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5주일
2015. 5. 3. 09:00 하부내포성지 만수리 공소
한 생명이 되는 일
죽고 살기를 함께 하는 일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생명적 관계
우리는 지난주일(부활 제4주일) 즉 ‘착한 목자 주일’에 예수님께서 당신과 우리 사이를 생명적 관계의 사이로 설정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서 10장에서 목자와 양에 대한 비유를 들어가며 당신 자신을 ‘참 목자’이며 ‘착한 목자’로 자칭하시고 당신 자신의 목숨을 우리를 위해 스스로 바치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당신의 생명을 전적으로 우리들 속에 심으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당신과 우리 사이의 그러한 생명적 관계를 오늘의 요한복음서 15장 1∼8절에서 포도나무와 그 가지들의 관계로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생명적 관계란 한 나무의 줄기와 그 가지들의 관계와 같은 것이기에 예수님께선 오늘의 그 말씀을 하십니다.
가지를 무참하게 잘라내는 이유
저는 성당이나 성지를 관리하면서 나무 심는 일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제가 나무들을 심으면 혹 교우들 가운데 그 나무들의 가지를 무참하게 잘라내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리 해야만 옮겨 심은 그 나무들이 잘 살게 된다면서 말입니다. 나무를 사랑하기 때문에 가지를 쳐낸다는 뜻이지요. 제가 심은 나무의 가지들이 무참하리만치 잘려나간 것을 보면 매우 속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무를 옮기는 과정에서 잘려나간 뿌리에서부터 올라오는 수분이 부족하므로 줄기와 가지들이 말라죽을 수가 있지요. 그래서 옮겨 심은 나무들이 뿌리를 잡고 잘 성장하도록 가지를 많이 쳐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옮겨 심은 나무들의 가지들을 그대로 남겨두었다가 결국 나무를 통째로 죽게 만든 일이 많습니다. 저는 나무 사랑을 잘못 하는가 봅니다. 나무를 옮겨 심으려면 가지들에 대해서 너무 미련을 지니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쳐낼 가지는 쳐내버려야 나무 전체가 살고 결국 좋은 성과를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즉 나무줄기와 그 가지들은 죽고 사는 것을 함께 하는 생명적 관계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옮겨심은 나무는 새로운 나무이다
그렇듯이 오늘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와 그 가지들’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쳐내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깨끗이 손질해준다는 예수님의 말씀(요한 15, 1∼2 참조)은 따지고 보면 옮겨 심은 나무일 것입니다. 그 ‘옮겨 심은 나무’란 상징적으로 ‘새로운 나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새로운 나무라는 뜻으로 예수님 당신 자신을 일컬어 ‘참 포도나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참 포도나무가 아닌 가짜 포도나무라 할 수 있는 ‘옛 나무’라는 것이 있었겠지요. 그에 대하여 구약성경을 보면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구약에서 '포도나무'는 '백성'을 일컫는 상징적 표현
구약성경은 하느님 백성을 상징적으로 일컬어 자주 ‘포도나무’라 하고 있습니다(구약성서에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적으로 ‘포도나무’라고 표현한 것이 30번 이상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의 요한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 아버지께서 심으신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포도나무로 삼아오셨지만,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한 역사를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예 : “나는 좋은 포도나무로, 옹골찬 씨앗으로 너를 심었는데 어찌하여 너는 낯선 들포도나무로 변해버렸느냐?”<예레 2, 21>).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
그래서 이제 ‘참 포도나무’ 즉 좋은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를 하느님 아버지께서 새로 심으십니다. 예수님 당신 자신을 일컬어 곧 그 새로 심은 ‘참 포도나무’ 라고 오늘 말씀하십니다. 이 ‘참 포도나무’란 가짜 포도나무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요한 15, 1) 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당신 자신의 가지들에서 이제 진짜 좋은 포도 열매가 열려야 합니다. 그 참 포도나무의 생명으로 자라도록 “깨끗이 손질하신”(요한 15, 2) 가지들은 많은 열매를(요한 15, 8 참조) 맺을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가지들은 참 포도나무의 생명을 누려야 하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 오늘의 제2독서인 요한 사도의 첫째 편지 3장은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분(하느님)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대로,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3, 23∼24)
지켜야할 계명 '서로 사랑하라'
여기서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이란 한 마디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이 계명은 하느님께서 새로 심으신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의 ‘새 계명’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이 ‘새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 34)라는 말씀으로 확실하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계명’은 예수님께서 최후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지 않는다면 당신과 제자들 사이에 아무 상관도 없다(요한 13, 8 참조)라고 말씀하시고는 그렇게 발을 씻어주기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면서 천명하신 ‘새 계명’입니다.
