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성야, 2013년 3월 30일 오호 7시
만수리 공소에서 도보순례자들과 함께, 윤종관 신부
우리의 부활 DNA를 일깨워서...
빈 무덤에서 출발합시다!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여러분께 축하를 드린다는 저의 이 인사말이 빗나간 말이 아닌가 하고 의아해 하실 분이 계시지 않을까요? “예수님 부활을 두고 우리에게 무슨 부활 축하람?” 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축하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드림이 당연하지요! 그래서 우리 모두 예수님을 향하여 축하인사를 환호로 드립시다. “예수님! 축하합니다! 부활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돌아가실 때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어요? 그런데 부활하셨군요! 용하시네요! 잘 된 일이네요! 부활하신 예수님, 축하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 축하드리면 되는 걸, 왜 제가 교우 분들께 부활을 축하드린다고 인사할까요? 그래서 혹시라도 어느 교우 분께서 이 축하를 받고 쑥스러워 하실 지도 모르겠군요. 제가 놀리는 줄 아실는지요? 또는 기분이 나빠지신 분도 계실는지요? “아니, 내가 언제 죽었었단 말인가?” 하면서 말입니다. 또는 “아니, 비아냥거리는 거 아냐?” 하고 기분 나쁘게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는지요?
전에 제가 있던 어떤 본당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할머니께서 편찮으시다기에 ‘병자성사’ 받으시라고 여쭈었더니 매우 기분 나빠해 하시더라고요. “아니, 내가 죽을 병 걸린 줄 아시오? 나 빨리 죽길 바라는가 보군!” 하시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교우 분들께 재차 강조하여 인사드립니다. 교우 여러분,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더욱 노골적으로 인사를 드립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교우 여러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이 축제는 예수님의 부활 축제입니다만, 동시에 교우님들 모두의 부활 축제입니다. 여러분 모두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오늘의 부활을 마지하려고 여러분께서는 죽을 고생을 하셨습니다. 아니, 여러분 모두는 죽었다가 살아나셨습니다.
죽으신 일 없다고요? 여러분은 죽으셨다가 다시 사시게 된 분들입니다. 어찌 그러냐고요? 그 까닭을 말씀드립니다. 세례를 받으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세례란 예수님과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오로 사도는 콜로새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세례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되살아났습니다.”(콜로 2, 12)하고 말입니다. 이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따라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죽고 부활한 사람으로 자아인식을 해야겠습니다. 그런데 선뜻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나 자신과 어찌 그렇게 실존적 관계를 갖는가 저는 이해가 가지 않던 중에 감명 깊은 책을 읽고 힌트를 얻었습니다.
티베트의 영적 지도자이며 불교를 세계적으로 대표하는 지도자 달라이 라마를 영국의 저명한 가톨릭 신학자들이자 베네딕토회 수도사제들이 초청하여 런던의 한 대학에서 사흘 동안 세미나를 개최했던 강연집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 강연집은 ‘달라이 라마, 예수를 말하다’라는 책입니다. 불교 지도자의 지혜로 성경의 복음서를 강의한 내용을 세미나 기록형식으로 수록한 책입니다.
그 불교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죽음과 환생은 동시적 실존 양상’이라는 식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환생을 믿는 사람에게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곧 환생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환생은 죽음 다음에야 올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달라이 라마의 말을 듣고 거기 세미나를 함께 하던 가톨릭의 수도사제 로렌스 신부가 한 마디 했습니다. “부활(復活)은 환생(還生)이 아닙니다.”라고요.
가톨릭 사제의 그 이의제기에 대하여 달라이 라마는 대답했습니다. “물론 저는 윤회(輪廻)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자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영적으로 성장을 해나가면, 그의 육체까지도 더욱 더 미묘해집니다.” 달라이 라마는 이어서 예수님의 부활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의 예수님의 몸은 육체적인 몸입니다. 부활은 했지만 아직 하느님 아버지께로 승천하지 않은 몸은 미묘한 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께로 올라간 후의 몸은 영적인 몸입니다.”
