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4주일, 2013년 2월 3일 오전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괴로움은 가까운 사람에게서 온다
사랑은 곧 십자가이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봉독한 루카복음서 4장의 내용을 오늘 이어서 읽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인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시며 복음 선포를 하시던 날에 일어난 사건의 보도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고향에 가신 일을 마르코나 마태오 복음서는 그분의 활동기 중간에다 기록하였습니다만(마르 6, 1-6 ; 마태 13, 53-58 참조), 루카복음서는 그분의 활동 초기(개시기)의 사건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루카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활동계획을 고향에서 발표하심으로써 그분의 사명수행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의 활동개시로 이사야에 예언된 구원(해방)이 이루어진다고 예수님께서 당신 고향에서 직접 천명하셨던 것입니다. “이 성경말씀(이사야 58, 6의 구원선포)이 오늘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 21)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당신의 활동계획을 고향에서 발표하심으로써 당신의 사명수행을 시작하시는데, 그분의 계획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은 억압받는 사람들,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오신 예수님의 계획인 것입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노래’(루카 1, 46-55)로 제시된 루카복음서의 주제로써 예수님 활동의 목표인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루카복음서에 끝까지 소개되는 예수님의 행적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들도 그러한 관점으로 이해되어야 할 내용의 것들입니다.
이것은 오늘 읽는 복음의 대목에서도 역설적으로 예수님께서 왜 나자렛 사람들에게는 기적을 행하실 수 없으셨나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예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가 도와준 사람이란 소외되었던 이방인 과부였습니다(1열왕 18, 7-16 참조). 엘리사가 도와준 사람도 이방인이자 철저히 따돌림 당한 나병환자였습니다(2열왕 5, 1-14 참조).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베풀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총이란 그것을 베푸시려고 오신 분을 받아들여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예언을 읽으시고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 21)라고 하신 말씀을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제가 지난주일 강론에 라틴어 번역문을 가지고 부언한 바와 같이 “이 성경말씀은 오늘 너희들의 귀 안에서 이루어졌다(Quia hodie impleta est haec scriptura in auribus vestris)”라는 뜻을 다시 되새겨야겠습니다. “귀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것이 옛날이야기도 아니고 앞날의 이야기도 아니고, 이 말을 듣고 있는 지금 당장 여기서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언을 우리 자신 안에서 성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성취란 우리 자신의 몸에 직접 받아들임에서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어떠한 모습을 보였습니까? 예수님께서 당신 고향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셨을 때 그들에게서 그분이 얻으신 것은 비신앙적 반응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선입관 때문에 예수님과의 인격적 신뢰관계마저 저버림은 물론이려니와 하느님의 뜻도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앙을 조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을 개탄하시는 그분은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 24) 당신이 당하시는 배척을 비감하게 토로하신 말씀입니다. 사실, 성경상의 예언자들과 예수님,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은 어두운 세상에 하느님 말씀을 전하느라고 고통을 당하는 처지가 될 수밖에 없음을 그분께서 적시하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은 그 시작부터 그렇게 배척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고 묶인 사람들 억눌린 사람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선언하는 삶은 그 모습 자체가 도전을 받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그러한 배척당하시는 실정에서 오히려 그분의 그 구세주로서의 소명이 역설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그분께서 당신께서 선포하시는 구원이란 오히려 그걸 반대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4, 21 참조).
‘반대를 받으심으로써 오히려 드러나는 진실’입니다. 그것은 센바람에 너울이 벗겨지는 격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역풍을 정면으로 맞닥뜨림으로써 당신의 성취하시고자 하는 일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곧 십자가의 길입니다. 역설적인 구원의 길인 것입니다. 즉, ‘죽음으로써 참 삶의 길을 가는 것’ 그것이 십자가의 역설적 상황입니다. 그분께서 제시하시는 십자가의 정의는 결국 우리 모두에게도 구원의 방향은 그렇게 세상의 역풍 속을 나아가는 쪽에 있음을 교시하신 것입니다. 나와 가장 가까이 지내는 사람, 일상적으로 사랑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 잘 아는 사이의 사람, 더구나 나의 덕을 입은 사람이 나를 배척하는 상황에서 내가 사랑과 희생을 단념하지 않는 그 길이 곧 십자가의 길입니다. 나에게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될 사람들이 나에게 그렇게 하다니! 배신 당한 심정에서 십자가가 과연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런 심정을 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원수가 나를 모욕했다면 참아주었을 것을!
