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 이냐시오의 한국 천주 교회사(史)


고려대 명예교수 조광 이냐시오

2014-1-11 가톨릭대 진리관 3층 강당



역사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며 사건에 관한 기록


역사의 의미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란 뜻이다. 그래서 일어난 일들 위주로 지칭된다. 두 번째로 역사는 사건에 관한 기록이다. 이미 일어난 일이라고 해도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기록이 있어야 한다. 사건 그 자체만은 역사가 될 수 없으니 기록이 곧 역사라는 의견이 있다. 두 개 다 맞겠다.


역사는 기록 배후의 숨은 뜻이다


세 번째로 역사는 기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록을 가지고 기록의 배후에 숨은 뜻을 찾는 것일 수 있겠다. 기록의 이면에 숨은 뜻. 그런 기록이 나타나게 된, 사건이 나타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인과론적 의미에서 사건을 분석하고 파헤치는 작업이 역사이다. 


역사는 인과관계를 보는 것이다


우연적인 일이라도 결코 우연처럼 보여도 우연이 아니고, 그것이 등장할 때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그래서 그 사건의 원인이 무엇인지 파헤치는 것, 일정한 역사관을 가지고 과거 사건을 분석하게 된다. 인과관계를 보려고 하는 데 그것이 역사라고 한다. 사건이라는 것은 역사를 이루는 데 기본적이지만, 사건만 가지고는 역사가 될 수 없다. 


사건만 가지고는 역사가 될 수 없다


사건에다가 인과관계를 분석하고 의미를 캐는 ‘해석’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즉, 적어도 사건과 해석이 포함되어야 역사가 된다는 것이다. 초간단 정의는 사건과 해석 두가지의 결합이다.


초간단 정의. 역사는 사건+ 해석


흔히 과거에는 사건만을 역사로 파악해서 아마추어들도 누구나 역사를 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많은 사료 중에서 몇 년 몇 월 몇 일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뽑으면 역사가 되었고, 한국 천주교회사도 그런 책들이 있다. 그런데 해석이 반드시 따라야 역사가 된다. 사건의 해석이 더해져야 올바른 역사가 되고 역사의 의미를 규정하게 되는 것이다. 해석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즉, 연대기만 정리한 것이 결코 역사가 될 수는 없는 것. 바로 이 작업에서 전문적 역사가와 아마추어적 역사서술이 구별되는 것이다.


서울 가톨릭대학 진리관 3층 강당에서 오후 4교시(45분*4회) 특강으로 진행된 조광 이냐시오 고려대 명예교수님의 「한국천주교회사」특강, 2014년 1월 11일(토) 오후 1시 43분 촬영.


모든 사건이 역사인 것은 아니다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기본적인 게 사건이라고 했는데, 모든 사건이 역사라면 그것은 아니다. 역사는 인간의 의지가 작용되어 이뤄진 게 역사이다. 풀어서 말하면, 지구가 태어난 다음에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은 무수한 변화를 겪었다. 그 과정에서 자연재해, 생물의 진화, 지진, 해양 조류가 바뀌고, 기온 높아지고 북극 얼음이 녹고 그것은 인간 의지와 상관이 없다고 볼 때, 자연계의 변화는 일단 역사에서 제외를 시킨다. 


인간의 의지가 작용되어 일어난 사건들. 인간이 저질러놓은 사건. 의지를 가지고 진행시킨 사건을 역사라고 한다. 그래서 같은 자연계의 변화. 지구 온난화의 문제는 역사학의 연구대상이 아니고, 온난화 문제가 우리 삶에 대비되어 삶의 양식이 변한다면 역사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 살고 있는 현재는 자꾸 변한다. 어거스틴이 한 말. 오늘을 기준으로 어제는 과거. 내일은 우리의 미래가 된다. 오늘이라고 하는 현재의 시점은 언제나 변하기 마련이다 불변하는 과거의 사건과 변화하는 현재의 입장에서 과거의 사건을 논하는 것.


해석은 자꾸 바뀐다


과거의 사건을 밝히고 해석하는 것은 변화하는 오늘에 따라 달리 해석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만적의 난. 최충헌의 노비. 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나? 우리가 우리 주인을 죽이면 우리가 바로 왕후이고 장상이 될 수 있다. 만적의 난이 처음 역사 기록 남은 것은 15세기 초의 고려사, 「고려사 절요」에 남아있다. 사건이 생긴 고려 시대에도 달리 기록되었다가 하나의 역사책으로 15세기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만적의 난 - 1198년(신종 1년) 고려 무신 집권기에 최충헌의 노비 만적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노비 해방운동이다. 무신정변은 문무의 지위를 바꾸었고 신분 질서의 급격한 변동을 초래했다. 특히 하층 계급에서도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계급 이동이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특히 명종·신종 대에는 농민과 노비의 반란이 전국적으로 일어났고, 그 중 가장 규모가 크고, 목적이 뚜렷한 게 만적의 난이었다. 만적은 최충헌의 사노비였는데, 6명의 노예와 함께 개경 북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공사노비들을 모아 놓고 반란을 모의했다. 만적은 정중부의 난 이후 천민과 노예 출신의 공경대부(公卿大夫)가 된 자가 많음을 지적하고, 이렇게 연설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어찌 원래부터 씨가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다. 우리들은 주인 매질 밑에서 근골(筋骨)의 고통만을 당할 수는 없다. 최충헌을 비롯하여 각기 자기 상전을 죽이고 노예의 문적(文籍)을 불질러, 우리 나라로 하여금 노예가 없는 곳으로 만들면 우리도 공경대부 같은 높은 벼슬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그리하여 만적은 계획적인 반란을 꾀하여 궐기 방법을 정하고, 반란이 성공한 후에는 자기들이 집권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만적의 연설을 듣던 한충유(韓忠愈)의 노비 순정(順貞)은 망설이다 이 사실을 주인에게 밀고하면서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었다. 만적을 비롯하여 난에 가담하려 했던 공사노비 백여 명은 붙잡혀서 포대 자루에 넣어진 채 묶여 강물에 던져졌다.



노비 만적을 바라보는 시대적 관점


15세기의 현재적 관점에서 13세기 만적의 난을 바라본 관점은 충(忠), 역(逆)의 논리였다. 만적과 같은 역적이 다시는 나와서는 안된다는 반면교사로 만적을 등장시킨 것이다. 오늘날 우리 21세기에 살고 있는데, 21세기 역사학자들은 어떻게 보는가? 만적은 인간이면서 노비. 그 당시 불합리한 신분제를 극복하려고 투쟁하다 죽은 사람. 만적은 근대의 가장 중요한 평등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한 모범적 인물이 되는 것이다. 


만적의 사건은 단 한번이지만, 15세기 시점과 21세기 시점이 다 다르니, 역적이 되기도 하고 위대한 영웅이 되기도 한다. 이 점은 교회사도 마찬가지다. 교회신학이 바뀌면서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건과 인물을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고, 조금 긍정하던 사람을 더 집중해서 부각해서 보는 경우도 있다. 현재의 시점은 언제나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올바른 시각을 가지고 역사를 보아야 할 것이다.


