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4주일 · 성소주일
2015. 4. 26. 09:00 · 하부내포성지 만수리 공소
“내 목숨 내 스스로 바칩니다.”
茶山 정약용 선생의 말씀을 새기면서
착한 목자주일이었던 이유
오늘 부활 제4주일은 ‘성소주일’이라 일컬어지는 날입니다. 그러나 ‘성소주일’이라 불리어지기 전에 본래 ‘착한목자주일’이라는 별칭으로 불려지던 날입니다. 이 부활 제4주일에는 ‘참 목자’이시자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에 관한 요한복음서 10장의 말씀을 봉독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서 10장에는 그 제목이 그렇듯이, 예수님께서 목자와 양에 대한 비유를 들어가며 당신 자신을 ‘참 목자’이며 ‘착한 목자’로 자칭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요한복음서 10장의 예수님 말씀을 목자의 음성으로 알아듣고, 목자를 따르는 양들의 입장에서 그분의 부르심을 깨닫기를 다짐하는 뜻에서, 이 ‘착한목자주일’을 ‘성소주일’이라 일컫기도 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곧 聖召에 응답할 줄 아는 양이 되기를 다짐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착한목자주일’이자 ‘성소주일’의 주제로 제시되는 요한복음서 10장 중에서 오늘은 11∼18절을 봉독합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가장 큰 감동 주는 17~18절
오늘 봉독하는 말씀은 이 요한복음서 10장 가운데 가장 큰 감동을 느끼게 하여주는 말씀입니다. 그 가장 큰 감동을 주는 말씀은 특별히 17∼18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양들을 위하여 당신 스스로 목숨을 바친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요한 10, 18)
내 목숨 내 스스로 바칩니다
저는 오늘 읽는 이 요한복음서 10장 18절의 예수님 말씀을 읽을 때마다 저의 사제 생활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다짐을 거듭하게 됩니다. 저는 사제 성품을 받을 때 바로 이 요한복음서 10장 18절의 말씀을 저의 사제 생활 좌우명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 ‘성소주일’에 3년 주기로 이 말씀을 읽는 날이 되면 특별히 사제 수품 당시의 마음을 되새기곤 합니다. 제가 사제 수품에 임하면서 교우들에게 인사로 나누어 드린 상본에 새긴 성경 말씀을 이 요한복음서 10장 18절 가운데서 짤막하게 다섯 마디로 선택하였었습니다. 그 말씀은 간단하게 이러했습니다. : “내 목숨 내 스스로 바칩니다.”
이 말씀은 제가 사제 수품을 몇 달 앞두고 지내던 그 해 봄 ‘성소주일’에 저에게 분명한 마음 결정을 하라는 주님의 명령으로 들려온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삶 전체를 함축적으로 강렬하게 표현한 예수님 당신 자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삶이란 하느님이신 아버지의 뜻을 전적으로 따르는 삶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적으로 따르는 분이시기 때문에 또한 당신의 양들에게도 당신을 따르라고 분명히 말씀하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마지못해 사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로 나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끌려가는 길이 아니다
그 나아가는 삶의 길이란 끌려가는 길이 아니지요. 귀에 들리는 부름을 따르는 것이 몸이라 하더라도 마음이 없이 따른다면 그것은 끌려가는 몸일 것입니다만, 마음이 따르는 몸일 때 그것은 끌려감이 아니라 스스로 나아가는 따름인 것입니다. 스스로 나아가는 삶, 그 삶이야말로 참다운 가치를 지닌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름에 있어서 스스로 하는 따름이어야 합니다.
