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2015. 6. 7. 11:00 순례단 미사 - 만수리 공소
모든 사람을 食口로 삼아야!
메르스 공포에서 해방되려면…!
하루 일과 중 가장 중요한 먹는 일
먹고 마시는 것은 인간적 삶의 기본입니다. 직장에서나 농토에서 힘들고 어렵게 일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그리 합니다. 그리고 매일 세끼를 먹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하루 일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물 한잔이라도 함께 나누는 것이 상례
무슨 일이고간에 사람들이 모일 일이 있으면 먹을 것부터 챙겨야 합니다. 사람들의 모임에서는 물 한잔이라도 함께 나누는 것이 상례입니다. 손님이 오면 우선 간단한 음료수라도 대접하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예의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찾아 갔다가 냉대를 당했을 경우 “거기 갔더니 물 한모금도 주지 않더라.”고 그 속상한 심정을 털어놓게 됩니다. 사람대접이란 그렇듯이 입에 넣을 것을 베푸는 것이 기본입니다. 먹는 무엇인가를 나눌 수 있어야 사람들 끼리 자리를 함께 하는 마음을 실감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식탁에서는 사람을 나무라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관념에 따라 먹는 자리에서는 태도에 있어서 서로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먹을 때는 개도 안 때린다는 속담이 있듯이 아무리 큰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식탁에서는 사람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식탁에서는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먹는 자리에서 혹시라도 태도가 흐트러지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불량한 것으로 평가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말에 밥상머리에서 사람 된다고도 합니다.
먹는 것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게 아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먹는 행위란 단순히 내 배를 채우기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짐승은 자기 혼자 배를 채우기 위해서 먹습니다만, 사람은 음식의 모양과 맛을 즐기면서 함께 먹는 사람들과 그 즐거움을 나눌 줄 압니다. 짐승들과는 달리 사람은 음식조리법을 늘 개발해가며 식탁에 대한 격식과 그 예술성을 창조하여 그것을 사람들 사이에 공유합니다. 그래서 민족에 따라 지방에 따라 시대에 따라 독특한 음식문화를 창출합니다. 이러한 음식과 식사법이란 결국 함께 먹는 데서 그 인간성을 드러냅니다.
음식과 식사법은 결국 그 인간성을 드러내는 일
그러므로 밥상머리에서 사람 된다는 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한 견지에서 우리 한국의 전통적 식탁예법은 세계에서 최고의 문화민족이라는 자긍심을 갖게 합니다. 서양식의 식탁은 각자 자기 그릇의 음식으로 차려집니다. 일본식이나 중국식도 나온 음식을 각자 자기 그릇에 떠다가 먹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의 식탁에는 다만 밥그릇과 국그릇 정도만 각자의 것이고 다른 모든 것은 공동의 것으로 올려놓고 그것에 대하여 각자의 수저가 눈치껏 수납행위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한국식의 식탁이란 공동식사의 바탕 위에 형성됩니다. 맛있는 반찬이라 해서 나 혼자 다 먹어치우지 않습니다. 함께 한 사람들이 정도껏 나누는 식입니다. 그래서 둘러앉은 사람들 사이에 서로를 배려하게 됩니다. 이러한 한국적 식탁예법은 가정에서 자연스럽게 익혀지는 것입니다.
한국식 식탁은 공동식사의 바탕 위에 형성되는 것
그러나 현대의 가정은 가족이 모여 함께 식사하는 시간을 잃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 편리한대로 때우는 것이 바쁜 오늘날의 끼니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하다보니 밥상머리의 됨됨이를 볼 짬이 없어집니다. 사람들의 모임으로 이루는 축제를 잔치라 하는데, 그것도 한 식탁에 차려 놓고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뷔페라는 정체불명의 서양식으로 서로 눈치 볼 것 없이 각자의 그릇에 퍼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번에 먹어치우는 이른바 패스트푸드라는 것은, 제가 좀 실례의 말씀으로 표현하건대, 짐승을 닮아가는 습성을 키우는 음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기르고 있는 개에게 고기 덩어리를 주면 눈 깜짝할 사이에 그 녀석의 목구멍 속으로 사라집니다. 그 녀석은 고기 덩어리를 씹어 맛을 음미하지도 않고 꿀꺽 삼켜버립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들이란 먹을 것을 그리 삼켜서는 아니 되지요. 맛을 음미하면서 식사한다는 것은 그 음식의 값어치를 판별하는 행위 일뿐만 아니라 사람으로서 그 음식으로 연관된 인간관계에 참여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 음식이 마련되기까지의 과정에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닿았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그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아는 인간만의 행위입니다. 그러한 감사의 깨달음이라면 개처럼 나 혼자만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꿀꺽하지 않고 그 음식의 값어치와 그 예술성과 그 문화성을 공유하는 식탁예법을 지킴으로써 거기에 스스로 됨됨이를 드러내어야 사람인 것입니다.