과거를 보면서 앞으로 나간다


그러면 왜 역사를 해야 하는가? 단순한 지적 만족감을 위해서? 우리는 과거 역사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처해있는 현 시점을 정확히 파악.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바로 잡게 되는 것이다. 지금 내 나이가 내일 모레면 70인데, 내 인생을 가만히 돌아보면 여러 경험이 많았다. 내가 비즈니스를 한다고 가정을 해본다면, 어떤 때는 성공으로 재미를 보았고, 어떤 때는 실패로 낙담을 했는지, 자신의 경험을 되풀이할 것이다. 그렇게 반추된 경험으로 어떨 때는 성공하고, 또 어떨 때는 망했는가를 반추하게 된다.


역사는 간략히 정의하면, 과거 사건이나 기록들이고, 이 사건과 기록에 대한 해석 자체이다. 그리고 해석의 기준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니, 현재의 시대정신, 세계관 등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15세기와 21세기를 비교하며 만적의 난 해석이 발전한 것을 언급했는데, 역사는 발전인가 순환인가? 19세기 말엽, 제국주의 말엽과 매우 흡사한 현재 구한말. 주변 중국, 일본, 러시아와 미국이 한국을 압박한다고 곧잘 신문에서 보도를 하고 있다. 


역사는 발전인가 순환인가?


한국은 뭔가? 지리적 개념 외에 문화적 전통까지 포함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문화, 한국 사회, 한국 역사를 포괄하는 것인데, 한국천주교회사도 한국역사를 떠나서 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의 창설과 새로운 문화의 출현



유럽과 접촉을 시작한 것은 16세기경


창설 배경부터 논하는 데, 언제 교회 창설되었는가? 우리나라가 유럽과 접촉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16세기 말엽이다. 임진왜란 직전에도 조선에 유럽인들이 도착했다는 것은 최근에 밝혀진 것들이기도 하다. 아무튼 임진왜란 계기로 세스페데스 신부가 한국인들에게도 세례를 줬다고 하지만, 그레고리오 세스페데스는 관계가 없는 사람으로 봐야겠다. 한국에 오게 된 연유가 고니시 유키나가와 온 군인들을 돌보려고 했던 것이고, 포로로 잡은 이들에게 세례를 주고 일본으로 끌고 간 것이니 한국 내 교회사 전개와는 무관한 것이다.


임진왜란 때 들어온 세스페데스는 별 관련이 없다


한국에 와서 교회가 세워졌다는 건 전혀 한국교회사의 기원과 관련 및 근거가 없다. 그 후에도 유럽인 선교사의 선교 시도가 계속 되었지만, 성공한 것은 없다. 또한 임진왜란 때 많은 조선인들 잡혀갔는데, 일본에서 세례 받고, 일본의 복자 품에 오른 이들도 있다. 그들이 과연 한국 교회와 무관한 건가? 역시 무관하다고 봐야 한다. 일본 땅에서 세례 받고, 일본에서 활동하다 목숨을 하느님께 봉헌한 일본 교회사의 일부인 것이다. 그런데 16세기~17세기, 특히 17세기 전반기 후반기 이 기간 동안 유럽인 선교사들은 한국 문을 두드리며 한국 입국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사명당이 일본에서 데려온 조선인 포로 중에 천주교인이 있었다?


중요사건은 사명당이 일본을 가서 잡혀간 조선인 포로를 데리고 온다. 그들 중에도 일본에서 세례 받고 크리스천으로 활동한 사람은 있겠지만, 단 하나의 흔적도 남겨놓지 않는다. 일본에서 너무 많은 세례를 받으니 교리문답책을 간행한 기록도 나오지만, 그게 남아있지도 않고, 조선 세례인 중 일부는 사명당이 데리고 올 수 있었을지라도, 한국땅에서 신앙을 영위하고 계속 한 경우가 전혀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Konishi Yukinaga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558 ~ 1600,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일본 상인 출신의 무장이며 정치가로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끼던 장수였다. 당시 대조선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의 장인이자 가토 기요마사와 앙숙 관계였다. 그의 종교는 천주교였으며, 그의 부장이자 사위인 소 요시토시를 비롯한 그의 휘하 책사를 포함하여 병사들 역시 천주교인으로 구성되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こにし ゆきなが)란 사람

본이 임진왜란 시절 크리스천 영주였던 <고니시 유키나가>란 사람이 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치면서 불교 영주와 기독교 영주에게 진격 경쟁을 시켰다. 서쪽과 동쪽을 맡겼다. 크리스찬 다이묘인 고니시가 그레고리오 세스페데스를 불러올 정도이니 그 휘하에 신자들이 많았을 것이에도, 아무런 증거가 남지 않는다. 그래서 임진왜란과 천주교는 성립이 안된다.


또한 마태오 리치, 아담 샬 등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관심에 그쳐버린 것이었다. 그러면 조선에서 신앙의 씨앗이 떨어지고, 그것이 조선 역사현장에서 언제 작용했는가? 진정한 교회의 창설, 교회의 성립을 논하는 그런 조선에서 알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직후 17세기 초엽부터 존재를 알았다.


임진왜란 직후 17세기 초엽


일본 그리스도교 계통 소식이나 서적 등이 들어오고, 덕천 막부(에도 막부 江戶幕府 혹은 도쿠가와 막부 徳川幕府)에서 탄압하면서 혹시 조선으로 도망친 일본인을 잡아보내라는 정도로 반역이미지가 있었다. 인조 효종 전반에 실제 일본의 박해를 피해서 어디론가 피해 가다가 조선에 도착한 사람을 심문해보니, 그 중 하나가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일본으로 압송시킨 경우도 있다. 일본 막부의 요청으로 그런 것인데, 그렇게 매끄러운 관계는 아니었다. 


도쿠가와 막부(徳川幕府)는 일본사에서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에 이어 일본사에 3번째로 나타난 최후 막부이다. 1603년 3월 24일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征夷大将軍 세이이타이쇼군)에 취임하고 막부를 창설하였을 때부터 시작되어, 1867년 11월 9일에 15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大政奉還)이라는 이름으로 정권을 천황에게 넘기게 된 것으로 막을 내렸다. 도쿠가와 가문의 쇼군들이 일본을 지배한 이 264년간의 시기를 에도 시대 또는 도쿠가와 시대라 한다.



1784년을 주목한다


그런데 우리는 한국 교회가 언제 세워졌느냐 할 때 1784년을 주목한다. 1784년의 의견은 교회의 이념과 관련하여 그렇다. 교회란 무엇인가? 내 자신이 교회다. 개개인이 교회라고도 하지만, 그리스도교 세례를 통해서 결속된 신앙 공동체를 교회라고 하는 게 보편적이다. 그래서 세례받은 공동체를 교회의 기점으로 봐야 겠다.


