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1주일
2015. 6. 14. 09:00 하부내포성지 도화담 공소
메르스가 아닌 하느님 나라의 바이러스
낙락장송도 근본은 종자이다.
메르스의 전국적 공포
이즈음 온 나라가 메르스라는 전염병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메르스는 ‘중동호흡기증후군’이라는 뜻이랍니다. 전문용어로는 2년 전에 국제바이러스 분류위원회에서 신종으로 이름 붙인 메르스 코로나바이러스(Middle East Respiratory Syndrome Coronavirus)에 의한 호흡기감염증이라 한답니다. 감염 경로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의 사막에 있는 낙타에게서 사람한테 감염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서 중동에서 발견된 바이러스라는 뜻으로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랍니다. 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병원체인 이 바이러스 때문에 온 나라가 공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런데 중동에서부터 멀리 우리나라에 이렇게 전염된 경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접촉에 의한 것이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병원체에 의해서 우리 사회가 온통 흔들리고 있습니다. 사람끼리의 접촉에 의해서 감염된다는 까닭으로 이즈음 우리는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만나기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흉흉해진 인심과 모순적 사태
이러한 실정으로 웃지 못 할 모순적 사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 많이 모이는 곳을 피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당에 미사 참례하러 가기를 두려워하는 교우들이 많습니다. 교구 별로 신심단체 모임을 자제하라는 지시가 내려지고, 환자로 의심 되는 신자는 주일미사를 하지 않아도 되는 ‘특별 관면’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흉흉해진 민심은 우리 교회 안에서도 교우들 끼리 매한가지입니다. 서로 악수하는 일도 께름칙합니다. 우리 만수리 공소 지역에서 오랜 노환으로 며칠 전에 선종하신 이웃 교우 노인의 장례식장 빈소에 연도 바치는 모임에도 선뜻 나서기를 주저하리만치 교우 공동체 사이에도 흉흉한 민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연도 바치는 자리에서 마스크를 착용한 분들은 옆 자리의 교우들을 경계하는 듯, 그 마스크 위에 좌우로 슬금슬금 눈동자를 굴리기도 합니다. 복면 쓴 모습 같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120명이 순례를 왔다는 것은?
이렇듯 흉흉한 시기에 저는 지난주일 일종의 무모한 모임을 주도한 일이 있습니다. 수도권에서 우리 하부내포성지에 순례오신 120명의 교우님들을 우리 만수리 공소에서 모시고 미사 봉헌을 한 후, 서짓골과 완장포구 등의 성지 순례 행렬을 안내하였습니다. 그러한 순례일정에 여유롭게 호젓한 시간을 그 순례 교우님들과 어울려 지낼 수 있었습니다. 평소 일요일에 관광객들로 떠들썩하게 붐비는 보령호의 ‘물빛공원’을 우리 순례단이 독차지 할 수가 있었습니다. 수도권의 수십 개 본당에서 몇 명씩 모여 형성된 그날의 순례단원들 가운데는 노인과 어린이가 다수 계셨습니다. 한 본당에서 서너 분씩 서로 연락해서 모집된 수십 개 본당의 그 교우님들께서는 대형 버스 3대로 우리 하부내포성지 순례를 마치고 오후 늦게 귀경하셨습니다.