나를 미워하는 자가 맞서 왔다면 비켜나 숨었을 것을!
그러나 너였도다! 내 동배, 내 동무, 내 친구!
정다웁게 서로 같이 사귀던 너,
축제의 모임에서 주님의 집을 함께 거닐던 너였도다!”(시편 54, 13∼15)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멀리 있는 게 아닙니다. 가까이 아주 가까이 내 몸과 붙어있다시피 나와 함께 숨을 쉬는 사이에서 괴로움을 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의 모양은 나무토막으로 내 어깨에 메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형제, 내 식구, 정다운 내 친구, 나와 함께 매일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십자가는 나를 짓누릅니다.
그렇지요! 나와 별 관계도 없는 사람은 나에게 괴로움을 주는 사이가 아닙니다. 나와 아는 사이가 아니면 나의 마음을 상해줄 까닭이 없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나를 미워하진 않습니다. 나와 잘 알고 지내는 사람일수록 나의 걸림돌 노릇을 합니다.
그렇듯이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잘 안다는 나자렛 고향 사람들이 그분을 배척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귀에 담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동네 골목에서 예수님과 얼굴을 매일 마주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잘 아는 예수님의 얼굴에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루카 4, 22)이라는 것만 알아챌 뿐입니다. 그 고향사람들은 자기들 귀는 막고 눈만 삐딱하게 뜨고 예수님을 쳐다봅니다. “제까짓 게 뭐라고…”하면서 예수님의 마음은 보지 않고 가난한 목수 집 아들의 겉모습만 알아본 것입니다. 한 사람의 속에서 흘러나오는 인품이 아니라 그 사람의 처지(지위)만을 따져보는 세태가 이런 것이지요.
제가 얼마 전에 교회의 행사에 참석했다가 사회적으로 꽤 잘 나가는 직위에 계신 한 교우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상당히 오래 전에 도시 본당에서 있을 때 알게 된 분인데, 저보고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시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만수리 공소에 있다고 했더니, 그분께서는 잠시 말을 못하시는 듯 머뭇거리다가 매우 안타까운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면서 “아니, 어찌 그리 됐어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주교님께서 그리로 보내시던가요?” 하고 덧붙여 묻는 거예요. 그래서 “그럼요.”하고 대답했더니 “아, 그래요? 무슨 일로…, 참, 참…”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그 옆자리의 다른 분들에게 시선을 옮겨 자기의 근황에 대한 장광설로 요란스레 대화를 하면서 저를 힐끗힐끗 보다가 그 다른 분들과 어울려 자리를 뜨기에 제가 인사하려고 다가가도 못 본 척 가버리시더군요.
옛적 만날 때에는 그리도 저와 절친한 것처럼 하던 분이었는데 그날은 그러시더군요. 그 행사 후 돌아오는 길에 그분의 그날 저를 대하던 태도가 왜 그랬을까 하는 저의 씁쓸한 기분은 저의 자격지심이었을까요? “공소에 있다고 무시당한 건가… 주교님께서 공소로 보내셨느냐고 묻고는 갸우뚱하던 그분의 태도란, 아마 나에게 무슨 잘 못 된 사연이 있는 듯 판단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인심이란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누구든 자신의 생각으로 타인을 바라보거든요. 타인을 자신의 눈에 뵈는 잣대로 보는 것입니다. 귀의 착각도 있지만 눈의 착각은 더욱 심한 것 같습니다. 귀는 보이지 않는 것을 감지하기도 하지만, 눈은 보이지 않는 것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농아장애인은 수화로 대화하며 눈으로 말을 알아듣고 있는데, 정상인은 눈으로 보면서 타인을 다반사로 곡해합니다. 이럴 때 농아장애인은 들리지 않는 귀로 타인의 말을 알아듣지만, 정상인은 눈귀가 다 열려있으면서도 보는 것과 듣는 것을 따로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정상인이 장애인보다 더 장애자 노릇을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나자렛 동향인들은 그런 정상인 장애자들이었던 것입니다.