중국(淸)과의 지식격차는 3~4개월


처음으로 받은 사람은 조선인들이 일본에서 세례를 받은 것이다. 또한 중국에 건너가서 받은 기록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끝났고, 공동체를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1784년, 즉 18세기 후반이다. 우리 사회가 이제 변화발전이 막 일어나는 시대이다. 그런 과정에서 문화 분야에서까지도 새로운 문화를 찾아보려는 움직임을 전후로 우리나라 최 일급 지성들이 천주교 책을 보기 시작한다. 그 당시 천주교 책은 주로 북경에서 간행했다. 북경과 우리는 일년에 서너차례 왕래를 한다. 북경 유리창 거리에 사신이 책을 다 사서 오니, 지식격차는 3~4개월이라고 볼 수 있다. 신간서적을 부지런히 모으고 보고 비판했고 그 과정에서 한문 간행 중국계통 교회 서적들을 대거 사오게 된 것이다.


이편(理篇)과 기편(器篇)


당시 서양 선교사들이 쓴 책은 2종류였다. 하나는 이편(理篇) 이고, 하나는 기편(器篇)이었다. 중국은 주로 기편(器篇), 즉 자연과학을 매개로 선교를 하려고 했다. 당시 중국은 세계 최강국가인데, 중국을 보고 놀란 선교사들은 오랑캐 취급을 당할까 두려워하며, 오랑캐 지식 안 당하려고 대등하게 얘기하려는 차원에서 그 당시 지리상의 발견시대로 서양 근대사회에서는 차츰 자연과학이 기초를 다져서 일어나고 있었다. 가장 최신의 자연과학 이론을 중국에 소개하는 것이며, 그것을 중국 학자들이 볼 때는 신통하 얘기이니 인정을 하고, 선교사들을 인정했다. 그냥 교류만 했다면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중국이 생각하는 이적들처럼, 다 굴복하는 주변 오랑캐의 하나로 인정했을 수도 있다. 자연과학을 방패로, 선교사들이 내세웠던 것은 야만인 취급을 안 당하고 지식인 취급을 당하면서 선교하려는 그들 나름의 수단이었다.


한문 교리를 펴낸 마태오 리치


그러면서 중국어, 한문으로 교리를 저술했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마태오리치이다. 이탈리아의 선교사였고, 예수회 계통으로, 상당히 뛰어난 인물이었다. 이탈리아 아카데미 학술원 회원까지 했던 인물로,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어를 완전히 마스터하고 사서삼경을 다 외운다. 이 때 마태오리치가 구사한 것이 과거 희랍시대 기억술이란 게 있다. 물건 한번 쳐다보고 다 기억하는 사람. 단순 기억력이 아니라 연상작용이다. 마태오 리치는 그 기억술을 가지고 중국어를 배운 것으로 보인다. 서경을 줄줄 외우니 한번은 중국 선비들이 이건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다. 자신들도 못하는 걸 하니. 마태오 리치 장난끼 동해서 "거꾸로도 외운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것은 희랍(그리스) 시대 때 확립되고 이탈리아 시대에 정립된 기억술을 이용해서 중국 사서를 외운 것이다. 그리고 그의 「천주실의 天主實義가 조선에 전파된다. 17세기를 거쳐서 이것은 17세기 초엽의 책인데, 17세기 후반에 우리나라 사상계의 변화가 온다.


조선 사상계의 변화


조선을 지배하던 성리학의 여러 문제점을 목격하고 바꾸어보려던 청년 지식인 집단들이 서학(西學)을 가지고 공부를 하려고 했다. 바로 이들이 당시 실학이라는 분위기에 같이 놓여있었다. 이 천주교에 관심가진 지식인 집단은 성리학을 원시유학으로 돌리자는 것이고, 그것으로 사회질서 세우고 나라를 다스리자는 것으로, 조선왕조는 남송 주희 단계의 성리학으로 철학적 국가 체계를 세운 나라였는데, 이러한 나라는 조선이 유일했다. 철학자들이 철학을 가지고 조선 왕조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되니까 공자 맹자로 돌아가자라고 한 것이다. 이런 지적 풍토와 중국 천주 실의에서 논한 풍토는 매우 비슷했다. 마태오 리치가 중국에 와서 보니, 하느님 존재를 설명할 길이 없었는데, 유학을 보니, 공자와 맹자의 이론에서 하늘 천(天)이란 존재가 아주 인격적 존재로 화도 내고 인간을 도와주고 심판하고, 그런 인격적 존재이므로, 원초 유학에 기초를 둬서, 이제 천주교 교리 설명하는 것이었다.


유학과 천주교는 결코 다른 게 아니다.


완전하게 만들어 주는 보유론(補儒論)을 마태오 리치는 제시했다. 보유론이 바라보는 유학은 원초유학이다. 우리나라 실학자들도 17세기 후반부 비판적 지성들은 성리학보다 그 원래의 원전 원초 유학으로 돌아가자는 분위기가 있었고, 그게 딱 맞아 떨어진 것이다. 즉「천주실의 天主實義도 유학을 설명하는 하나의 책으로 이해하고 읽기 시작하면서 또 차이가 있다는 걸 깨닫고 새로운 종교운동으로 뛰어들게 되는 것이다. 


청년 지식인들이 이러한 과정에서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받고 돌아온다. 북경 세례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돌아와서 이벽에게 서울 수표교의 이벽의 집에서 세례를 준다. 그게 설립 시초의 장면이다. 이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이 몇몇에도 천주교 공부하고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세례로 결속된 집단은 아니다. 일반론적으로 교회를 얘기할 때 필요충분조건을 채울 수는 없는 것이다. 보유론(補儒論)을 매개로 천주교에 접근하고 그들이 당시 시대상황과 조선 시대상황과 맞아떨어져 신앙공동체가 조선에서 자발적으로 결성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한국 천주교의 성립은 기적이다


한국 천주교는 외부 도움없이 스스로 교회이루었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사실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보면 역사적인 기적으로, 구베아 주교가 기적적으로 교회가 성립이 되었다고 말한다. 조선인 청년 하나가 세례를 받고 갔는데 얼마 후 1천명 좀 더 있다가 4천명으로 늘어나니 이건 기적이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그 당시 원초 유학에 접근하던 풍조 등 조건이 천주교가 뿌리를 내릴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의해 세례받았던 그들이 아무 영향을 못끼쳤지만, 조선 후기에 궁합이 맞는 사회적 조건이 교회 창설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한다.


