실천의 하나라고 깨달아야겠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 단식의 실천은 나의 것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기 위한 작은 자선행위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당한 나의 몫을 타인에게 조금씩이라도 양도하는 그것이 진정 자선이요, 그럼으로써 타인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이 참된 기도임을 깨달아서 이 사순절을 시작함은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함과 같은 것입니다. 새로운 시작, 그것이 곧 ‘회개(참회)’인 것입니다.
정리하여 말씀드리자면, 사순절에 우리는 네 가지 덕목을 특별히 과제로 삼아 실천합니다. 참회, 기도, 단식, 자선입니다. 이에 관하여 예수님께서 간결하면서도 우리 마음에 확실하게 와 닿는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인 것입니다(마태오 복음 6장중). 하느님께서 알아보시는 자선과 단식을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알아보시는 그런 자선과 단식은 세상의 눈에 띄게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과 하느님 사이에서만 평가 될 수 있는 행위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참회(회개)로써 내 마음이 달라져서 내 마음의 말을 하느님께서 알아들으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그 까닭이 나의 마음에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마음과 상통할 수 있도록 변화 되어 표출되는 내 마음의 지향이 곧 하느님께서 알아들으실 수 있는 나의 기도가 될 것입니다. 그러한 나 자신을 다잡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 머리위에 재를 얹습니다.
왜 재를 뿌리는가? 오늘의 전례는 재수없게끔 재를 뿌리는 게 아닙니다. 새해를 맞이하면 누구나 뭔가 새로운 다짐 하나라도 하듯이, 우리는 사순절을 이 봄맞이로 맞이하면서 새로운 삶을 다잡기 위해서 머리에 재를 얹고 참회와 기도를 바치며 단식과 자선의 길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재의 수요일 전례를 올리기로 합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2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가톨릭노트 > 신부 윤종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금 여기, 하늘나라! ... 산위에서의 체험으로 (0) | 2013.02.24 |
---|---|
내 그림자와 같은 마귀... 성경말씀만 잘 외우고 있어도! (0) | 2013.02.17 |
설날의 기도가 일년 내내 이루어지기를..! (0) | 2013.02.10 |
괴로움은 가까운 사람에게서 온다 (0) | 2013.02.03 |
우리 가운데 늘 일어나는 일 (0) | 2013.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