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대축일

2015. 5. 24. 09:00 하부내포성지 만수리 공소

 

사람끼리 말이 통하려면

나의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말을 해야 …

 


오순절, 위대한 오십일, 성령강림 대축일 ... 부활축제를 완성하는 날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은 부활 축제를 완성하는 날입니다. 이 날을 ‘오순절’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것은 부활의 50일째 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을 ‘위대한 오십 일(The Great Fiftieth Day)’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을 기념하는 ‘파스카 축제’를 지내고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오십 일 만의 축제를 ‘해방의 완성을 이루는 날(Asseret)’로 지냈는데, 그렇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우리의 진짜 해방, 즉 새로운 삶을 얻은 부활의 축제를 오십 일을 통하여 완성하는 이 날입니다. 이러한 오늘을 우리는 ‘성령강림의 축제’로 기념합니다.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은 곧 성령을 체험하는 것


사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과 성령을 체험하는 것은 같은 체험입니다. 즉 부활과 성령강림은 한 가지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증거 없이 그리스도의 죽으심(묻히심)과 부활승천(일어서심과 들리우심)을 알 수가 없습니다. 비록 성령강림 사건을 사도행전의 보도대로 오순절, 즉 부활 후 오십 일 만의 일로 축제를 삼는 것이 4세기 이후 교회의 전례력입니다만, 실상 초대교회에서 이 부활 시기의 오십 일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을 함께 입체적으로 기념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서 20장 19∼23절은, 부활 당일에 한 방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여 오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숨결로 성령을 주셨다고 보도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성령을 받아라.”(요한 20, 22) 하신 것은 하느님께서 태초에 사람을 창조하신 바로 그 동작과 같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 7) 하였듯이, 죄악으로 쓰러진 우리 인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숨결로 성령을 넣어주심으로 죄로부터의 해방을 이루어 주십니다(요한 20, 22∼23 참조).

 

죄악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은 곧 용서의 현실화


죽음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 부활이듯이 죄악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은 곧 용서의 현실화입니다. 오늘 그러한 용서를 이루는 사건으로 성령의 강림이 이루어집니다. 그러한 성령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분으로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인간에게 다시 숨을 불어넣는 일을 부활하신 분이 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에 대하여 저는 좀 노골적인 표현을 빌려 예수님께서 인간을 다시 살리는 인공호흡을 하셨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호흡이 멈춰서 죽게 된 우리 인간들을 부활하여 오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입김을 불어넣어 다시 살려내신 것이 성령강림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다시 살리는 인공호흡을 하셨다


그렇듯이 부활하신 분의 기운으로 다시 살게 된 인간이란 거듭난 사람을 일컫는 것이지요. 그와 같이 성령, 즉 하느님의 숨을 받아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세례입니다. 그러한 세례로써 새 삶을 얻었음을 우리는 부활 축제로 확인 기념하였습니다. 이렇게 새 삶을 얻은 사람들 모두를 일컬어 ‘새로운 인류’라고 칭할 수 있는 사건을 ‘성령강림’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강림 대축일’이란 새로운 세계에 새 인류의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였음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성령강림, 새 인류의 새로운 역사를 시작한 새로운 세계

 

‘새 인류의 새로운 역사를 시작한 새로운 세계’란 그러면 진정 무슨 뜻이겠습니까? 저는 그것을 인간들 모두 서로 말이 통하는 세상이 시작 되었다는 의미로 보고 싶습니다. 그러한 세상의 시작을 오늘 오순절 사건을 보도하는 사도행전이 잘 전하고 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 한 가지로 말을 알아듣게 되었다는 것입니다(사도 2, 1∼11 참조). 그것이 곧 ‘성령강림의 특징적 사건’입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거스르고 죄를 지어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하며 뿔뿔이 흩어진 ‘바벨탑 사건’(창세 11, 1∼9 참조) 이후 인류사는 갈등의 역사였습니다.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자기주장만을 앞세우는 싸움의 역사였습니다. 싸움이란 서로 통하지 않는 오해에서 그 출발을 합니다. 그것은 서로의 말을 인정할 줄 모르는 데서 비롯됩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해를 낳고, 오해는 이어서 서로의 미움을 낳고, 미움은 결국 싸움에까지 치닫게 됩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은 말이 아닌 사상이 다르기 때문


그런데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떠한 경우를 일컫는 것이겠습니까? 단순히 서로의 언어가 다를 경우이겠습니까? 일례를 들어서 우리 민족이 남북으로 70년 동안이나 분단되어 살아오게 된 그 최초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남쪽 사람들은 영어를 쓰는 미국의 힘을 빌려서 자기주장을 하고 북쪽 사람들은 러시아어를 쓰는 소련 사람들의 힘을 빌려서 자기주장을 했기 때문이겠습니까? 똑같은 한국말을 하는 민족이 왜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그 근본 이유는 사상이 달랐기 때문이지요. 다른 말로, 생각이 달랐기 때문에 서로 갈라서고 처참한 동족상잔을 저지르고 부끄러운 분단세월을 살고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사상 즉 생각이 달랐다는 것은 쉬운 말로 마음이 달랐다는 것이지요. 서로 통하지 않는 마음이었기에 그리 갈라서고 싸우고 서로 믿지 못하며 미워하는 세월을 살아온 것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은 말이 아닌 마음이 통하지 않기 때문