성체성혈 신심 순례단
그날 오신 분들의 순례행적을 여기 하부내포성지의 일지에 기록하면서 저는 그 순례단의 명칭을 ‘성체성혈 신심 순례단’이라 적어놓았습니다. 그날이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이었기에 말입니다. 그분들은 아름아름 의기투합하여 꽃동네 봉사활동을 30년 가까이 해 오신 교우들입니다. ‘가톨릭 생명운동원들’이라 자칭하는 임의봉사회원들이십니다. 그분들은 ‘생명운동’의 실천으로 ‘낙태 반대운동’과 ‘어린이 입양 운동’을 하시는 분들입니다. 그분들께서 예정하신 순례일정을 앞 둔 이틀 전에 제가 그분들의 대표 격이신 분께 전화로 문의를 한 일이 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여러 곳에서 모집하여 오실 분들의 단체순례를 과연 강행하실 것이냐는 질문을 하였었지요. 그러한 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단호했습니다. 순교성인들을 바라보는 마음의 순례인데 메르스 공포로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심 하나로 가는 순례의 길은 두렵지 않다
신앙심 하나로 함께 가는 순례의 길이므로 두렵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질문을 보내는 저를 오히려 부끄러워지게 하는 결연한 대답이었습니다. 멀리서 몰려온 순례자들이 식사하기 위해 음식점을 선택하는 일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 수상한 시기에 타 지역의 인파를 우리 만수리 지역 시골의 어느 음식점이 받아줄 것인가? 그리고 더욱 버스 3대의 인파가 이 작은 시골 마을에 몰려들어오는 걸 주민들이 막아서면 어찌할 것인가?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오실 순례자들의 점심은 각자 김밥을 가지고 오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공소의 정문 앞에 주차한 버스 3대의 순례자들께서 마을 주민들 시선을 피하여 조용히 미사 장소에 입장하였습니다. 그분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면서 그분들의 열렬한 기도 분위기에 저는 압도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깊은 신심의 자리에서 이미 메르스 공포란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치유의 은총이 그분들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70세가 넘으신 노인께서 손자 같은 어린이 3명을 입양하여 키우시며 그 초등학생 어린이들과 함께 순례 미사의 앞자리에서 기도하시는 모습은 사제인 저를 감동케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이 중 한 아이가 사제 성소를 바라고 있다면서 저에게 특별 강복을 청하였습니다. 저는 진정 간절한 마음으로 그 어린이 머리에 안수하며 기도했습니다. “이렇듯 열절한 신심이라면 이 어린이가 세상의 불행한 사람들을 위한 삶에 투신할 수 있는 사제가 꼭 되기를 주님께서 이끌어주소서.”
그분들과 어울려 서짓골과 완장포구 등의 순례기도를 하며 저는 주님께 짙은 감사기도를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점심식사 준비를 우리 만수리 공소의 여교우님들께 부탁하였다가 거절당하다시피 한 씁쓸한 마음과는 달리 그날 순례의 은총을 제가 오히려 더욱 크게 얻은 것에 대하여 주님과 그날의 순례자들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날의 주일미사를 오전 9시에 만수리 공소 교우들이 먼저 봉헌하고는 연이어 도착할 순례자들과의 접촉을 피하여 서둘러 귀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멀리 외지에서(메르스로 불안한 수도권에서) 찾아온 120명의 순례자들은 우리 만수리 지역민들과의 접촉이 방지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그 순례자들께서 귀경하신 후 1주일 지난 오늘까지 그분들 가운데 메르스 감염의 의혹을 받는 일이 발생하지 않은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여기 하부내포 지역의 순교성인들의 전구(傳求) 덕분으로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무모했던 순례길
이러한 지난주일 순례단과의 체험은 방역상식에 반(反)하는 것입니다. 그날의 순례는 사실상 무모한 일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단언하고 싶습니다. 과학적(의학적) 사고(思考)와는 거리가 먼 무모함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만, 그 순례 교우님들의 신앙적 열성은 결코 무모(無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혹여 자신이 스스로 메르스 감염에 의심스러운 분이 계셨다면 그 순례에 참가하시지 않으셨으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그 순례 교우님들 가운데 혹여 그러한 의심 속에서 참가하신 분이 계셨다면 그간 30여년의 꽃동네 봉사와 생명운동을 하지 않으신 분일 것입니다. 그 순례 교우님들은 모두 낙태반대의 선두에 서신 분들이므로 적어도 3∼4명의 자녀들을 두시고도 모자라 한두 명의 어린이를 입양하여 키우시는 분들입니다. 일반 세인들의 눈에는 세상을 역행하여 어리석다는 오해를 무릅쓰고 생명운동을 하는 그분들이 혹여 다른 사람들 생명에 지장을 초래할 감염자로서 그 순례에 참가하리만치 무모하고 파렴치한(?) 사람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분들은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미련해진 분들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리만치 무모한 분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겨자씨와 같은
