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승천 대축일

2015. 5. 17. 11:00 하부내포성지 도앙골

 

하늘에는 경계선이 없다

 그 하늘은 우리의 눈에 담아지지 않는다.

 

주님승천대축일은 원래 부활로부터 만 40일째


오늘 사도행전이 전하는 바(사도 1, 3 참조)에 따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후에 승천하셨다는 전통적인 믿음에 의하여 본래 ‘주님 승천 대축일’은 ‘부활 대축일’로부터 만 40일째 되는 지난 목요일(부활 제6주일 주간의 목요일)입니다만, 우리 한국 교회는 교우들의 사정을 참작하여 오늘 부활 제7주일로 옮겨서 이 대축일을 지냅니다.

 

40일은 중대한 기간을 뜻한다


성경에서 40일이라는 기간은 어느 한 중대 기간을 뜻합니다. 엘리아 예언자가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40일 간을 걸어서 호렙 산으로 가서 하느님을 만났듯이(열왕 상 19장 참조), 그리고 예수님께서 40일간을 광야에서 지내시고 나서(마르 1, 13 및 공관 복음서의 그 병행 구절 참조) 본격적으로 당신이 가실 하느님 나라 선포의 길로 들어가셨듯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또한 부활 후 40일이라는 매듭을 지나 승천의 신비를 드러내신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부활과 승천은 '한가지' 신비다

 

그러나 이러한 부활 후 40일만의 승천이라는 사건 발생순서와 그 기간이 오늘 축제의 핵심 내용은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선 부활과 승천은 한 가지 신비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게 하는 그분의 빈 무덤 안에서 겁에 질려 어리둥절하고 있는 여인들에게 눈부신 옷(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나서 “어찌하여 살아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고 보도한(루카 24, 4∼6 참조) 루카복음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승천 보도에서도 그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의 전갈을 같은 맥락으로 사도행전에 보도합니다. 그 흰 옷을 입은 두 사람, 즉 부활을 전하는 그 두 천사가 사도들에게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부활을 전하는 분위기와 같은 맥락의 메시지 선포가 아니겠습니까?(사도 1, 10∼11를 루카 24, 4∼7과 비교 참조할 것)

 

40일동안 여러번 나타나셨다


그런데 “그분(예수님)께서는 수난을 받으신 뒤, 당신이 살아계신 분이심을 여러 가지 증거로 사도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면서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사도 1, 3)고 보도하는 사도행전의 40일간이라는 기간에 대한 언급은 부활 신비의 충분한 체험이 이루어져서 승천의 신비에 이른다는 의미를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부활'이라는 한 가지 신비의 숙성된 차원이 '승천'


이러한 점은 한 가지 신비에 대한 성숙된 체험, 즉 부활 신비에 대한 충분한 체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여, 부활이라는 한 가지 신비의 숙성(熟成)된 차원이 곧 승천 신비입니다. 그것은 마치 보석함의 뚜껑이 열려 거기 들어있는 보석들이 그 본래의 영롱한 빛을 햇볕에 발산하는 것과 비슷하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 부활을 세상 만물 위에 드러내신 신비가 그분의 승천인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다음과 같은 대화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신지와 주고받은 부활에 대한 문답


어떤 신자가 저에게 질문했습니다. “신부님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이 어디 계시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에게 반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그분의 몸이 우리처럼 1미터 60이나 1미터 70∼80센티미터 되는 키로 부활한 몸인 것 같습니까?” 


이러한 저의 반문에 대하여 그분은 대답했습니다. “직접 본 일이 없어서 모르겠는데요!” 제가 다시 반문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1미터 몇 십 센티의 키로 다시 살아나신 분이라면 동시에 여러 곳에 계실 수 있는 분이 되셨겠습니까?”