스스로 하는 따름이어야 생명적 관계가 이루어진다
그러한 ‘스스로의 따름’, 거기에 생명적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노예처럼 끌려 다니는 것을 어찌 삶이라 하겠습니까? 그렇듯이 마음에 없는 삶을 산다면 그것을 어찌 삶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래서 사제가 되어야 할 것인가 하고 결단의 물음을 저 자신의 마음속에 던져야 하는 마지막 계단 위로 제 몸을 던지는 시점에 이르면서 요한복음서 10장 18절의 말씀이 저의 몸속에 강렬한 전류처럼 꽂히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 말씀은 저의 한 몸을 단번에 날려버릴 것만 같은 초강도의 전압(電壓)으로 내려치는 하느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부르심에 신실한 응답을 드리지 않을 수 없는 강렬한 요청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피할 수 없는 저 자신의 서있는 자리가 운명으로써가 아니라 저의 발을 스스로 내딛어야 할 분명한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것임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삶을 전적으로 던지는 응답이어야
부르심이란 거역할 수 없는 것이로되, 그것은 삶을 전적으로 던지는 응답으로써 스스로의 결단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그래서 사는 길이 오로지 그것뿐이라는 깨달음이지요. 확실하게 모두를 바쳐야 할 깨달음인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부르시는 분과 응답하는 사람 사이의 생명적 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너와 나 사이가 백 퍼센트 이렇게 확실하지 않으면 함께 사는 것이 아니다” 하는 다짐으로써 생명적 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말씀 속에서 ‘착한목자’의 진면목을 확실히 알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 11) 이렇게 말씀하시는 바로 그 ‘착한 목자’이신 그분은 또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 14∼15).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요한 10, 17). 이러한 말씀 속에서 ‘착한목자’란 누구인가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자기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스스로 바치는 분입니다. 스스로 목숨 바치는 것을 자기 권리라고 하시는 분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얻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와의 확실한 관계(아는 사이)를, 그리고 당신과 자기 양들과의 확실한 관계(아는 사이)를 맺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과 그분과의 그리고 그분과 자기 양들 즉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분이 담보로 삼으신 것이 당신 자신의 목숨이었습니다.
확실하고 진실한 관계란 목숨을 매체로 한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대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확실하고 진실한 관계란 생명 즉 목숨을 매체로 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사람들 사이에 관계를 맺는 것은 이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이해타산을 매개로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관계 속에는 “내가 너를 필요로 한다.”는 타산적(打算的) 속셈이 그 바탕으로 깔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는 반대로 “네가 나를 필요로 하고 있구나.” 하는 경우에는 이 세상 어느 누구든 관계를 허물어버릴 태세로 기울게 됩니다. 왜냐면, 손해 보는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필요로 한다.”는 관계 설정은 언제라도 허물어질 수 있는 위험천만의 얼음판과 같습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온기(溫氣)를 요구하는 찰나에는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가는 얼음 조각 같은 인간관계, 그것은 사실 이용 가치로 맞선 사이에 언제라도 무너져버릴 부실교량과 같은 것이지요.
이러한 인간들의 사이에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십니다. 그것은 “내 목숨을 내 스스로 바치는” 받침목을 놓아 당신과 우리 사이의 다리(관계)를 이어주시는 그분의 새로운 방식의 관계 설정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당신과 아버지 하느님 사이에서 이미 그러하신 관계로써 또한 우리들과의 사이에서 실현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 실현의 결정적 단계가 스스로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정적 단계를 그분은 자기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으로 이루셨습니다.
나 자신을 내던져야
이러한 그분의 부르심을 받아들이는 자세로 사제 수품의 제단에 오른다는 것은, 저에게 있어서 “내 목숨 내 스스로 바칩니다.” 하는 서약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불가한 것이라는, 어쩌면 무서운 깨달음이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나 살기 위해, 즉 나의 필요에 의하여 사제직을 택하는 것이어서는 아니 된다는 깨달음을 촉구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참으로 무서운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스스로 바치는 삶이 아니고서 어찌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겠는가 하는 깨우침의 요구였던 것입니다. 나 자신을 내 던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착한목자주일’ 즉 ‘성소주일’에 주님과 주님의 백성 즉 그분의 양들인 교우님들 사이에 서서 강론을 하는 제가 저 자신의 삶을 주님과 교우님들 앞에 몽땅 바치는 삶이 아니고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 자신의 마음이 자신의 영달을 향하여 놓여 있다면 제가 여기서 하는 모든 말은 다 거짓이요, 저의 삶은 위선일 뿐일 것입니다. 저는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어서는 하느님 대전에 그리고 교우님들 앞에 서있을 수 없는 몸입니다.
육체적 한계와 정신적 나약성
그러나 솔직히 말씀드려 저 자신 그 동안의 지나온 삶 가운데, 때로는 고치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때로는 인간으로서의 육체적 한계와 정신적 나약성 때문에, 그리고 때로는 인간적 정리(情理)와 세속적 영리(營利)를 적극적으로 거스르지 못하고 용기를 잃어 주님과 주님의 백성인 교우들께 실망을 드린 과오가 부지기수임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부끄럽기 그지없는 지나온 과거를 되짚어 보는 오늘 저는 사제 수품 당시의 초심(初心)으로 돌아가는 다짐을 새롭게 합니다. 그 초심으로 돌아감은 다름 아니라 “내 목숨 내 스스로 바칩니다.” 하는 좌우명을 다시 다지는 것입니다.
