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2주일
2015. 6. 21. 09:00 하부내포성지 만수리 공소
그분은 계시지 않은 것 같다?
우리 자신에게서 믿음을 일깨워야겠습니다!
천주교 요리문답 320조목
제가 어렸을 적에 교리공부로 외우던 ‘천주교 요리문답’의 320조목 가운데에는 다음과 같은 문답문항이 있습니다.
문) 천주 무량하시뇨?
답) 천주 무량하시니 아니 계신 곳 없이 곳곳이 다 계시니라.
히느님은 지옥에도 계실까?
이러한 교리문답의 내용해설에 있어서 ‘하느님께서는 지옥에도 계신다.’는 말을 어렸을 적에 저는 어른들에게 들었습니다. 천당과 연옥과 우리의 현세에 하느님께서는 어디든지 보이지 않게 계시는데, 지옥에도 그 벌 받는 사람들을 처벌하시기 위해서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 시절 어른들의 이러한 교리문답 해설은 지금 되생각해 볼 때 적절하지 못하다고 여겨집니다. 그와는 달리 ‘지옥이란 하느님 계시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죄악과 절망 그 자체이다.’라고 저는 해설하고 싶습니다.
어디에든 계시지만, 계시지 않을 수도 있는 곳?
제가 회상하는 그 교리문답의 주제는 하느님의 무량(無量)하심에 대한 것입니다만, 그렇듯이 어디에나 계시는 그 한없이 크신 하느님의 속성(屬性)이란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기실 한없는 위안을 주는 교리입니다. 어디든지 계시기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불행한 처지에서도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처벌하시기 위해서 감시의 회초리를 들고 우리 곁에 따라다니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의 어떠한 처지에서도 우리를 떠나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 행불행의 모든 처지를 하느님께 맡겨드릴 수가 있습니다. 이야말로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큰 위안과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사실인 것입니다.
행복과 희망의 길을 깨닫는다는 것?
그러나 인간이 하느님을 멀리하려 하면 그럴수록 그 삶은 어둡게 됩니다. 마치 어디에나 골고루 비치는 햇빛을 피할 이유가 없듯이, 우리의 삶 가운데 태양과 같으신 하느님을 등짐으로써 생기는 어두운 그림자를 향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풀과 나무가 햇빛을 향하여 성장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이 우리 인간이란 하느님을 향하여 그 삶을 이루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외면하면 할수록 인간의 그러한 무신론적 삶은 어둠의 나락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이 곧 행복과 희망의 길임을 깨달아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인 것입니다.
초대교회와 조선 박해시대 신자들 마음의 표현
오늘 우리가 읽는 복음서(마르 4, 36)에서 예수님을 모시고 거센 풍랑을 헤쳐 가는 제자들의 항해가 곧 우리 신앙의 처지인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서의 오늘 이 보도 내용은 사실 초대교회의 신앙을 전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는지를 알리기 위해 기록 된 것이라기보다는 참혹한 박해 가운데에 초대교회 신자들이 깨달은 신앙의 표현인 것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습니까?”(마르 4, 38)하고 예수님께 부르짖던 그 외침은 초대교회와 우리 한국교회의 박해시기 신자들의 마음의 표현인 것입니다.
메르스 창궐이 흉흉한 시절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고통과 마음의 불안 속에서 헤매게 됩니다. 어느 경우에는 우리 자신의 탓도 없으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고통을 당하고 천재지변이나 병마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오해와 따돌림을 당하기도 하고,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되는 일 없이 거듭되는 실패로 칠흑 같은 절망의 늪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한 고통과 좌절 속에서 우리 또한 “주님, 제가 지금 죽을 지경인데 모른 체 하시긴가요?”하고 부르짖을 것입니다. 이 부르짖음은 메르스 창궐의 흉흉한 시절에 우리 국민들 심정에서 무책임한 정부당국을 향하여 원망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국민들의 안위에 대하여 초기 대응을 소홀히 한 정부의 무책임은 절벽에서 내어던진 사자새끼들에게 “살 수 있는 자는 알아서 살아남아라.”하는 식이지요. 여기서 “대한민국의 정부는 없었다.”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을 향하여 드리는 부르짖음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가시는 분이기에 외치는 신앙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이 세상 건너편까지 함께 가자
주님을 원망하듯이 그렇게 부르짖는 우리는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마르 4, 35 참조)하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듯이, 언젠가 주님께서 나에게도 “이 세상 건너편까지 함께 가자.”고 하셨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제자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듯이(마르 4, 36 참조), 우리 또한 그분을 모신 교회 즉 제자들의 배를 타고 이 세상 건너편 곧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함께 가는 처지가 아니겠습니까?
주무시고 계시는 분이신가?
