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3주일
2015. 6. 28. 09:00 하부내포성지 만수리 공소
소매치기처럼 주님께 늘 다가갑시다!
나의 믿음은 어떠한가?
나는 왜 천주교 신자가 되었나?
나 자신에게 그리고 교우 여러분께 물어봅니다. “나는 왜 천주교 신자가 되었는가?”
우리는 어쩌면 오늘 복음서에서 볼 수 있듯이 오랜 병마로 고생하던 여인 같기도 하고, 딸이 죽게 된 회당장의 처지 같기도 하지 않은지요?
체면불구하고 살짝 치유를 원하고 있는 건 아닌라?
세상 사람들 틈에 살짝 끼어서 살며시 예수님 옷깃을 스쳐 병 치유를 기대했던 여인처럼, 혹은 체면 불구하고 황급히 달려와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간청하는 회당장 야이로와 같이 예수님께 나아온 우리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마르 5, 34)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미 딸이 죽었다는 전갈을 듣게 된 회당장에게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 36) 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이렇게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온 터무니란 곧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곧 우리가 “평안히” “두려워하지 말고” 살아갈 수 있는 근거(터무니)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라 살 수 있는 삶의 터무니가 믿음이라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늘의 기적 목격자로서 증인이 되고 있습니다. 북적거리는 인파 속에서 믿음으로 예수님께 다가간 여인의 소리 없는 치유 사실을 목격한 증인들은 곧 예수님 가까이 있던 제자들이었고, 회당장의 딸이 살아나는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 또한 예수님 측근의 세 제자들뿐이었습니다(마르 5, 37 참조).
깨달음의 증인이 되어 믿음을 고백하라
오늘 이 기적 이야기의 무대에서 주인공은 예수님이었고, 그 드라마의 조연 배역은 하혈하던 여인과 회당장과 그 딸이었다면, 이 드라마를 관람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또한 이 드라마의 내용을 알아들어 제자들과 같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란 곧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독자들인 우리들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들로서 예수님 곁에 바짝 붙어 따라가야만 예수님의 그 능력을 보고 깨닫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 깨달음의 증인이 되어 믿음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으로써만 살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어야 합니다.
제자들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처럼 우리도 그분께서 어떠한 분이신가를 가까이서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인과 회당장이 그분께 보여드린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가를 확실히 본 증인답게, 곧 그분의 제자들답게 신앙의 무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신앙의 무리가 곧 우리의 교회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무리가 되어 우리는 그분을 따라 그분이 가시는 곳을 향해 함께 가고 있습니다.
기도하기가 힘드나요?
교우님들 중에는 기도를 하기가 힘들다고 하는 분들도 계시고, 또 기도를 하여도 별 효과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리고 고해성사 보기가 어렵다고 하는 분들이 계시고, 고해성사를 볼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는 분들도 계십니다. 또 어떤 냉담교우들께서는 마음속으로 하느님 믿으면서 나쁜 짓 하지 않고 살면 되는 것이지 매주일 성당에 가고 매일 기도할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냉담교우들은 회두하라는 가까운 신자들의 권유를 듣거나 혹은 본당에서 판공성사표를 받게 되면, 세상 살기 복잡한데 성당 다니느라고 불편하게 살지 말고 나중에 나이 더 먹어서든지 또는 죽기 전에 성당 나가고 성사 보면 되지 않느냐고 강변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삶의 연속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끊임없이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삶의 연속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인간이 한 순간 알아보는 것 정도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혼인하여 부부로 살아가는 사랑의 삶과 비슷합니다. 결혼식장에서 부부로 맺어졌다 해서 사랑하는 일을 다 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남편과 아내는 일생 내내 끊임없이 서로를 알아가고 서로를 사랑해가며 부부의 길을 갑니다. 서로를 사랑한다면서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살면서 사랑에 금을 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만, 부부가 일생을 살아도 상대방에 대하여 다 알게 되었다고 언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죽는 날까지도 배우자에 대해서 다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부생활은 일생 동안 끊임없이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삶인 것입니다. 다가가기를 거부할 때 부부 사이에 금이 갑니다.
기도하기 어렵다고 포기할 때 오는 것들
그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과의 관계라 할 수 있는 신앙이란 끊임없이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삶인 것입니다. 가까이 끊임없이 다가가는 사랑의 삶으로 부부생활을 해야 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하느님께 다가가는 삶이 신앙입니다. 만일에 부부가 서로 잘 맞지 않다고 우기면서 별거한다면 그나마 시원찮던 둘 사이가 완전히 벌어집니다. 마찬가지로 기도하기 어렵다 하여 기도를 포기하거나, 고해성사 보기가 싫다 하여 오랫동안 고해하기를 멀리한다면, 자신은 점점 신자 아닌 사람으로 변해버립니다. 사람이 살던 집을 비워두면 점점 허물어져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역시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행위로 엮어나가지 않으면 빈집처럼 무너집니다.