달라이 라마의 이러한 설명은 불교적 표현입니다만, 저는 우리가 예수님께서 가신 죽음과 부활의 길을 따라가는 데 있어서 좋은 힌트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부활은 ‘미묘한 몸’이 되는 것이고 승천은 ‘영적인 몸’이 되는 것이라는 표현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직 이 세상에 머물면서도 부활한 몸이 될 수 있다는 힌트가 그것입니다. 이점에 관하여 달라이 라마의 불교적 설명으로는 사람마다 영적인 진화의 단계가 있어서 아주 평범한 상태에서부터 출발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상태로 옮겨간다고 합니다만, 이러한 관점에 따라 우리의 육체적 몸은 영적인 단련을 통하여 달라지는 변화를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는 실제로 사람마다 풍기는 외양의 차이점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어떤 한 사람은 외양에서 그 마음과 삶의 상태가 험악함을 드러내기도 합니다만, 또 다른 한 사람은 그 외양에서 기품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그런 차이점은 그가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말해줍니다. 그렇듯이 어느 한 사람이 예전 같지 않게 외양이 달라진 경우를 볼 수도 있습니다. 보기만 해도 대하기 싫던 사람의 모습이 어찌 된 영문인지 경건하고 평화로운 모습이라서 가까이 하고 싶은 모습으로 변화된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는 그간에 마음의 단련과 삶의 개선을 이룬 사람임이 확실합니다. 같은 육체일지라도 사람마다 풍기는 것이 다른 한편, 한 사람의 몸일지라도 예전 같지 않게 달라진 그 기품은 미묘한 변신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말을 하는 저 자신은 그 ‘달라진 기품의 미묘한 변신을 이루지 못하고 있어 저의 입이 부끄럽습니다만, 그렇듯이 달라진 몸의 미묘함으로 살아생전 부활의 징후를 엿보일 수 있도록 부단히 저 자신을 채찍질하고 닦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변신이 곧 부활은 아니겠습니다만, 우리의 몸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몸의 그러한 달라짐이란 마치 투박한 돌을 갈고 닦아 아름다운 조각품을 만들 듯이 사람이 자신을 단련하여 그 모습을 변화시킨 것을 뜻합니다. 일면 다른 사람으로 재탄생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곧 부활의 길인 것입니다. 그러한 부활의 길로써 하늘(영의 세계)에 이를 경우를 우리는 영적인 몸으로의 변화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몸의 변화란 달라이 라마에게 있어서는 불교적으로 ‘윤회’의 개념에 해당된 표현이겠습니다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부활’이어야 합니다. ‘부활’은 ‘윤회’가 아닙니다. ‘윤회’란 ‘되돌아감’이라 할 것입니다만, 우리에게 있어서 ‘부활’이란 본래적으로 ‘파스카’ 즉 ‘건너감-지나감’이듯이 말입니다. ‘윤회’는 일종의 ‘반복’일 수 있습니다만, ‘부활’은 일회적으로 ‘지나감’인 것입니다. 그 ‘지나감’을 우리는 ‘파스카’라 합니다. 그러한 ‘지나감’은 그래서 ‘빈 무덤’에서 그 결정적 체험을 합니다. 한 생을 확실히 마감함으로써 전혀 다른 생으로 가는 것을 우리는 예수님의 빈 무덤에서 봅니다. ‘빈 무덤’이란 나의 모든 것이 통째로 없어진 상태를 뜻합니다.
모든 것이 통째로 없어진 그 ‘빈 무덤’을 우리는 오늘 오후에 ‘서짓골’에 가서 체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병인년에 ‘갈매못’에서 순교하신 성인들의 육신이 진토 되어 그분들에 관한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지요. 147년 전의 사연에 대해서 ‘서짓골’에서 보여주는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분명한 것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블뤼 주교님 등 네 분의 순교자가 죽어 없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무심한 세월이 1세기 반이나 흘렀지만 더욱 한심한 것은, 그분들의 육체가 없어진 그것만큼, 신앙의 후예들인 우리들까지 그 분들에 대하여 철저한 망각 속에 파묻혀온 사실이 무서우리만큼 부끄러운 현실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분들이 고백하고 죽은 동일한 신앙이 오늘 우리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분들의 신앙이 오늘의 우리에게 살아있다는 것은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놀라운 것입니다. 죽어 없어진 그분들이 고백했던 신앙이 곧 오늘 우리들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신앙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은 한 번 죽었지만 신앙은 죽지 않고 오늘 살아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들처럼 우리도 죽겠지만 우리의 신앙은 죽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기막힌 신앙의 역설적 생명력입니까? 그래서 신앙은 죽음을 건너가는 것입니다. 신앙은 죽음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죽음을 뛰어넘는 신앙을 지니고 살아가는 우리이기에 우리는 한번 사는 이 세상에 대한 미련도 두려움도 없이 우리의 길을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이기에 바오로 사도의 말마따나 세례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되살아난 새로운 삶을 쟁취한 것입니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그걸 생각조차 하기 싫어하는 게 사람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세례 받은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라 죽음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 죽음의 길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금껏 살아왔던 것을 통째로 없애버리고 전혀 다른 상태로 건너가는 길인 것입니다. 전혀 다른 삶으로 송두리째 변하는 것입니다. 그런 변함의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부단히 나 자신을 갈아치우기를 반복하면서 사순절을 지나왔고 오늘 빈 무덤에서처럼 지난 것에서 건져날 것은 아무 것도 없이 새로운 세계로 향한 발걸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의 삶, 그것이 부활입니다. 적어도 지난 사순절 동안 무엇인가 나 자신에게서 바뀐 것을 발견할 수 있다면 오늘 우리는 부활의 단계에 들어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오후에 순교성인들의 주검을 비장한 경로로 봉송한 옛적 사연의 길을 걸으면서 자신들 내면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쳐 끓어오르는 새로운 기운을 체험했습니다. 그것은 어설프게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살자는 각오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각오는 사실상 세례로써 이미 체질화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것입니다. 세상에서 죽음을 건너갈 체질로 우리는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일컬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부활DNA’ 라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오늘 우후의 도보 순례로 도착한 ‘서짓골’에서 1세기 반전에 이미 진토 된 순교성인들 안장지의 나뭇가지들이 스산한 바람소리로 우리 가슴속에 그 ‘부활DNA’를 일깨워주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일깨움의 감흥으로 우리는 이 부활성야에 우리의 세례 갱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갱신의 발걸음으로 새 삶의 새벽을 향하여 나아갑시다. 부활하신 그분의 빈 무덤 앞에서 그렇게 출발합시다! 알렐루야!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9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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