순식간에 신자가 1천명이 되고, 다시 4천명으로 늘었다


교회를 이끌어나가야 하는 신자가 4천명까지 되는 대단한 변화 속에서 임시 성직제도. 평신도 성직수행 이것을 가성직제도. ‘가’는 가짜보다 임시라는 뜻이다. 상해가정부는 상해임시정부와 비슷한 것처럼. 물론 교회법으로는 불법이지만 미사도 지내고 고해성사도 평신도 신부들이 받고, 미사를 지낼 때는 얼굴에 하얀 회칠을 했는데, 얼굴 하얀 신부가 미사를 지내니 그런 게 아니었을까 철저히 모방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유항검이 궁금해한 신품성사와 조상 제사문제


유항검이 책을 읽다 보니, 신부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는. 신품성사를 받아야 한다는. 또한 조상 제사문제가 걸리는 데, 조상 제사를 받든다는 것 자체를 보유론(補儒論) 입장에서는 조상 제사는 중국의 미풍양속으로 보고 인정했었는데, 예수회가 그렇게 퍼져나갔는데, 그 대를 이어 중국으로 들어온 후발주자 단체들이 (도미니코, 프란치스코 수도회 등)  유학의 해석에서 자신의 차이점을 두려고 했다.


1740년 교황청의 최종결론 - 제사는 불법


마태오 리치는 중국의 천관이 인격신이었다는 접근으로 보유론을 제시했으나, 후발주자로 들어온 이들은 그 당시 중국에서 당시하던 개신유학을 본다. 상당히 유물론적 경향도 있고, 신적 존재에 대해 관심도 없고 하는 걸 보면서 선진 유학에 기초했던 예수회적 해석과 당시 개신유학에 입각해서 유교를 해석하는 건 차이가 나서, 조상숭배를 미신으로 지적해서 굉장히 복잡한 전례 논쟁 끝에, 1740년 교황청에서 최종적으로 조상제사는 불법이라고 판단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걸 몰랐다. 유항검이 보니까 조상제사도 불법이란 걸 보고, 모여서 회의를 한다. 이렇게 미사 지내고 하는 게 불법이라는데, 조상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북경으로 사신을 파견하자고 제안한다. 그래서 북경으로 윤휴일을 보낸다.


북경 구베아 주교는 윤휴일에게 뭐라고 했나


북경 구베아 주교가 윤휴일에게 안된다고 하자, 윤휴일이 효심의 표현이라고 하면서 중국과의 차이를 말하지만, 우린 조상지사를 사대봉사라고 해서 양반들이 지냈다. 부-조-증조까지 제사를 모신다. 모이는 사람들은 8촌친 공동체라고 한다. 당내친은 8친이다. 제사를 같이 받는 사람들이다. 대진이라고 해서, 내가 아버지의 자리로 올라가 제사를 지내면 나의 친족. 양반들이 그 당시 자기 결속을 다지고 양반중심 사회를 이끌어나가던 게 제사였고, 중국과는 좀 다른 상황이었다. 그래서 조상제사를 그렇게 효심의 표현이라고 윤휴일은 주장하지만 거부 당하고, 모르고 했기 때문에 죄는 없다고 했지만, 야단이 났다. 조상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했는데, 신분의 상징(Status Symbol)인 제사를 포기하면 아무리 가난해도 제사 지낸 것은 신분유지를 위한 것이었는데, 대부분 양반 지식인들은 원래의 유교 질서로 돌아간다. 우리의 효심의 표현을 못하는 건 안된다. 그래서 천주교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아주 혁신적인 인물들. 유교와 천주교를 완전 구별해서 천주교 신앙 만이 구원이 된다는 개혁적 인물들. 정약전, 황상영 등이 남는 것이다.


양반들이 유교로 돌아간 까닭, Status Symbol


권철신의 기록을 보면, 결국은 이리 저리 제사 궁리를 하다가 안되니 유교로 돌아간다. 청년 지식운동으로 출발하여 종교운동으로 향한 평균 20대 후반 이벽, 이승훈 등 이 청년 지식인들이 새롭게 사회를 바꾸려는 기백과 노력이 있었다. 이 청년 지식인집단에서 제사 문제로 갈려서 몇몇 사람만 남은 사람 그 중에서도 제사 부담 없는 중인과 평민 등으로 신분이 떨어진다. 교회 지도자 이름을 보면, 최거두금(崔巨斗金)란 지도자의 이름 최 구두쇠인데 이렇게 쓴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순교자는 2,000명이다


예전에는 60박자로 연대를 다 알았다. 갑자을축 꼽아서. 그 당시에는 간지로 얘기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우리에게는 외우는 데 더 쉬운 연도를 쓰고 있다. 그런데 그런 시대에 왜 두 번 외우는 수고를 하는 지 모르겠다. (굳이, '기해박해', '병인박해', '병오박해'란 표현을 써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제기) 그래서 저는 기해, 병인, 병오 이런 용어 안쓰고, 1791년 박해 이런 식으로 쓰고 싶어한다.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한 해가 그 당시이다 1801년, 1839년, 1846년, 1866년 등등 여러 박해와 많은 신자들 순교자들 숫자는 하느님만 아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기록은 철저하다. 그렇게 기록에 남은 이들은 약 2천명 정도 된다. 그 당시 순교자들의 거의 대부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데 시대에 따라 들쑥날쑥해서 구한말에 5만명이 죽었다고 한다. 1866년 박해 때 고종때 전체 신자가 2만명이었는데, 뻥이다. 그게 또 2만이라고 하다가 1만명으로 줄었다. 중요한 것은 양적인 현상이 아니라 질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1만명 2만명 그것도 감안해야지만, 왜 죽었는지 그 의미를 물어야 할 것이다.


순교의 양적 현상보다 질적 의미를 물어야


가장 유명한 순교자는 이차돈이다. 단 한명만 죽었다. 그는 불교적 구원을 우리나라 신라 사람들에게 가져다 주었다. 구원을 가져다 준 인물이다. 순교는 양적으로는 단 하나. 천주교와 비교 안되지만, 질적으로 대단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러나 죽은 이는 말이 없다. 질적 측면에서 그걸 부각시키려는 게 아니고, 설화가 있는데, 질적으로 순교의 의미를 곰씹고 밝히는 자들은 그 제자들이 그 의미를 밝혀서 신라인들에게 불교적 의미를 가져다 준 것이다.


순교자 숫자 부풀리기도 현대의 물량주의적 병폐


우리는 순교자 5만명, 2만명, 1만명 얘기하면서 그 의미를 진정으로 생각해보았는가? 그것이 우리 민족에게 그리스도교적 구원을 가져다주었는가? 그 순교자 늘릴려고 하는 것은 물량주의적 현대의 병폐에 천주교도 물든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기록이 없으면 역사도 없다. 기록에는 2천명으로 나와있다고 얘기하는 게 솔직한 것이다. 자신의 믿음 때문에 그렇게 죽었다고 하는 것. 그 외에도 의미를 캐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성인 103명이다. 또 124명이다. 그래서 237명이다. 이 성인 숫자 늘리는 데 관심 늘리는 데 거기 관심 보다는 성인의 삶. 그들이 어떻게 살고, 민족을 위해 이웃을 위해 어떤 사랑을 실천했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그래야지 제대로 순교의 의미를 캘 수 있다.