늘 따라가는 사람들이 깨달아가는 길에 선 것
그렇듯이 주님께 밀착된 삶을 늘 유지함으로써만 주님과의 삶, 즉 신앙생활이 얼마나 맛이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서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고 예수님의 기적을 보기도 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과 행적을 거부한 비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 그리고 그분에 대해서 세속적으로만 대하던 고향 사람들과 군중들은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하여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을 별도로 선정하십니다. 그 사람들은 곧 그분의 제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시는 길을 늘 따라가는 사람들인 제자들이 결국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깨달아가는 과정을 마르코 복음서는 보도하고 있습니다.
간절한 마음이지만 대단한 모험일 수도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봉독한 이 복음서의 내용은 하혈하는 여인의 치유나 회당장의 딸이 살아난 기적에 대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증인이 되고 있음을 그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도 늘 기도하고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회개의 자세로 주님과 함께 하는 삶, 즉 신앙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그 태도, 그 간절한 마음은 사실상 대단한 모험입니다. 어쩌면 큰 망신거리가 될지도 모르고 더 나아가 살아갈 길이 막혀버리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혈하던 여인이 하던 모험처럼
그러한 모험을 오늘 우리는 하혈하던 여인의 태도에서 간파할 수 있습니다. 몸에서 피가 나오는 하혈증이라는 질환은 당시에 아주 불결한 사람이라는 증거였습니다. 그래서 하혈하는 사람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 가면 아니 되도록 율법에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더구나 오늘의 복음 성경에 나오는 그 하혈증 환자는 여자였습니다. 불결한 여자의 신분이라면 집밖에 나올 수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처지로 12년 동안이나 숱한 고생을 하던 그 여인이 그 사실을 감추고는 사람들 대열에 끼어들어 감히 예수님의 옷에 몰래 손을 대다니요!(마르 5, 25∼ 28 참조) 그 여인은 속된 말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식으로 예수님께 다가간 것입니다. 이러한 그 여인의 모험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합니다.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마르 5, 29).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그때 예수님께서 마치 귀중품을 소매치기 당한 것처럼 당신의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간 것을 알아차리십니다. 누가 나의 힘을 빼내갔느냐고 예수님께서 돌아보시며 물으십니다. 매우 기분 언짢아지신 말씀 같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마르 5, 30)하고 말입니다.
사람들이 북적대는 곳에서 누가 내 몸에 손을 대면 참 기분 나쁘지요! 제가 우리 하부내포성지를 관리하는 통장을 정리하려고 농협의 자동정리기(ATM) 앞에 줄을 섰다가 내 차례가 되어 작업을 하노라면 등 뒤에 바짝 붙어 서서 내가 하는 일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너무 바짝 내 등 뒤에 서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숨소리가 뒤통수에 간질간질 닿기도 합니다. 참 기분 나쁘지요. 그건 아주 몰상식한 짓입니다. 더구나 비밀번호 찍는 것까지 들여다본다는 것은 아주 불량한 짓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열에 줄서서 기다리라는 표시로 대기선을 그어놓았는데도 그런 식으로 끼어들어서 그 불량한 짓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사회의 공중도덕에 있어서 아직도 후진성을 면치 못한 단면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안히 가거라
그처럼 공중도덕의 후진성을 드러내듯 어떤 여자가 예수님 등 뒤에서 그분의 옷자락을 만지작거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마 기분 상하셔서 호통을 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 엎드려 이실직고를 하는 여인의 말을 들으시고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고 오히려 칭찬하십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람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던 그 여인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시는 선언까지 하여주십니다. “평안히 가거라.”하고 말입니다.
모여드는 이는 많지만, 손 대는 이는 적다
여기서 우리는 깨닫습니다. 예수님께 다가가는 일은 모험적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험은 사실상 누구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여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님께서는 “주님 주변에 모여드는 군중은 많지만, 믿음으로 주님의 옷에 손대는 사람은 적다.”고 말씀하셨습니다(아우구스티노, ‘설교’ 62, 4).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군중들처럼) 호기심으로 예수님께 모여든 사람들이 아니라 그 하혈하던 여인처럼 간절한 심정으로 그분께 다가가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나의 생사를 그분으로 말미암아 결정지우는 모험, 그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이 아니고서는 그분의 기적을 보았다고 소문만 낼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죽었던 소녀를 되살리시고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거듭 분부하셨던 것입니다(마르 5, 43 참조).
나의 믿음은 어떠한가?
여기서 우리는 더욱 깨닫습니다. 눈으로 확인할 기적을 기대하기에 앞서서 우리 자신의 절실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 믿음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기적의 바탕입니다. 기적이란 사실상 나 밖에서 일어나는 사건이기보다는 나 자신 안에서 주님께 다가가는 변화입니다. 그래서 기적이란, 믿음으로 그분께 다가감으로써 그분의 존재상황을 나의 것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일컬어 저는 좀 저속한 표현으로 조심스럽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믿음이란 주님의 은총을 그분도 어쩔 수 없게 빼내가는 기적의 소매치기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저 하혈하던 여인과 비교하여 나의 믿음은 어떠한가?”하며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서 우리는 늘 그렇게 주님의 은총을 소매치기하러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야겠습니다.
소매치기처럼 주님께 늘 다가갑시다!
원문출처: 하부내포성지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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