 

그러자 그분이 저에게 맹랑한 질문을 다시 던졌습니다. “그러면 신부님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언제라도 우리들에게 함께 계시러 오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그런 예수님을 한 번 만이라도 볼 수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분의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저는 이렇게 다시 반문했습니다. “형제님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은 도대체 그 넓이가 얼마나 됩니까? 바닷가에 가서 바라보시면 어디까지 볼 수 있습니까? 아니면 비행기를 타고 높이 올라갈수록 더 넓게 더 많이 볼 수 있겠지요? 또 더욱 인공위성을 타고 우주 공간으로 올라가면 더 멀리 더 넓은 우주를 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 비행기를 타고 오르든지 인공위성을 타고 올라가든지 더 멀리 보는 것 같겠지만 아주 작은 것까지 모두 자세히 볼 수도 있겠습니까? 멀리 많은 것을 더 넓게 본다고 하겠지만, 더 자세히 볼 수는 없겠지요?”

 

이러한 저의 반문에 대하여 그분은 더 이상 반박 질문을 하지 않고, “인간의 육체적인 눈은 그만큼 한계가 있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저는 다시 거듭해서 질문을 했습니다. “형제님이 생각하시기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그분의 몸이 어떤 크기와 어떤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셨다고 할 수 있는 사건인가요?” 이에 대하여 그 신자는 이렇게 혼잣말처럼 대답했습니다. “신부님은 예수님께서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몸으로 부활하셨다고 말하고 싶은가 보군요!”

 

부활은 시야의 경계선을 넘으신 것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들의 몸이나 세상의 다른 물체들처럼 우리 육체의 눈에만 들어오는 시야의 경계선을 넘으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다가 그분이 구름에 감싸여 보이지 않게 되자 사도들은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지요. 그때 그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마치 오래전에 히트했던 조용필의 ‘허공’이라는 가요의 노랫말에서처럼 사도들은 승천하신 예수님을 향하여 “가슴 태우며 기다리기엔 너무나도 멀어진 그대”라면서 그분과 함께 했던 날들이 “잊어야 할 그날들, 허공 속에 묻힐 그날들”이라고 노래하는 심정이었겠지요.

 

그러나 문득 그때 흰 옷의 두 천사가 나타나서 사도들에게 책망과 더불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왜 하늘을 쳐다보고 서 있느냐면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사도 1, 9∼11 참조). 이러한 사도행전의 보도 내용에 예의주시해야합니다.

 

구름은 하느님의 신적 권위를 상징한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늘보다도 더 높이 오르신 분이시기에, 세상보다도 또 우주보다도 더 크신 분이시기에 그분은 하늘 어느 곳에 떠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여기서 하늘로 오르신 예수님께서 구름에 감싸여 시야에서 사라지셨다는 사도행전의 보도(사도 1, 9 참조)는, 전에 산으로 제자들 세 사람을 데리고 올라가셔서 당신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여 주실 때의 체험과 연관되고 있습니다. 그 산에서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를 하시는 중에 그들(그 세분)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고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던 제자들이었습니다(루카 9, 28∼36 및 마르 9, 2∼10 참조). 이처럼 성경에 의하면 구름이란 하느님의 신적 권위를 상징합니다.

 

하느님 권능의 영역을 인간의 육안으로 파악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그분의 모습이 구름에 감싸여 시야에서 사라지셨다(사도 1, 9 참조)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위에 오르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하느님 권능의 영역이란 우리 인간의 육안으로 파악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하늘을 우리 육체의 눈에 다 담을 수 없듯이 말입니다.

 

승천의 신비는 부활하신 분이 전 우주를 지배하시는 분이심을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