그 초심을 잃지 않는 일, 그 좌우명을 다지고 또 다지며 나머지 삶의 길을 가야겠습니다. 저로 하여금 그렇게 살아가도록 교우님들께서는 도와 주셔야 하겠습니다.
교우남들께서 도와주시는 방법은 그러면 어떤 것이겠습니까? 기도해주시는 일, 그리고 저의 초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협조하여 주시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우님들께서 기도하여 주실 내용은 무엇이며 그 협조하여 주실 일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과 저와의 사이에서, 그리고 저와 교우님들과의 사이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을 간구하는 것이 그 기도 내용이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루어져야 할 일은 이 세상의 방식대로 될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되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추구하셨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안다.”(요한 10, 15) 라고 말씀하시며 사셨던 분입니다. 그렇듯이 저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저를 다 아시는 그만큼 저의 삶이 교우님들 앞에서도 투명할 수 있도록 지켜주시는 기도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우님들께서 저에게 협조하실 일이 무엇인지는 쉽게 아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통하는 삶의 방식을 저에게 요구하시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교우님들께서 선의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은 저도 잘 압니다. 예를 들어서, 사제의 영명 축일에 금전을 거두어 주는 일이 있습니다(이 예를 드는 것은 교우들의 선의를 비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금전선물은 저의 양심을 괴롭히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삯꾼’의 예를 드신 내용에 따라 저의 마음이 더욱 괴로워지게 됩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
茶山 정약용 선생께서 ‘목민심서’에 쓰신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 “吏以民爲田(이이민위전)<관리는 백성을 밭으로 삼고>, 民以土爲田(민이토위전)<백성은 땅을 밭으로 삼는다>”. 다산 선생의 이 말씀은, 관리들이 먹을 것을 백성에게서 얻지만 백성은 땅을 파서 먹을 것을 얻는다는 것을 공직자들이 명심하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인데, 이 말씀 속에는 “백성을 위해서 수고 하면 백성이 먹여 줄 것인데, 그 먹여주는 것 말고 다른 것을 더 차지하면 그것은 부정한 것이다” 하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이 말씀을 교회 사람들에게 바꾸어 말한다면, 성직자는 교회가 먹여주는 대로 지내야 하는 것이지 그 이상의 것을 차지하지 말아야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제는 교회를 위하여 몸 바치는 것으로 그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다짐을 실제로 살아감으로써 혹시 신자들이 세속에 휩싸이는 것을 볼 때 사제는 단호하게 신자들에게 깨우침의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자님들께서는 교회의 사제들이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협조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교우들께서도 복음과 교회의 가르침이 세상살이에 부담을 주는 것이라 할지라도 기쁘게 감수하는 모습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증거 하는 복음적 삶이 힘을 얻을 것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 성직자들의 삶이 무위로 돌아가는 슬픔을 얻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교우께서 저에게 “신부님, 신부님 말씀대로 하면 사회생활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할 때 성직자로서 슬프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성직자의 용기를 꺾는 말입니다. 적어도 성직자가 비이성적인 고집을 부리지 않는 한에서는 세속의 시각과는 다른 눈으로 삶의 길을 가야 한다고 신자들께서는 말씀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바보같은 말씀을 하시는 이유
이러한 저의 말이 교우님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드리는 것입니까? 저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착한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의 생각대로라면 목자가 양들을 키우는 목적이 자기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데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데 양들을 위해서 목자가 대신 죽는다는 것이란 세상에 바보 같은 짓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다고 말입니다. 이렇듯 바보 같은 말씀을 그분께서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이유를 그분은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요한 10, 18) 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의향을 따르기 위해서 바보 같은 말씀을 하시고 그래서 목숨 바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양과 같은 자세로 삶의 길을 가셨고,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그것을 당신의 양들에게 말씀하여 따르라고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착한목자이신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당신이 이끌어야할 양들을 본래 하느님의 양들로 보시기 때문에, 당신의 목숨을 스스로 바치면서까지 그 양들을 위하여 투신하시는 분이시기에, 그분은 ‘착한목자’이십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말씀을 알아듣고 따라가는 양들로서 저와 교우 여러분 모두는 함께 가야 한다고 저 자신도 교우들을 위하여 투신하는 삶의 방식으로 호소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말씀을 따라야 하는 양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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