그런데 함께 가자던 그 주님께서는 도대체 무얼 하시는 분이십니까?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어”(마르 4, 37) 이제 모든 것이 끝장인 것처럼 절망 속으로 가라앉게 될 나를 거들떠도 보시지 않는 그분이 아니신가요? 그분을 따르는 이 신앙의 길에서 나의 절망적 처지를 돌보시지 않는다면, 신앙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러한 처지에서도 그분을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분은 우리가 당하는 이 풍랑 가운데서 “주무시고 계시는” 분이신가요?(마르 4, 38 참조)
그 분은 계시지 않는 것 같다
여기서 우리는 무신론적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아무런 자기 탓도 없는 어린 아기가 전염병에 걸려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현장을 목격하던 저 유명한 프랑스의 문호 알베르트 카뮈의 심정이 연상됩니다. “도대체 하느님이 계시다면 이렇듯 알 수 없는 비극을 수수방관 할 수 있단 말인가?”하는 물음을 제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심정으로 질문할 수 있겠지요. “그분은 계시지 않는 것 같다?” 여기서 우리의 믿음이 불신앙에 빠져들 처지가 됩니다. 그렇듯 불행에 직면하면 믿음이란 늘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여지없이 깨져버릴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신앙은 인과응보가 아니다
그러한 살얼음판 위의 신앙이란 모순적 현실세계를 타개하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모순과 불행은 참 신앙을 확인하고 굳게 하여주는 시금석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신자가 자기는 성실하게 살아왔고 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인데도 불행을 당하기만 한다고 호소할 때 저는 사제로서 속 시원하게 대답해 줄 말을 찾지 못합니다. 불행을 통하여 오히려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해야 한다고 대답하면, 그건 무책임한 발언이요 상투적인 변명이라고 오해를 받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신앙이란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질서와 현실주의의 틀 안에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점을 우리는 오늘의 복음서 보도에서 번뜩 깨달아야 합니다.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곧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란 “이 세상 저쪽으로 건너가자.”라는 초대에 응답한 투신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저쪽으로 건너가자"는 초대에 응답해야
이 세상 저쪽으로 건너가자는 초대는 사실상 매일 우리 모두에게 던져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매일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드는 우리에게 하루의 마지막 기도(저녁 종과경)에서 다음과 같이 기도하도록 합니다(성무일도의 ‘끝기도’에서 마지막으로 바치는 노래 참조). “주님, 이제 주님의 이 종이 평안히 떠나가게 하소서.”하고 말입니다. 이 기도는 성전에서 예수 아기를 만난 시메온 노인이 감사의 노래로 바친 기도입니다(루카 2, 29 참조). 시메온은 왜 이런 노래를 불렀을까요? “주님께서는 저의 눈으로 구원을 보게 하여주셨습니다.”라고 이어서 노래하는 시메온이었습니다(루카 2, 30∼32 참조).
시메온처럼 마침 기도를 올려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루라는 항해를 마치면서 시메온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하루의 이 기도와 더불어 우리는 그 하루의 건너편으로 가는 또 다른 항해에 우리 자신을 맡깁니다. 그 또 다른 항해란 곧 잠(수면)입니다. 그 또 다른 항해 후에 우리는 과연 다른 곳에 당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 다른 곳은 어디일까요? 그건 ‘내일’일 수도 있고 혹시 ‘죽음’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잠을 자다가 세상을 마칠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하루의 ‘끝기도’를 바치기가 두려울 수도 있습니다. 호스피스 병동을 방문한 사제에게 어느 환자가 말했습니다. “저는 눈 감고 잠이 드는 게 제일 무서워요.” 이 환자의 말을 듣고 사제가 “잠자는 게 왜 무서운가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환자가 대답합니다. “잠자다가 제가 세상을 마칠까 두려워요. 의사는 내가 지금 죽어가고 있느냐고 물으면 대답을 하지 않지요. 하지만 나는 지금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답니다. 그러니 잠자다가 나도 모르게 세상 떠날까 겁이 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실상 죽는 순간을 향해서 지금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운 인생항해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눈감고 자다가 나도 모르게 세상을 떠나 ‘다른 곳’에 가있을까 두렵습니다. 그 ‘다른 곳’은 곧 죽음의 세계이지요. 그 ‘다른 곳’을 향하여 가고 있는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의 거친 풍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주님, 정말 모른 체 하실겁니까?