사랑의 새 계명
그렇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보여주시던 사랑과 더불어 최후만찬에서 예수님께서는 오늘의 ‘포도나무와 그 가지들’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그 ‘사랑의 새 계명’을 반복해서 강조하십니다(그것은 오늘 읽은 부분의 다음에 잇달아 적혀있는 요한 15, 9∼17에서 읽을 수 있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주일의 복음으로 읽을 것입니다). 여기서 이 ‘사랑의 새 계명’에 대하여 우리는 잘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한 생명으로 사는 삶인 것입니다. 포도나무와 그 가지가 한 생명을 갖고 있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고 잘려 나가면 말라버린다는 말씀으로 우리는 예수님과 우리 사이가 한 생명의 관계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새 계명이 촉구하는 사랑이란 하나의 생명으로 사는 삶 자체인 것입니다. 죽고 살기를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한 생명이 되는 일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이 무엇인지 확실히 깨달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새 계명으로 촉구하시는 사랑이란, 베푸는 것이기 보다는 함께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이란, 누가 누구에게 주는 선물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누구누구와 한 목숨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무의 생명이 가지의 생명과 동일한 생명이듯이 그렇게 말입니다. 한 생명이 되는 일, 그것을 새로운 사랑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 위해서 이 유명한 ‘포도나무와 그 가지들’에 관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참 포도나무와 그 가지들
그런데 이 ‘포도나무와 그 가지들’에 관한 말씀을 교회의 일치를 촉구하는 해설용으로 응용하는 강론을 흔히 들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응용을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교회 공동체는 예수님을 그 중심으로 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가 된다는 것을 이 ‘포도나무와 그 가지들’에 관한 말씀으로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교회 일치의 모습을 포도나무의 그림으로 아주 적절하게 그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참 포도나무와 가지들 사이에서 그 안에 흐르는 하나의 생명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참 포도나무와 그 가지들’에 관한 말씀 가운데 반복해서 강조하시는 ‘사랑의 새 계명’이 곧 한 생명을 누리는 길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오늘 읽은 부분의 다음에 잇달아 적혀있는 요한 15, 9) 하시면서, 이 ‘포도나무와 그 가지들’에 관한 말씀의 핵심 요지를 말씀해주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우리가 다음주일에 읽을 내용은 지난주일(부활제4주일) 즉 ‘착한 목자 주일’에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의 목숨을 양들을 위해 내놓는다고 하신 말씀(요한 10, 18 참조)과도 연결 됩니다.
별개의 존재를 고집하면 생명을 잃는다
오늘의 참 포도나무에 관한 말씀에 이어지는 다음주일의 말씀은 “친구들을 위하여 제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 13)는 말씀인데, 그러한 사랑이란 목숨을 공유하는 삶을 뜻합니다. 마치 한 그루의 포도나무가 지닌 생명이란 모든 가지들이 함께 지니는 생명이듯이 말입니다. 만일에 한 가지가 별개의 존재처럼 고집한다면 본줄기로부터의 생명을 잃을 것입니다. 그렇듯이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의 생명을 공유하는 관계임을 그분께서는 오늘의 ‘참 포도나무’에 관한 말씀으로 표현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한 생명으로 붙어있어야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천명하신 ‘사랑의 새 계명’은 곧, 우리 모두가 ‘한 목숨으로 서로 사랑하기’를 뜻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스스로 내놓으셨듯이 우리 또한 서로의 삶을 하나의 생명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생명으로 살아가기란 우리 서로가 무관하게 따로 따로 자신들만의 길을 찾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그러한 한 생명의 삶은 어쩌면 현세적 생존 추구의 방식으로는 달성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현세적 생존 추구가 아닌 새로운 삶의 방식, 그것이 곧 최후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고별담화로 말씀하시는 가운데 제시하신 ‘참 포도나무와 그 가지들 간의 관계’인 것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과의 한 생명으로 붙어있고 그럼으로써 우리 가지들 끼리 또한 그 한 생명의 관계로써 이루어지는 열매가 곧 ‘서로 사랑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새 계명’으로써 그분의 제자라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될 것이고(요한 13, 35 참조), 그것이 곧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이라고 오늘 말씀하시고 계십니다(요한 15, 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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