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대축일

2015. 5. 31. 09:00 하부내포성지 만수리 공소

 

‘나 홀로’ 계시지 않는 하느님

삼위일체, 우리의 하느님!

 


성호경을 하는 까닭


우리는 기도할 때나 일을 할 때 또는 식사를 하면서 그 시작과 끝에 항상 성호경을 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렇듯 성부 성자 성령이신 성삼위의 하느님, 즉 세 위로 한 분이시라는 삼위일체의 알아들을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를 우리 믿음의 근간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의 이름으로 세례(마태 20, 19참조)를 받은 우리는 오늘 이 ‘삼위일체 대축일’에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삶 전체로써 이 신비를 고백하는 신앙인들입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성삼위는 우리 믿음의 근간


사실 인간의 머리로는 하느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느 신학자는 말하기를, 인간이 하느님의 신비를 다 이해할 수 있다면 그런 하느님은 믿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 아빌라의 성녀 대 데레사는 하느님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첨단과학에 익숙한 반면 현실적응에는 대조적으로 개인의 감성지수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에 동조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합리성을 추구하면서도 개인적 욕구에 있어서는 지극히 비합리적 성향을 보이는 것입니다. 하여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면 배척하는 한편,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자기주장으로 욕구를 관철하려 합니다. 그리하다보니 이 시대의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잘 알 수 없는 사이로 살아가게 됩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신앙의 덕목을 멀리하려는 세속적 신앙


그렇듯이 사람들이 서로를 잘 알 수 없는 세상에서 자기만이 최고이고 자기의 승리만이 지상 목표인 삶의 습성으로 인하여 이제 알아들을 수 없는 신앙의 덕목은 멀리하려는 현상을 빚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저는 ‘나 홀로’의 세상이 되고 있는 징후라고 일컫고 싶습니다. 그것의 구체적 일례를 들자면, 나 홀로 편히 가기 위해서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들의 경우라 할 것입니다. 혼자 타고 가는 ‘나 홀로 자동차’의 자가운전자가 다른 사람들의 자동차들 때문에 도로가 복잡해져서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이, 나의 식으로 나의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데 거기 얽혀드는 타인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불편이라고 여기는 것이지요.

 

이해할 수 있는 거이어야 한다는 것은 '나 홀로' 신앙


그것은 그야말로 이 세상이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만 된다는 주장이지요. 이 세상이 납득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된 까닭은 다른 사람들만의 탓이 아니라 거기에 나 자신도 그 복잡성을 가중시키는 주인공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세상이란 ‘나 홀로의 세상’인 것입니다.

 

'나홀로'를 거부하고 '더불어'의 정체성을 내보이는 삼위일체의 신비


이 시대 사람들의 그러한 성향과는 정반대로 하느님께서 ‘나 홀로’이기를 거부하고 ‘더불어’를 당신의 정체성으로 내보이시는 것이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당신은 언제라도 그리고 누구하고라도 ‘더불어’ 계실 수 있는 분이심을 드러내시는 모습이 하느님의 삼위일체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곧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다 파악할 수 없는 신(神)이십니다. 그러한 신이신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께 아주 편리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보여주시는 모습이 곧 아버지이시며 성자와 성령이신 성삼위의 위격입니다. 우리의 친근한 아버지이시며 우리를 위해서는 죽음까지 감당하시는 구세주이시고 우리 생명의 근원인 숨결로서 우리 안에 늘 계신 성령이신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홀로 계시지만 홀로 계시기만 하지 않는 까닭


사실상 하느님께서는 유일(唯一)하신 절대자로서의 신이시기 때문에 ‘홀로’ 계신 분이십니다. 만일에 하느님과 똑같은 신이 또 있다면 그러한 하느님은 하느님이랄 수가 없지요. 하지만 그 하느님께서 홀로 계시기만 한다면 그분이 우리 인간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 하느님께서 당신 홀로 계시지 않고 우리 모든 인간의 하느님이시기 위해서 드러내시는 당신의 정체성이 곧 삼위일체이신 것입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의 형제이시며 우리 생명 자체이신 성부 성자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영원불변이시면서 항상 변화무쌍하신 분이십니다. 불변적(static)이시면서 역동적(dynamic)이신 그분의 그러한 본성을 우리는 그분의 사랑에서 보게 됩니다.

 

변함이 없고 멈출 수가 없는 사랑


하느님께서 보이시는 사랑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늘 변함없으신 사랑, 그렇기 때문에 늘 생생한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의 상대자인 우리가 어떠한 배신을 저지른다하더라도 그분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변함없고(static) 멈출 수가 없는(dynamic) 당신 최대치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그분의 변함없으신 모습과 항상 움직이시는 모습으로서의 ‘삼위일체’라는 신비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자식이 잘못한다하더라도 아버지는 늘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 자식의 불행을 동반자로서 함께 해주는 형제 같이 그리고 늘 그 자식의 삶에 원동력이 되어주는 분이 되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라보는 하느님은 성부 성자 성령이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알아봐야 하는 것

 

그런데 이러한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알아 뵙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뿐입니다. 그것은 왜 그럴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신비가 드러난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많은 사람들도 하느님을 의식하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하느님을 달리 의식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의 하느님을 의식하는 사람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삼위의 하느님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교인들처럼 그냥 하느님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특별히 알아 뵙는 하느님을 삼위일체의 하느님이라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하느님은 삼위일체의 하느님입니다. ‘나 홀로’ 계시지 않고 우리와 ‘더불어’ 계신 하느님이 곧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알아 뵙는 삼위일체의 하느님이십니다.