배반과 배척은 그처럼 정상인 장애자가 저지르는 짓입니다. 그런 정상인들의 장애에서 해방되는 것이 인간의 구원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설파하셨습니다. 그러한 구원의 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배반과 배척을 당하면서도 사랑과 희생을 단념하지 않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배반을 희생으로 상쇄시키고 배척을 사랑으로 갚아주러 가는 길이 그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런 십자가는 모순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희생이라는 횡선(橫線)과 사랑이라는 종선(縱線)을 엮어서 천을 짜듯 우리네 삶을 형성하는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횡선과 종선이 서로 부딪쳐야 하는 십자가는 모순형상이듯이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 익숙해진 세상살이의 원리로써는 읽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순적 십자가의 원리를 읽을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할수록 희생해야 하는 모순이 그러한 십자가의 원리라는 것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오늘 바오로 사도는 그 유명한 코린토 1서 13장 ‘사랑의 찬가’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 말씀 중에서 13장 7절의 말씀은 그 백미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노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이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그런 행위가 아닙니다. 배신도 덮어 원수를 삼지 않고 배척의 땅에도 신뢰(믿음)의 씨를 심으며 갈등의 가시밭에서도 화해를 청(소망)하면서 끝까지 견디는 희생의 길로써 용서의 마당에 이르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그래서 끝없는 숙제를 안고 걷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즉 끊임없이 짊어지고 가는 짐인 것입니다. 그 짐이 곧 사랑입니다. 그래서 늘 가까운 사람에게서 오는 괴로운 짐으로 말미암아 진실한 사랑은 증명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막의 길을 가다가 짐을 짊어지고 힘겹게 걷고 있는 낙타를 만나 물어보았습니다. “얘 낙타야, 오르막길과 내리막길 중 어느 쪽이 낫니?” 그러자 낙타가 대답했습니다. “오르막길이냐 내리막길이냐가 문제가 아니죠. 중요한 건 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할 일이 우리의 숙제는 아닙니다. 끊임없이 짊어지고 가는 낙타의 짐과 같이 우리가 풀어가야 할 사랑의 숙제는 쉬운 길, 덜 어려운 길, 재미스런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짐은 어느 낯모르는 사람보다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나에게 부과시키는 짐입니다. 그것도 나를 참기 어렵게 만드는 짐으로 나의 가까운 사람들이 나를 난처하게 하는 그런 사랑의 시험으로 괴롭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고 결국 모함을 받아 사형을 당해야 했습니다.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예수님 말씀은 당신에 대한 세상의 증오를 마지막 십자가의 길에서 결정적으로 대결하실 것을 미리 예견하신 말씀입니다. 그러한 대결의 길을 가야하는 소명은 오늘 제1독서의 예레미야서 말씀대로 스스로 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뽑아 세워 그렇게 하도록 정해주신 것이고(예레 1, 5 참조),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 소명의 길에서 역풍에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세워 주시고 옆에서 도와주실 것입니다(예레 1, 19 참조).
모든 거슬림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으려면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위기를 정면으로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2독서 코린토 1서 13장에서 바오로 사도가 천명하시듯,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1코린 13, 7), 사랑은 “으뜸(위대한 것)”(1코린 13, 13 참조)인 까닭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미움과 배신과 저주 가운데서도 순교자적 자세로 몸 바쳐 모든 것을 사랑하고, 그리고 오로지 사랑 때문에 죄를 뒤집어쓰게 된 그에게는 그로써 하고자 하는 것 한 가지만 남습니다. 그것은 용서입니다. 그 용서라는 것은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의 승리하는 마지막 태도입니다.
루카복음서는 오늘 고향에서 배척받으시고 죽임 당할 위기까지 당하셨던 예수님께서 결국 당신 동족들로부터 고발되어 십자가상의 죽음을 당하시며 마지막까지 용서로 일관하셨던 그분의 사랑의 승리를 우리에게 전합니다.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운명하시면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 34) 하고 기도하셨다고 그분의 최후시간에 대하여 특징적으로 전하는 루카복음서입니다. 그렇듯이 그리스도와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은 그런 사랑의 승리로 마쳐져야 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반대 받는 표적이자 수치스러운 것이 십자가이면서 또한 사랑의 도구이며 영광을 드러내는 승리의 표징이 십자가인 까닭이기에…, 그래서 그렇습니다. 그러한 사랑의 승리를 향하여 끝까지 나아가는 우리의 삶을 다짐하는 우리의 믿음을 주님 앞에 고백합시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0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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