점점 개인 편리만을 추구하는 밥상
그러한 사람의 됨됨이는 공동식사의 자리에서 서로를 배려하는 태도로써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나 혼자 배를 채우는 식으로 먹는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도 잘 먹을 수 있도록 살피면서 먹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점점 자기만의 편리를 추구하는 현상이란 가정에서 둘러앉아 어른과 부모님과 형제들 사이에 서로를 배려하는 한 식탁의 공동식사를 익히지 않은 데서부터 자기중심주의에 익숙하게 된 그 원인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모두가 제멋대로 하는 것이 이 시대의 톡톡 튀는 개성이고 자기능력이라고들 합니다만, 거리에서 또는 다중이 모인 곳에서 타인들을 의식하지 않는 난잡한 몸가짐이나 다른 사람의 불편을 아랑곳하지 않는 공중도덕심의 상실은 이 시대 모든 가정에서부터 공동식사의 예법을 익히지 않는 데서부터 출발한 자기중심주의입니다.
성체성사도 먹는 일
오늘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에 이렇게 제가 식사에 관련한 이야기를 장황하리만치 늘어놓은 까닭은 성체성사가 실제로 먹을 것을 그 재료로 하여 그 신비를 드러내주기 때문입니다. 즉 성체성사는 떡(빵=밥)과 술(포도주)이라는 물질(이 성사의 質料)로 그 신비를 드러내줍니다. 그러므로 성체성사는 다른 모든 성사에 비하여 우리의 일상적 현실에 가장 가까운 성사입니다.
다른 사람과 식탁에 둘러앉았다면 감사와 나눔의 마음을 가져야
그렇습니다. 우리는 매일 세 번씩이나 성체성사를 연상시키는 식사를 합니다. 그것은 혼자 배를 채우려 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식탁에 둘러앉음으로써 거기 감사의 마음과 서로의 나눔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미사성제를 일컬어 본래 감사제(感謝祭 Eucharistia)와 빵 나눔(Fractio panis)이라고 하듯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으면서 그러한 미사성제 즉 성찬성사의 모형을 갖추게 됩니다. 감사와 나눔이 곧 성찬(盛饌)이자 거룩한 식사라는 의미의 성찬(聖餐)을 이루게 됩니다. 식사란 순수한 우리말에 ‘밥 먹는 일’입니다. 그 ‘밥 먹는 일’을 위해서 최대의 정성으로 차려진 상을 성찬(盛饌)이라 일컫는데, 그렇듯이 그 둘레에 감사와 사랑으로 사람들이 모여 앉은 자리를 또한 성찬(聖餐)이라 일컬을 수 있습니다. 그 성찬의 자리에서 나누는 것은 입에 들어갈 음식만이 아닙니다. 거기서는 교차하는 사랑의 마음이 나누어집니다.
먹는 순간 만큼이라도 순수하게 마음을 교환해야
굳이 가족 사이가 아니라 하더라도 함께 식탁에 앉아 음식을 나누는 사이에는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순수하게 마음을 교환하는 계기를 이루게 됩니다. 그 함께 먹고 마시는 일로 서로 하나가 되는 체험은 그래서 가장 성스러운 행위이자 인생목표성취의 포괄적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로 하나가 되는 일을 예수님께서는 즐기셨고 드디어 돌아가시기 전날 저녁에 그러한 성찬을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그러한 성찬을 성사(聖事)로 삼으신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 그리고 우리가 우리끼리 서로 일체를 이루도록 성찬의 성사를 세우신 것입니다.
성체성사는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모두 내주셨다는 사실을 우리 자신들에게 현실화하는 것
그런데 그 성찬의 실제적 내용으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를 나누는 것을 그 본질로 삼으셨다는 것을 우리는 오늘 새삼스럽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 성찬의 본질이 그분의 몸과 피 즉, 성체와 성혈이라 하는 까닭은 그분 자신을 우리가 나눌 것으로 내어주셨다는 데 있습니다. 미사성제에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는 우리 믿음의 바탕은 그 물질의 변화를 믿는 것에 있다기보다는 그리스도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모두 내주셨다는 사실을 우리 자신들에게 현실화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은 오늘 우리가 복음 성경에서 보았듯이 최후만찬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잘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주시면서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하시고, 또 포도주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건네어 주시면서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14, 22∼24 참조).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이 미사 때마다 사제의 입으로 우리에게 전해지며 성체성사가 이루어집니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 하고 말입니다. 성체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당신의 ‘몸’입니다.