 

신앙은 과학적 실증이나 철학적 논증이 아니다


우리의 신앙으로써 체험하는 신비는 과학적 실증과 철학적 논증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삶으로써 얻는 터득인 것입니다. 불을 확실히 알아보기 위해서 불을 만진다면 감각할 수 있는 손을 태워버리고 말겠지만, 불에서 일정 거리에 물러앉아 불을 향한 자세로 불을 쬘 때 불이 따뜻하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태양의 온도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직접 태양에 다가가서 온도계를 찔러보아야겠다고 오만하게 주장하기보다는, 인간이란 이 땅 위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자세로써 간접적 측정 방법을 통하여 태양의 온도를 알아내 보는 것이 타죽지 않을 과학자의 지혜로운 겸손입니다.


삶으로써 얻는 터득인 신앙

 

그러한 과학을 하는 꾀 많은 인간들보다도 연약한 들꽃이 태양의 열기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더 잘 터득합니다. 차가운 흙 속에 묻힌 꽃씨가 햇빛을 고마워하며 움터 올라 자신의 꽃을 피우고 옹골지게 열매를 익혔을 때 그 꽃씨는 더도 덜도 아닌 충만으로 태양열을 터득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 모습은 태양을 생명으로 체험한 모습입니다. 그 생명의 태양 체험을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삶은 땅을 떠나서 태양을 향해 솟구치는 오만이 아닙니다. 그러한 삶이 아닌 오만으로 하느님을 대하는 인간이라면 그러한 오만으로 스스로 뿌리가 뽑힌 채 곧 말라죽고 말겠지요.

 

계시의 빛을 받아들여야 깨닫는 것이 삼위일체의 신비


그와 같이 무모한 추구보다는 딛고 서있는 이 땅 위의 존재답게 햇빛을 쏘이며 터득하듯, 태양 같으신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계시의 빛을 받아드리는 태도로 터득해야 하는 것이 하느님의 삼위일체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능력=성자=예수 그리스도)을 통하여(창세기 1장 및 요한 1, 3 참조)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흙에서 빚어진 몸(아담=인간)에게 당신의 숨결(성령)을 불어 넣으셨듯이(창세 2, 7 참조), 죄악으로 죽어 흙 속에 묻혀야 할 몸(인간)에게 당신의 숨결(성령)을 되 불어 넣으시어(요한 20, 22 참조), 우리 인간(몸)을 살려(부활시켜)주시는 사랑의 역동적 모습으로 당신을 알려주시는 신비가 태양 같으신 그분의 삼위일체 신비입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여 주심으로써 우리가 당신을 알아보도록 활동하시는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는 것이 삼위일체 신비입니다.

 

우리는 삶 자체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드러내야 한다


들풀이 태양을 향해 가녀린 꽃을 피우는 모습 그 자체로 자신의 생명력을 제 딴에는 100% 드러내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삶 자체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드러내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누구이신가를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형태로써 너무나도 쉽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선조들이 보여준 삶이 그러했습니다. 그분들은 하느님에 대해서 이론적인 말이나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고자 하는 태도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로 향한 믿음 때문에 목숨을 초개같이 바치는 순교의 길로 나아간 그분들이었습니다. 그 길에서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증거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는다는 그러한 삶의 태도로써 우리의 신앙선조들은 우리 후대에까지 하느님에 대하여 무언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계시는 분


사실 인간은 하느님에 대하여 말로 또는 이론으로 증거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눈으로 보고 그분은 어떤 분이시더라고 인간이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기운을 우리 속에 품어 우리의 생명력으로 뿜어낼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이 누구이신가를 증거 하는 존재가 됩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려고 하는 인간이라면 그 순간 그의 눈은 타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에 이사야 예언자는 이제 하느님을 뵙고 살아남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이사 6, 5 참조). 이사야의 고백이 그렇듯이, 하느님은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계시는 분, 어떠한 인간도 뵌 일이 없고 뵐 수도 없는 분”(1티모 6, 16)이시지만, “자비하고 너그러운 분으로서 우리의 죄악과 악행을 용서하시는”(탈출 34, 6-7 참조) 아버지이시기에,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심으로써”(1요한 4, 9) 당신이 누구이신가를 알게 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오신 외아드님(성자)과 함께 우리도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우리 안에 오신 성령께서 가르쳐주십니다(로마 8, 15 참조).


그러나 멀리 머물러 계시지 않고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혼자 가만히 계시는 분이 아니시고 우리에게 항상 창조와 구원의 생명을 주시고자 활동하시는 분이시라서 곧 성삼위의 한 분 하느님이십니다. 그 하느님을 일컬어 우리는 “사랑을 베푸시는 아버님과 은총을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2코린 13, 13 참조)이라고 고백합니다(미사의 개회 인사 참조). 그렇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서 멀리 머물러 계시지 않고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한 하느님의 모습이 곧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에 우리는 그 성삼위의 하느님을 향하여 실감나게 사랑의 신앙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연약한 들꽃이 태양을 체험하여 꽃을 피우듯, 나약한 우리 인간이, 그리고 더욱 죄 많은 우리가, 감히 하느님 그분의 삼위일체 신비를 체험하는 감동의 신앙을 고백해야겠습니다.


원문출처: 하부내포성지 Daum 카페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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