과거 순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 이제는 '사랑'


그러나 오늘날 순교의 기준이 바뀌었다. 바로 '사랑'이다. 과거에는 개신교 신자들 천주교 성인이나 복자와 무관했다. 그런데 1990년대 독일에서는 루터교 신자 3명이 천주교 복자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 강제수용소에서 이웃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친 분들이다. 같이 그리스도교적 사랑을 실천했다고 해서. 천주교에서 그들을 복자로 만드는 게 오늘날 신학이다. 그러므로 순교의 의미 과거에는 믿음이지만, 그 믿음이 무엇인가? 실천없는 믿음은 무가치하다고 성경에서 얘기하고 있는데, 그들이 살았을 때 어떻게 살았고 사랑을 위하여 무슨 공헌과 실천을 했는지 찾아야 한다. 순교자를 질적으로 찾아본다면, 그 순교자를 우리 벗으로 내가 받들 수 있는 구체적 사랑의 행동을 배우는 사람으로 인식을 할 것이다.


순교의 의미를 제대로 못 밝힌 오늘날 현실


그런데 예전처럼 믿음만 강조한다면, 순교자에 대한 재 해석이 제대로 안된다. 우리 교회는 신자 500만이 넘고, 전체 인구 10%가 넘어가고 여러 자랑이 많다. 그런데 순교의 의미 제대로 밝히지 못한 게 오늘날 현실이다. 그들의 믿음살이가 어땠고 살림살이 구별하지 말고 같이 찾아보고, 이웃과 가족에게 실천했던 구체적 내용을 알아보려고 할 때 순교자에 대한 해석은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이 점이 없다면 순교자를 잘 받든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조선의 책의 나라였고 기록의 나라였다


신앙도 중요하지만, 구체적 증거인 사랑을 빼놓고 신앙을 얘기하는 건 상당히 부족한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2천명 플러스 알파의 많은 순교자들이 있다고 보는 게 적합하다. 기껏 2천명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플러스 알파라고 했는데, 2천명이 적은 게 아니다. 조선시대 최대의 사건이 천주교 사건이다. 대원군 때 마구 목을 베어 기록이 안남았다는 건 선참후계(先斬後啓)란 내용을 모르는 거다. 천주교신자는 무조건 죽일 수 있으니, 죽이고 나서 보고하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보고기록은 매우 철저하다. 조선은 책의 나라라고 애기한 사람도 있다. 그런데 그 많은 기록 중에 우린 찾아낼 수 있다. 그런데 근거없이 1만명, 2만명 이런 건 아닌 것. 박해시대를 다시금 생각해봐야 하는 것




내가 신부다


다시 서울로 온 주문모는 포도청에 자수한다. "내가 신부다." 주문모는 상당한 신학적 지식을 갖춘 분이었다. 조선에 와서 조선의 교리 체계 내지 신학에 대한 이해를 집약했다고 본다. 주교요지(主敎要旨)라고 정약종이 쓴 한글로 된 책이 있는데, 그걸 주문모 신부님이 극구 칭찬한다. 그리고 조선에서 회장 자리에 대해 말하자면, 여성도 회장으로 강완숙, 정순매 등 여 회장 그 당시 역할이 남녀가 같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정약종(1760-1801)은 한국 초기 천주교회사에서 가장 뛰어난 신심을 가진 학자였고, 한문을 읽지 못하는 하층민 천주교인을 위해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썼다.



양반 이외 다른 신분층에 대해서도 신분을 기준을 생각하는 게 아니고, 신앙을 중심으로 박해시대 때 그들 사상이 막 바뀌어나간 것으로 봐야 하는데, 이러한 것들에 대해 박해시대 중앙정부의 두려움은 신분질서를 무시하는 것이었다. 하느님 아래 모두 평등하다는 천주교 주장에 대해서, 신분질서를 무시하는 천주교가 들어가면 노비나 그 주인이나 평등해지고, 엉망이 되고, 그러면 조선왕조 미풍양속 헤치는 것이라는 게 박해의 논리였던 것이다.


유교가 곧 정치였던 사회, Political Religion


게다가 조선왕조는 또한 정교분리 경험이 없는 사회이고, 유교가 곧 정치이다. political religion이 바로 성리학이다. 조선에서 천주교가 '우린 종교만 갖게 해달라, 정치는 없다.'라는 정교분리적 주장이 먹혀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정교분리의 체험이 없는 사회였기에 정치범으로 몰았고, 국왕에 대역, 불충 불효한 죄인들로 몰았다. 


천주교에서 보는 인간과 창조론에 대한 감동


하느님이란 존재로부터 무에서 유가 생긴다는 게 확실하다는 것. 창조주 하느님을 기초로 피조된 인간에 대한 인식이 나온다. 창조를 받은 피조된 인간. 하느님 입장에서 내가 만든 존재들이니 내 아들이요 딸이다. 인간에서 인간을 보면 하느님을 다 부모로 모신 너와 난 다 평등하다. 당시 조선왕조는 지극히 불평등한 사회였다. 임금도 피조된 인간이 되는 상황이다. 


선비가 평생 쓴 글 모은 게 문집이다. 그런 전집 가진 사람 몇 십명 가진 나라가 우리 나라이다. 그리고 천주교 신자의 주류는 별볼일없는 무식쟁이들, 버러지같은 존재들. 낮추어 부르는 그런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인간에 대한 각성을 가지고 우리 사회를 바꾸어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 후기 역사발전에 기여를 한다. 오늘날 우리들 모두가 투표를 한표 행사하는 게 평등한 사회여서 그런 것이다.


우리나라에 두 번째로 입국한 중국인 신부, 유방제


유방제는 조선 변성명이고, 여항덕(余恒德)이 원명인데, 지식에 대단한 분이었다. 그는 파리 외방전교회가 조선교구를 설정하고 교구가 세워진다고 하니, 자원을 한 분이고, 외방전교회에서 조선 교구장으로 지원하는 브뤼기에르 주교 편지가 있다. 시중에서 브뤼기에르 주교 편지로 번역된 게 있다. 아주 감격적이다. 조선에서 간절히 원하는 데 나라도 지원하겠다라고. 우리나라 교회사에서 100대 문헌 중 브뤼기에르 편지를 그 안에 넣고 싶다. 



유방제(劉方濟). 본명 여항덕(余恒德)

주문모에 이어 두번째로 들어온 신부이며 중국인이다. 세례명은 파치피코. 유방제 신부는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위장하여 조선이 입국하려고 조선식 성명을 만들었다. 그 중에서 성은 여(余.Yu)의 중국식 발음과 유사한 유(劉. Liu)를 택했다. 1834년 1월 조선에 입국하였고, 초대 주교 브뤼기에르의 조선 입국을 방해했다고 한다.