그렇다면 앞서 소개해드린 바와 같이 제가 어느 신자와 나눈 대화의 결론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우리 육안의 한계 속에 머무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이 우주보다도 더 크신 몸이 되신 분이시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공간적인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이기보다는 우리가 보는 이 하늘 즉 우주를 채우고도 남는 무한의 하느님 권능으로 지배하시는 분이 되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후 40일만이라는 시간적 차이를 두고 승천하셨다는 것보다는, 이미 부활로써 시간과 공간의 이 세계를 초월하신 분으로서, 오늘 이 승천의 신비는 그 부활하신 분이 전 우주를 지배하시는 분이심을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우리 육안의 한계를 초월하는 하느님 권능의 구름 속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우리의 작은 영역까지 지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올라가신 그 하늘은 조용필의 ‘허공’처럼 허무로 빈 하늘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으로 꽉 찬 하늘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희망으로 가득한 그 하늘 아래 우리는 살게 되었습니다. 그 하늘은 우리가 사는 이 땅처럼 얽어매는 경계선 없이 우리의 희망을 무한대로 들어 올릴 수 있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이 우주 위에 그리고 우리 영역의 모든 곳에 속속들이 하느님 권능으로 지배하시는 분을 향하여 우리의 희망이 가득함을 신앙으로 고백하는 것이 오늘 주님 승천의 축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2독서 에페소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시듯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에페 1, 19) 깨달으면서 우리는 기도합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이 비치는 하늘나라에 지체인 우리의 희망을 두게 하소서”하고 말입니다(오늘 미사의 ‘본기도’ 참조).

 

부활하신 그 분의 권능으로 꽉 찬 하늘 아래


그렇습니다. 허공 아래, 즉 절망의 하늘 아래에서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지 이 세계의 끝에서 끝까지, 그리고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 또 우리 인간의 영역 밖에서부터 우리 영역 속속들이 까지, 또 그리고 우리가 하는 일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지 못하는 일까지 당신께서 모두 하시는 그분, 즉 부활하신 그분의 권능으로 꽉 찬 하늘아래 그분의 그 하늘을 향한 삶의 길을 우리는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

 

온 세상의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그렇다면 오늘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말하듯이 우리는 허공의 하늘을 쳐다볼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분을 볼 수 있는 날을 바라는 눈으로 이 세계와 우리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시는 그분을 맞이할 수 있도록 우리가 해야 할 일 가운데서 우리의 모든 역량을 경주해야 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곧 그렇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 15) 이러한 주님의 마지막 말씀을 우리의 모든 노력으로 실천할 때 우리와 함께 언제 어디서든지 계시는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일하실 것이며 우리가 하는 일의 참됨을 증명해 주실 것입니다(마르 16, 20 참조). 즉 오늘의 마르코복음서가 증언하듯이, 부활하신 그분의 명령을 수행할 때, 우리는 마귀의 세력을 꺾을 수 있고, 어느 누구에게든지 새로운 삶의 언어로 말을 할 수 있을 것이고, 어떠한 해악(뱀의 독)에 대해서도 화를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마르 16, 17∼18 참조).

 

하늘에는 땅문서 같은 한정된 경계선이 없다


우리의 세상처럼 나라와 나라사이 그리고 지방과 지방 사이의 경계선이나 우리네 부동산 문서의 번지에 따른 땅 넓이처럼 한정된 것이 아닌 우주 전체를 일컬어 우리는 ‘하늘’이라 일컫고 있습니다. 사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르셨다는 하늘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땅처럼 소유권을 한정한 경계선이 없습니다. 그런 경계선이 없는 하늘나라의 주권이 부활하신 예수님께 속한다는 것을 오늘 승천 신비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경계를 뛰어넘는 행보가 담긴 활동보고서


즉, 부활하신 그분(죽음을 이기신 그분)은 항상 어디서든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듯이 이 세상과는 달리 경계선이 없는 하늘나라를 향하여 우리의 순교자들은 세상을 벗어나 그 하늘의 주권자이신 예수님의 권세 하에 들어가신 분들입니다. 오늘 여기 순례오신 분들께서는 특별히 최양업 신부님의 성덕을 기리기 위해서 이 승천 대축일 미사를 도앙골에서 봉헌하십니다. 최양업 신부님께서는 서슬 시퍼런 박해의 그물망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유로이 교우들을 만나러 다니시다가 여기 도앙골에서 기도하시며 자신의 활동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셨습니다. 박해의 포위망과 경계를 뛰어넘는 행보로 최양업 신부님께서는 결국 아무런 제어가 없는 하늘나라를 향하는 길을 가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그 하늘나라를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한 우리는 나아갈 길이 험난하다하더라도 항상 희망으로 가득함을 오늘 승천 신비로 믿어 고백하는 것입니다.


출처: 하부내포성지 Daum 카페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