그런데 우리의 이 인생항해의 거친 풍랑을 주님께서 돌봐주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서에서의 예수님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풍랑을 못 보신 척 주무시고 계시는지, 아니면 아예 하느님은 계시지 않는지? 기도를 해도 우리의 세상 고통을 없애주시지 않는 하느님이십니다. 이런 우리의 처지에서 오늘의 예수님 제자들처럼 우리 또한 부르짖을 것입니다. “주님, 제가 처한 이 격랑을 모른 체 하시긴가요?”(마르 4, 38 참조) 하고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거센 풍랑에 직면하여 부르짖는 우리의 신앙이란 어떤 것인가요? 그 풍랑을 비켜갈 방편을 신앙이 담보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더욱 하느님께서는 어이없게도 아무 것도 하시지 않는 듯 우리의 그 풍랑 가운데 주무시는 것 같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멘트
이러한 처지에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바람과 싸운다는 것, 모욕하는 말을 듣는다는 뜻이다. 파도에 흔들린다는 것, 분노가 치민다는 뜻이다. 모욕을 당하면 복수하고 싶은 욕망이 생겨난다. 그러나 복수 뒤에는 또 다른 불행의 난파가 기다린다. 유혹은 바람처럼 일어나 우리를 어지럽히며 출렁이는 호수와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마음 안에 잠들어 계신다. 그 뜻은 무엇인가? 주님께서 와 계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주님을 깨워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아우구스티노, ‘설교’ 63, 1-3 중에서 번안발췌) “믿음이 있으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안에 머무신다.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신다.’(에페 3, 17)고 바오로 사도는 말했다. 우리 마음속에 그리스도께서 주무시고 계시다는 의미는 믿음을 잊고 있었다는 의미이다.”(아우구스티노, ‘요한복음강해’ 49, 19 중에서 발췌)
이와 같은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는 오늘의 복음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잘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신앙은 떠나는 모험이다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 능력을 감탄할 수 있지만, 그 기적은 사실상 우리 자신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 내용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으로써 우리 자신들 안에 일어나는 경이적인 변화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예수님을 모시고 또 그분의 뒤를 따라 배를 타고 떠나는 모험입니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들이쳐도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확신이 곧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절망의 순간에 기도할 줄 압니다. 그러나 그 기도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방편이 아닙니다. 신앙인의 참된 기도는 어떠한 일을 당하더라도 그 때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인이 됩니다.
풍랑은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격정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 따라 저 건너편으로 가는 길에서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 자신에게 닥친 풍랑이 잠잠해지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풍랑이란 사실 우리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격정(激情)입니다. 나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나 아닌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 안에서부터 닥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 자신이 이겨볼 수 없을 정도의 나 자신 안의 격랑(激浪)입니다. 분노와 미움과 원망과 애욕과 불신이 그 격랑입니다. 그러한 격랑에 휩싸인 나 자신 안에 문득 계시는 분을 우리는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분은 계시지 않은 듯, 주무시는 듯, 나 안에 계십니다. 그러한 분을 문득 알아보는 그 깨달음에서 우리의 참 신앙은 출발합니다. 그 깨달음이 절실해질 때 우리는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주님, 제가 지금 격랑에 시달리는데 모른 체 하시긴가요?”하는 그 부르짖음이 곧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깨달음의 발로인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도대체 누구시기에?
그래서 우리는 늘 기도해야겠습니다. “제가 처한 이 격랑을 모른 체 하시긴가요?”(마르 4, 38 참조) 하고 말입니다. 그러면 그분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 4, 39)하고 그분이 나 안에서 말씀하시면 문득 나 안에는 평정이 자리 잡을 것이고 이어서 주님의 다음 말씀이 들려올 것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 40)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깨달을 것입니다. “나 안에 계신 분이 ‘도대체 누구시기에’ 이렇게 평정을 가져다주시는가?”(마르 4, 41 참조)하고 말입니다.
사실은 나 자신을 깨워야 한다
그분은 계시지 않은 듯, 그러면서도 늘 나와 함께 계신 분이시구나! 이런 깨달음에 이르면서 우리는 그분을 깨워야겠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나 자신에게서 믿음을 일깨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깨워야 한다는 믿음의 깨달음, 그 순간에 사실은 나 자신을 깨우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가 건너가야 할 바다 저쪽은 나를 붙잡아 휘두르는 나 자신을 넘어 건너가야 하는 곳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한 행로로 우리는 항해하는 신앙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잠잠히 조용히 겁을 내지 않고 믿음으로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거센 풍랑을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배의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마르 4, 38) 즉 고통의 바다(苦海)인 이 세상에서 좌초되지 않고, 절망을 넘어서 건너 쪽으로 가기까지 두려운 항해를 그분과 함께라면 우리는 그렇게 ‘잠잠히 조용히 겁을 내지 않고 믿음으로’(마르 4, 39∼40 참조) 노저어갈 수가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오늘의 복음에서 깨우쳐주고 계십니다.
원문출처: 하부내포성지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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