바르텔르미 브뤼기에르, 한국성 소(蘇)


브뤼기에르.(프랑스어: Barthélemy Bruguiére, 1792년 2월 12일 - 1835년 10월 20일)는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이자 천주교 조선교구의 초대 교구장(카프사의 명의 주교)였다. 1815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1825년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타이로 파견되어 그곳의 신학교 교수로 재임하였다. 1828년에는 시암 교구(현재의 방콕 교구)의 부교구장이 되었고, 1831년에 조선 대목구가 설립되었을 때 조선 전교를 자청하여 초대 대목구장에 임명되었다. 브뤼기에르는 이미 1831년에 마카오에서 조선으로의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1832년 주교 임명 소식을 받고 중국을 횡단하여 1835년 10월 19일에는 열하성에 도달하였으나, 뇌일혈로 인해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의 <만주 여행기>는 달레가 쓴 <조선 교회사>라는 책 속에 실려 있다. 브뤼기에르는 입국 직전 내몽골에서 죽는다. 



왼쪽부터 초대 주교 브뤼기에르, 2대 주교 앵베르, 샤스탕 신부


그 다음 조선에는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앵베르 신부 등이 들어와 교회를 이루고 활동을 한다. 이들의 경우, 대단한 신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찌 보면 그 당시 19세기 유럽문화의 영향을 듬뿍 받은 분들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로맨티시즘이 유행이었다. 낭만주의에서 종교성이 재발견되고, 과거 순교에 대한 역사도 재인식되고, 18세기 이성의 시대와 달리 종교적 감수성이 풍부해지고, 선교에 대한 활동이 활발해지만 낭만주의 영향이 은근히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죽을 각오로 온 것이었다


그들은 죽을 각오로 온 것이었다. 고향에 살아서는 안 돌아가기로 한 사람들이다 선교사 최대의 치욕은 선교지를 떠나는 일이다. 자연사이든 순교이든, 그래서 많은 파리외방전교회 들어와 조선에서 상당수가 순교를 하게 된다. 이 순교하는 과정에서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이 일어난다. 이런 용어도 '조미전쟁', 1866년 '조불전쟁' 등으로 번역하는 게 낫다고 본다.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제 조선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제국주의가 점차 다국화되어가고 있었다. 1840년 중국에서 아편전쟁이 일어난다. 중국은 여지없이 깨집니다. 애로우호 사건, 천진조약, 계속 해서 유럽의 식민주의가 중국을 유린 중이었다. 1866년 이 때 개항을 한다. 개항이란 것은 교회사와는 무관하지만 그러나 교회사와 별도라고 해서, 그 관련을 단절시킬 수 없는 일이다. 개항으로 사회가 변하고,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고, 개항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 탄압에서 인정이었다.



1886년 이후, 개항기


제 강의록은 생략된 부분이 눈에 띌 것이다. 일단 박해시대는 다 마쳤고, 개항기로 넘어간다. 우리나라에서 종교, 신앙의 자유 언제 주어졌는냐 얘기를 시작하겠다. 1886년 한불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선과 프랑스의 조약이었다. 이 한불조약을 계기로 천주교 신앙 자유롭게 된다는 게 일반론이다. 그러나 1886년도를 단순하게 신앙의 자유를 얻은 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우리는 이 신앙의 자유에 대해서 단계별로 파악해야 한다. 과거에 목숨을 내걸고 신앙 자유를 위해 싸웠다. 박해 시절의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은 "우린 국가에 해롭지 않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믿는 예수교. 주문모는 야소교 혹은 예수교라고 했다. 천주보다 증거자인 예수그리스도가 신앙 중심이어서 그렇다. 오늘날 예수교는 개신교 신자를 얘기하지만, 주문모는 예수교라고 했다. 


신앙의 자유를 바라보는 단계별 방식


단계별로 보면, ① 순교자 단계에서 ② 두 번째로 조선왕조에서 묵인하는 단계로 1882년이다. 한불조약 이전이다. 1876년 강화도 조약, 1882년 조미수호토앙조약 체결된다. 이 때 오면 서울 붓재. 필동이다. 중구경찰서 있는 곳. 붓재에 1884년 9월 한한학교(école sino-coréen, 漢韓學敎). 에꼴인데. 프랑스어로. 조선이름은 찾을 수 없는데, 일반 신자들도 받아서 교육시킨다. 1884년 원산학사보다 빠르다.(기록자주. 한한학교가 원산학사보다 빠르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확인이 필요) 신자들만 아니라 일반인도 교육시키니, 뮈텔 주교는 일반인 세례도 준다. 도성 안에 세운다는 건 신앙의 자유가 묵인이 되었다는 반증이다. 


1895년 공인의 단계


③ 1895년 공인의 단계. 조선왕조는 임금이 법이다. 이 때 뮈텔 주교가 고종을 알현한다. 1866년 박해에 대해 고종이 유감을 표현한다. 그 때 많은 이들 죽은 거 알고 있다. 실제 내가 국왕이지만 내가 권한 행사하지 못했다는 거 알지 않는가 뭐 이런 식으로 말한다 뮈텔이 아주 감격을 한다. 돌아와서 일기에 쓴 걸 보면, 이로써 공식적인 박해가 끝났다고 말한다. 조선의 전제국가 최고 책임자가 유감을 표하고 잘 지내보자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1895년을 공인의 단계로 본다.


그렇다면 1886년은 무엇인가? 


그럼 1886년은 뭐냐.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의 자유가 억지로 보장된 것이다. 프랑스와 천주교가 뒤늦게 조약체결한 건 종교문제이고 선교사들의 문제였다. 선교사들의 활동 보장을 조약에 넣으려는 프랑스와 그걸 끝까지 거부한 조선왕조. 이 때 서양 종교는 아편과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조미 조약에서도 조선 시안에 아편과 서교를 금지한다고 되어 있다. 서교도 해로운 것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러다가 미국측 반대로 그 조항 빠진 것이다. 프랑스와 조약 맺을 때도 그러했던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 인들이 교회(敎誨)하는 걸 허락한다(프랑스인들이 조선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이미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는 것을 그대로 묵인한 것이다. 1886년 조약에서 프랑스인들은 교회(敎誨)할 수 있지만, 국내법상 조선인들은 교회를 받으면 안되는 거였다. 배울 권리가 없는 게 한불조약이었다. 그래서 자유의 기점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유럽 열강이 우리에게 강요한 불평등조약이다. 군함과 대포로 강요했고, 한불 조약도 우리에게 똑같이 영사재판권 같은 불평등 내용 요구했다. 


그러니까 1886년은 재고해야 한다. 당대 교구장이 이제로부터 우리에게 신앙의 자유가 왔다고 하는데, 교구장 말 안 따르고 있는 것이라면, 종교의 자유를 1895년으로 봐야 하지 않나? 국왕의 말에 의해서 법제화 과정 거친 게 1899년 선교조약이라고 해서 그 당시 뮈텔 주교 시절이었다. 