 

그래서 결국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근원에 있어서 마음이 통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말이 다른 외국인끼리 만나서 서로 통하지 않을 경우 불편하겠지만 서로 통하고자 노력하면 서로의 말을 배워서 그 입에서 나오는 서로의 말이 통하게 됩니다. 그러나 말이 같은 한국 사람들끼리도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남북한 사람들끼리, 동서 영호남 사람들끼리, 여야의 정치인들끼리, 도시와 농촌 사람들끼리, 나이가 다른 사람들끼리, 남녀 간에, 그리고 더 나아가 서로 사랑한다는 부부나 부모 자식 간의 가정 안에서,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를 다반사로 체험합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교회 내부공동체의 안타까운 현실


저는 사제로서 매우 안타깝고 부끄럽고 속상한 경우를 많이 경험한 바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자매로서의 공동체를 이룬다는 우리 교회 안에서 신자들 사이에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 교회의 장상과 수하 사람들 사이에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 사제와 신자와의 사이에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 참으로 안타깝고 부끄럽고 마음 괴롭습니다. 그렇게 교회 안에서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체험이란 궁극적으로 사랑을 본질로 하는 교회의 최악의 부끄러움이요, 그것으로써 모든 것이 위선일 수밖에 없는 비극입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말이 가식일 뿐, 알량한 자존심 하나 때문에 분란이 일어나고 뿔뿔이 흩어지는 비극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것이 곧 바벨탑 사건입니다.

 

통하지 않는다는 건 바벨탑 사건에 모두 연루되어 있다는 뜻


이렇듯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바벨탑 사건에는 사실 우리 모두 연루되지 않는 사람 없습니다. 진정 나 자신이 무슨 마음인가 하는 냉철한 성찰을 누구든 먼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찰이라면 나 아닌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자세일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새로운 마음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새로운 마음들의 사람들이 다시 모이는 곳, 그곳이 새로운 세계의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곳입니다. 그 새로운 역사의 출발이란 우리들 각자의 마음속에 용서를 바탕으로 하여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용서가 없는 곳에는 오해와 미움의 악순환만 거듭 될 뿐입니다.

 

용서를 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그래서 우리는 오늘 하느님의 숨결인 성령을 우리의 숨으로 불어넣어주시는 예수님의 부활 체험을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나아가 용서를 전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부활하여 오신 그분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보내신 것처럼 당신도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다면서 우리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 21∼23) 고 말씀하십니다.

 

성령강림으로 비롯된 새 인류의 출발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편협한 마음으로 내 생각의 문을 잠가 놓고(요한 20, 19 참조) 자기주장에 사로잡혀 지낼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스스로 나아가 모두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오순절 사건을 전하고 있는 사도행전의 보도에 의하면, 진정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을 때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성령을 받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들은 세계 각처로부터 모여온 사람들에게 나아가 그 성령의 능력으로 그 모두 알아들을 수 있는 그들의 말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했습니다. 그래서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로 변하여 최초의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탄생되었습니다(사도 2, 1∼13 이하 참조). 이것이 곧 새 인류의 출발입니다.

 

새 인류 출발이란 곧 서로 말이 통하는 사람들 세상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


‘새 인류의 출발’이란 바벨탑 사건 이후의 역사를 반전시켜 ‘서로 말이 통하는 사람들의 세상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곧 그런 새 인류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더욱 구체적으로는 우리가 늘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진정으로 말이 통하는 새로운 날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한 시작이란 곧 ‘성령강림’을 오늘 우리들 안에서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천적으로 가정에서, 사회에서, 나라 안에서, 남북한 사이에서 그리고 전 세계로 향하여 우리의 그러한 그리스도 부활의 체험을 인류 공동의 것으로 실현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강림대축일의 메시지는 말이 통하는 길에 앞서 마음이 통하는 길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것


그것은 오순절 성령 체험으로 사도들이 자기들의 말이 아니라 듣는 사람들의 말로 말을 한 것처럼(사도 2, 4. 8. 11 참조), 이제는 말이 통하는 길(言路)에 앞서 마음이 통하는 길(心路)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는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의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모두가 각자의 말이 아니라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사도 4, 32 참조) 모두가 서로 알아듣는 말을 하는 사이가 되어야겠습니다. 나의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말을 내가 할 줄 알아야 인류의 새 세상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다음과 같은 화답의 노래를 부릅니다.

 

“주님, 당신 숨을 보내시어 온 누리의 얼굴을 새롭게 하소서.”(오늘미사의 화답송)


원문출처: 하부내포성지 Daum 카페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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