그렇습니다! 사랑은 미련하지만 무모하진 않습니다. 그 미련한 사랑은 오늘 복음 성경의 예수님 말씀에 예를 드신 겨자씨와 같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듯 작은 씨앗을 땅에 심어 무슨 결실을 기대할까 하는 미련함과 같은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사랑의 씨앗은 엄청난 결실을 잉태하고 무모한 듯 뿌려집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그리 되는지 모르지만 모두들 무심하게 자고 일어나는 사이에 무성한 줄기로 자라고 낟알을 영글게 할 것입니다(마르 4, 26∼29 참조). 사랑은 어리석어 보일만큼 하찮은 행실을 통해서도 온갖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이게 되리만치(마르 4, 31∼32 참조) 풍성한 삶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외로움을 안고 살던 아들의 불치병이 나은 까닭
그리고 그러한 사랑 때문에 믿음이 강하다면 인간을 괴롭히는 어떠한 병마라도 떨쳐낼 수 있습니다. 제가 이즈음 작은 잡지에서 읽은 글이 있습니다. 의학박사인 모 유명인사의 수기입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홀로 되신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키우시며 행상으로 매일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돌아오기 때문에 아들은 다른 아이들처럼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합니다. 하루 종일 어린 아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엄마는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아들은 외로움을 안고 자랐답니다. 그러던 아들이 원인 모를 병을 얻게 되었습니다. 밥맛도 없고 소화도 되지 않고 머리도 아프고, 그러함에도 병원에서 주사 맞고 치료 받은 게 아무 소용없더라는 것입니다. 아마 ‘소아 우울증’이었나 봅니다. 그런 아들이 잠을 자다가 이불을 차게 되었는데 그 이불이 다시 덮어지더랍니다. 그러더니 아들의 뺨에 따뜻한 볼이 닿더랍니다. 그리고는 아들의 볼에 뜨끈한 게 떨어져 잠을 깨게 되었는데 엄마가 아들을 끌어안고 누워서 흐느끼더랍니다. 그날 밤 이후로 아들의 원인 모를 병이 사라졌다는 겁니다. 여덟 살 때의 일이랍니다. 그 아들이 이제는 70대의 노인인데 지금도 그때의 기적적 치유를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게 맞아. 근데 내가 잘못 알고 있었구나. 그때 ‘사랑이 병을 고친다.’는 진리를 처음 체험한 것 같아요.”
그렇습니다. 사랑이 병을 고친다!
그러나 이즈음 번져가는 메르스의 공포 속에서 과학적(의학적) 방비로써만 전염을 막을 수 있을까요? 바이러스 전염보다도 더 무서운 게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의 불신과 상호 경계심으로 모두들 스스로에게 강렬한 스트레스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어느 감염 번호의 젊은 의사가 자신에 대한 의혹 때문에 얻은 충격으로 병이 더욱 악화 되었다는 식의 언론 보도가 있습니다. 그런 불신과 사회집단의 스트레스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는 책임도 지지 못하는 정부 당국과 민심을 비웃듯 번져가고 있습니다. 이런 흉흉한 시절에 우리 교회는 덩달아 사람들 갈라놓는 행태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의 강론 원고에서 제가 지적했듯이, 진정 영업이 아닌 복음적 치유은총의 실천을 위한 천주교 의료기관이라면 온 나라의 메르스 환자들을 도맡아 줄 용의가 있다고 선언하여 국민들에게 난국극복의 희망과 믿음을 안겨 주는 사랑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가톨릭 병원이 나서야 할 일
오늘 복음 성경의 예수님 말씀에서 아주 작은 겨자씨란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번져가는 바이러스가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이웃을 향한 신뢰와 작은 실천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나만 살겠다는 심보로 우리 교회 병원에서는 감염자를 철저격리로 다른 의료기관에 보냈으니, 안심하고 다른 질환 진료를 받을 수 있다는 보도에 앞서는 행태는 곧, 영업에 지장 받지 않겠다는 장사꾼의 태도이지요. 병을 치유하는 곳이 병원(病院)이 아니라, 병을 얻게 하는 병원(病源)이 아니기를 특별히 우리 교회 의료기관에게 기대해봅니다. 그게 곧 오늘 복음 성경의 겨자씨가 하느님 나라로 자라듯,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흉흉한 민심의 나라에 겨자씨 구실을 할 일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시기일수록 메르스 바이러스가 아닌 사랑의 바이러스를 전염시키는 하늘나라의 보이지 않는 씨앗의 구실을 해야 할 것입니다.
낙락장송도 그 근본은 종자이다
‘낙락장송도 그 근본은 종자(鐘子)이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풍성한 그늘로 온갖 새들이 깃들일 수 있는 나무와 같은 하늘나라의 큰 품은 우리 그리스도인들 각자의 작은 사랑이 그 근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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