그렇듯이 예수님처럼 타인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 주는’ 모습을 우리의 치명 성인들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 한 예로써, 성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님께서 교우들이 당할 위험을 막기 위해서 죽음의 길로 먼저 나서며 동료 선교사들의 자수를 권유하시고 체포되신 사실이 그것입니다. 그러한 순교의 길을 가시고 묻히신 곳을 찾아 오늘 순례자 여러분들께서 여기 하부내포성지에 이 뜻 깊은 성체성혈 대축일을 맞추어 오신 것 같습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 일상의 변화를 이뤄내야
그렇습니다. 이 대축일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묵상합니다.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는 것은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나누어지는 먹잇감으로 제공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우리 자신의 변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놓는 자세로 삶의 변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에 참여하여 예수님의 몸이라는 빵과 피라는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일은, 우리의 인간관계와 삶에 변화가 일어나게 합니다. 빵과 포도주를 우리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이해하듯이, 우리 자신을 보는 눈도 달라집니다. 우리만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서서히 벗어나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으신 예수님의 삶이 우리 안에 실현되게 하는 변화입니다. 성찬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성사입니다.
나 혼자 배채우기와 자기중심주의
그러나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나 혼자 배 채우기’ 식으로 먹는 오늘날 현대식 식습관은 자신의 것을 타인들에게 내어 줄줄 모르는 ‘자기중심주의’에 길들이게 합니다. 그러한 ‘자기중심주의’는 인간의 사회성(社會性)을 극단적으로 왜곡시키기도 합니다. ‘나 먹을 것’만 혈안으로 찾다가 개인의 힘이 역부족일 때 ‘집단이기주의’로 끼리끼리 뭉치게 됩니다. 그리고 나아가 자기들의 ‘끼리’가 아닌 사람들을 적(敵)으로 보게 됩니다. 그런 현상이 사회적 갈등입니다. 그리고 이른 바 ‘가진 자들의 갑질’이라는 횡포로 없는 자들을 즉 ‘을’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듭니다. 가진 자들은 더욱 더 갖고 놓질 않으려 합니다. 조금도 내어줄 생각을 하지 않는 자들이 이른 바 ‘갑’들입니다.
바이러스 감염경로를 밝히지 않는 것도 일종의 갑질
그러한 ‘갑’들의 횡포를 우리는 지금 메르스 전염 공포 속에서도 목격하게 됩니다. 정부 측과 의료기관들이 국민들을 대상으로 ‘갑질’을 하고 있습니다. 당국자들이 자신들의 권력 누수를 방지하기 위해서 바이러스 감염 경로를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의료기관들도 자기들의 의료영업을 지키기 위해서 자체기관에서의 감염사실을 감추고 있고, 그런 의료기관의 편익을 위해서 정부 당국이 그런 의료기관을 국민들에게 밝혀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국민들만 전염공포에 떨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을’들인 국민들이 2차 3차 감염의 위험에 방치되고 있습니다.
천주교회 의료기관 만이라도 커밍아웃을 해야
이럴 때일수록 우리 천주교회의 의료기관 만이라도 떳떳하게 커밍아웃을 해야 합니다. 천주교회의 의료기관들이 메르스 감염환자를 진료하거나 입원시킨 일이 있다면 떳떳이 국민들 앞에 실토하고 지금 당장 의료영업의 타격을 입는다 하더라도 전국의 모든 메르스 감염환자들을 도맡아 주겠노라 선언한다면, 이러한 위기가 극복된 향후의 더욱 큰 국민적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커밍아웃은 예수님의 ‘내어 주는’ 성체 신비를 우리 사회에 실현하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전염병 공포에서 이 사회를 해방시키는 일단의 계기를 우리 천주교회의 의료기관이 앞장서 마련해야 하겠습니다. 영업이 아닌 사회구원의 사명은 이런 때일수록 우리 교회에게 부여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혼자만 살겠다는 비겁한 자기중심주의
그러므로 오늘 성체와 성혈 대축일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모두 내주셨다는 사실을 묵상 하면서, 우리는 혼자만이 살겠다는 비겁한 ‘자기중심주의’를 과감히 집어 던지는 배포로써 세상사람 모두 함께 살자고 하는 메시지를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간파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먹고 사는 사이로 살자는 것입니다.
밥 먹고 사는 일이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닌 사이를 ‘식구(食口)’라 하듯이 그렇게 함께 먹고 사는 사이로 매일 일상적 인간관계 속에서도, 이웃 사이에서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우리 모두가 항상 함께 살자는 세상을 이루어야 함을 성체성사의 신비에서 깨달아야겠습니다. 그럼으로써 주님의 성체와 성혈 신비를 우리 안에 현실화해야겠습니다. 우리의 일상적 삶 자체를 성찬(聖餐)으로 변화시켜 나가야겠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식구(食口)’로 삼는 일이 곧 성체성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메르스 공포에서 모두 함께 해방될 수 있는 방도란, 세상 모든 사람들을 한 식구로 보는 성체성사의 현실화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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