참고. 한국의 로마 가톨릭 교회 (위키백과)


1884년 선교사들이 땅을 밟은 것인데, 1882년 미국공사관에서는 선교활동을 못하게 했다. 왜. 충돌은 국익에 해롭다는 것이다. 조선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 압록강 중류지역에서 세례를 준다. 개신교에서는 그걸 요단강 세례라고 한다. 중국땅도 아니고 조선땅도 아닌 애매한 지역에서 한 것이다. 우리나라 사상계에서 중요한 변환점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1895년이 된다.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 두 개의 과제가 주어진다. 반 봉건. 구태의연한 풍습 바꾸는 것과, 반 침략. 특히 일본 제국주의가 강하게 조선을 압박하고 있었다. 


조선 민족에게 주어진 두 개의 과제


이 두가지 과제를 가지고 있던 게 개화기 우리의 사정이었다. 그러면 우리 사회와 천주교 관계를 논할 때 그 당시 우리 사회 지햐하던 이 두가지 목표와 천주교가 어떤 관련 맺었는가도 살펴봐야 하겠다. 반봉건에는 적극 찬동하는 천주교이지만, 반 침략은 정치적 문제로 간주한다. 


조선독립 운동에 대한 천주교의 무관심


이 때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에서는 정교분리라고 하는 구태의연한 정책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 여러 해석이 나오지만, 민족주의 운동으로 나라 지키고 하는 건 천주교와 무관한 것으로 보았고, 신자들을 뛰어들지 못하게 막았고, 일본이 학살 자행할 때 거기 저항은 무장저항운동 더 효율적일 수도 있었는데, 1809년 남선 대토벌작전이란 게 있는데, 1년간 전사한 사람이 5~6만명이다. 단순한 폭도이 아니라 본격적 전쟁으로 봐야 한다. 그 과정에서 천주교와 개신교는 오호불관의 자세로 신자들을 훈육


종교적 경향에만 빠져있던 그리스도교 신·구교


1907년 개신교 신자들이 100만 구령운동을 전개한다. 성령강림. 성령기운으로 교회부흥 운동인데, 달리 해석하면, 당시 팽배하던 조선 개신교도들의 근대화를 위한 노력 내지 국권 수호운동 죽여버리고 종교적 경향으로만 이끈 작업이었다고도 얘기한다. 가톨릭에서도 역시 정치에 대한 문제관여 못하게 말리고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안중근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무장투쟁이었다고 본다면, 1907년 국채보상운동 전국적으로 일어나는데, 이건 그 당시 빚을 지고 있었는데 1300만원. 그당시 명동성당이 2만원을 가지고 지었다. 


1907년, 달러와 1대 1이던 시절. 명동성당은 2만원


달러와 1대 1이었다. 어느정도인지 감이 잡히시죠. 그 당시 술담배 끊어서 갚으면 되지 않나 해서 시작을 한다. 사순절 재의 수요일 다음부터 시작 처음 발기 서상돈 같은 대구지역 천주교 신자들. 담배끊고 술끊던 천주교 관습이 그 때도 있었던 것이고, 이걸 일반 사회로 확장시켜 국채도 갚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좀 젊었고, 당시 국채보상운동은 영남의 서상돈이 했다는 대구에서 결셩된 여성회 조직. 천주교 회장 부인들이 만든 것이다. 피를 흘리는 무장투쟁은 아니지만, 나라를 구하는 것이니 뛰어든 것이다. 교회에서도 비무장투쟁이니 인정을 했지만 결과는 그러나 탄압을 받았다. 비교적 꽤많은 260만원 정도 모였다. 국채 보상가지고 자칫하다가 침략이 어려워지니, 그 당시 대구에서 발기된 국채보상신문을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문에서 받아서 횡령으로 집어넣는 등 일본 당국자들이 이를 깨트려버린다. 그 자금은 어디로 갔는지. 천주교는 열심히 모으는데, 한일합방해서 여러분이 낸 돈 어린이 코묻은 돈, 기생 몸 판돈이 다 사라졌다. 


국채보상 운동


국채보상 운동에 반응하여 고종도 담배를 끊고, 동조했다는 기록도 있다. 아주 성공적인 캠페인이었지만, 결과는 실패했다는 것. 이 때 천주교 상황은 어떠했나? 해방 이후 교회사 얘기해야 하지만, 일제시대도 제대로 얘기하지 못했다.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다음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신자들 신문은 최하층으로 떨어져 있었다. 죄인은 노비와 마찬가지 취급받았다. 형조의 죄인문서와 노비문서 같이 보존, 관리된게 조선왕조였다. 천주학을 하는 건 죄인이다. 아무리 양반 출신이라도, 1791년 정조가 천주학을 하는 사람은 불치(이빨치) 선비 무리안에 끼어주지 마라. 그것도 법이다. 천주교 신앙을 하는 한 양반 행세 못하니 천인화되었다.


천민이 되어버린 신자들에게 주어진 신앙의 자유의 풍경들


개항기, 갑오경장 속에서 노비신분 해방의 커다란 변화. 신앙의 자유도 주어지고, 천주교 신자들이 하대를 하지 말고 상존합시다 했다가 노여움을 사게 된다. 집단린치 등 충돌. 맞으면 가만 있나? 사건 커지고, 선교사들에게 일러 바친다. 자기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러면 선교사나 신부님들은 신자들의 사회적 지위가 너무 낮아서 그들 정상화시킬 노력도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강경 같은 곳에서는 양반 쌍놈 찾다가 신자 린치 당하니, 신부가 권총도 쏘는 등 그런 풍경이 있었다. 양반이 신자들을 침탈한다고 해서 선교사가 타고 온 말 꼬리에 상투를 매고 시장통을 돌리곤 했는 데 그건 과한 방법이었다. 적당하지는 않았다. 선교사가 해결못하면 프랑스 주 서울 공사관에서 외교문제로, 선교사 불이익, 그들 따르는 이들도 불이익. 그당시 약해빠진 조선정부는 그걸 따라 하는 수 밖에 없었다. 각종 충돌들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근대 재판제도 들어서서 우리나라에서 시행된 각종 재판 판결문을 모아놓은 사법품보라고 하는데, 교안이 한참 일어날 때 사법품보의 3분의 2가 천주교 교안 사건이었다. 


양대인(洋大人) 자세


양대인자세. 거의 매일 일어난 개항기 때 천주교 인기가 팍 떨어진 이유 중 하나는 이런 양대인 자세에 대한 일반인들의 ‘그러면 안되는 데’하면서 관심 잃고, 개신교로 들어간 것이다. 특히 지식인 집단들이 그런 것이 양대인자세가 너무나 심했다. (교인들의 ‘양대인 자세’(선교사 닮기) - 선교사의 종교와 사상, 문화와 행동 양식을 모방하려는 의식적인, 혹은 무의식적인 행동이 교인 사이에 생겨난 것을 말한다.)


신축교난, 신축민란, 이재수의 난 @제주도


구한말 봉세관(捧稅官)의 조세 수탈과 프랑스 선교사를 앞세운 천주교회의 폐단에 맞선 민중 항쟁이다. 횡포를 부리는 외래 종교인 천주교를 향한 반감과 제주도 경제권을 둘러싼 토호 세력과 중앙에서 파견한 봉세관 간 갈등이 봉기의 원인이다. 사건의 희생자가 너무나 많았고 외래 종교의 횡포에 대한 민중의 반항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또 외국 신부와 관련해 국제 문제로까지 비화되는 후유증을 치러야 했다는 점에서 제주도의 근대사에 여러 모로 중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우리만의 이야기로 천주교를 좋게만 볼 수도 있겠으나, 당시 역사적 줄기로 보면 그렇게 얘기 못한다. 천주교 신앙인들은 억눌렸다가 신분 회복하며 대등한 입장에서 얘기하고 선교도 잘 된다고 하면 되는데, 결국 너무 과도한 일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그 과도한 일들이 제주도에서는 이재수 난의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거기서 몇 백명의 신자가 죽었다. 몇 년 지나서야 묘자리를 봐주었다. 2명의 신부가 제주도에 상주했는데, 그 분들은 난민들에 의해서 약탈당한 포도주 몇 병, 제의 몇 벌에 대한 배상금을 받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돈이 없으니, 제주도 도민들에게 부담시켜서 철저히 받아냈다. 우린 여기서 1900년대 의화단 사건이 중국에서 일어나는데, 의화단들에 의해 선교사 서양인들 많이 다치고 그랬는데, 청국 정부 받아내는데, 미국은 자기 미국인들을 보상을 국가가 보상해주고, 중국이 낸 돈은 거기에 학교 세우고, 병원 세우고 하니, 미국에 대한 인식이 좋아졌다. 프랑스, 영국, 일본은 돈 뜯어갔는데, 미국은 제대로 한다고 보았기에 중국이 친미적 방향으로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황해도의 해서교안


해서교안 海西敎案 (가톨릭 사전의 관련 기록 보기

1902년 정점으로 이를 전후하여 황해도 지방에서 천주교회와 관청 사이에서 빚어진 일련의 충돌 사건을 말한다. 교안은 이미 1886년, 즉 한불조약(韓佛條約)이 체결된 직후부터 발생하였다. 한불조약은 프랑스 선교사에게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였으나 선교의 대상인 한국인에게는 아직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았고, 또한 선교사들에게 개항지(開港地)에서의 정착은 인정하였으나 기타 지방에서의 정착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미 지방에 정착해 있던 선교사들이 적지 않았고 뿐더러 본당의 증설로 인해 선교사의 지방진출이 잦아졌으므로 자연 지방관리와의 충돌이 발생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선교사들은 그 정도 혜안이 없었던 것이다. 황해도에서도 해서 교안이라고 하는 게 있다. 교안은 개항기 천주교 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다. 敎案이라고 하는 것은 천주교 관련 사건 내지 문서 그 사건 기록을 말한다. 이 교안이 도처에서 일어나는 그 상황은 이제 신앙의 자유를 확대시켰다는 점 보다는 오히려 개항기 때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음에도 그 자유의 혜택을 이웃과 원수로 만들게 되어버린 것이다. 


해서교안과 거부(巨富) 안중근 집안


안중근이 황해도 교안이 개입하게 된다. 당시 안중근 가문은 황해도 두 번째 세 번째 거부였다. 상당한 재산가 안태훈이 아버지였고 명망가로 1894년 동학농민혁명아 일어나니, 황해도 동학농민혁명군 진압 책임 의군을 일으켜 막아낸다. 이것을 막아낼 때, 동학농민혁명군들이 정부창고 습격해서 정부미 군량미 삼으려고 할 때, 안태훈 부대가 그 동학군 무찌르고 의군 양식으로 삼았다. 정부에서는 그걸 물어내라고 한다. 정부 것을 너희가 먹었으니 물어내라는 것이었다. 사실 기가 막힐 일이었다.


그 당시 황해도 지역의 선교하던 이는 빌렘(Wilhelm, 홍석구)이란 신부님이었다. 안중근 가문이 그 때 본당으로 숨어든다. 거기서 지내다가 세례 받고 신자가 된다. 안중근 가문 입교과정은 바로 그 과정이고, 안중근은 세례 받고 자기 가족, 친척, 거의 대부분 세례받는다. 안태훈의 장자(長子)는 조상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끝까지 세례를 안받는다. 안중근은 빌렘(홍석구) 신부의 복사가 된다. 당시 복사는 시종이고 비서였으며, 교리교사이기도 하고, 사무장 등을 맡는 직책의 복합 칭호였다. 안중근은 빌렘 신부와 함께 황해도 전체 돌아다니며 선교를 하러 다닌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과 안중근의 망명


1905년 이 때 을사조약 체결되고, 이를 계기로 안중근은 망명을 한다. 일단 중국으로 간다. 몇 년동안 교안이 계속 일어나고 밀렌의 복사였던 안중근도 천주교 대변해서 계속 충돌했으니 그런 복합적 이유가 있었다. 상하이로 간 그는 마침, 휴양차 나와있는 황해도 선교사 곽원양(르각, Le Gac) 신부를 만난다. 청계동 신자였던 그는 활동범위가 넓어 서로 잘 안다. 안중근은 여차저차해서 망명하고자 한다고 하니까, 르 각이 뭐라 했냐면, "너처럼 똑똑한 애들이 밖으로 나오면 누가 조선을 나오느냐. 우선 학교를 일으키고 사회를 일으켜라"고 한다. 여기서 '사회'는 오늘날 사회가 아니라 협회나 단체, Society of Jesus (예수회)가 이런 식이다. 르각 신부 말을 듣고 돌아온 안중근은 돈의학교를 세운다. 진남포 본당 신부가 세운 학교였는데, 제2대 교장으로 들어갔다.  


돈의학교(敦義學校)  (출처. 가톨릭 사전)

평양교구 진남포본당이 운영하던 초등교육 기관으로 1900년에 설립되었다. 초대교장 이평택(파트리치오)을 중심으로 착실하게 성장한 돈의학교는 설립 몇해 만에 평안도에서 손꼽히는 사립학교로 부상하였다. 2대 교장 안중근(安重根, 토마스)을 맞아 더욱 충실하게 성장하였으며 민족운동에 커다란 기여를 하는 전통 있는 학교가 되었다. 1908년 교사를 증축하여 300여명을 교육시키는 커다란 학교로 발전하였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이에 따라 본당주임 르레드(Jules Lereide, 申) 신부가 본국으로 소환되어 가면서 재정난을 이기지 못하고 1916년 폐교되었다. 



돈의학교와 안중근


안중근 자서전에는 그 학교를 창립했다고 자신하는 데, 온 정성을 들였다는 얘기인데, 그 전에 뮈텔이 순시해 영세준 사례가 있다. 교육운동을 하다가, 초등교육이 아니라 대학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빌렘 신부와 대학을 세워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서 뮈텔 주교를 방문하지만, 뮈텔 주교는 지식이 높아지면 신앙이 약해진다는 답변을 하면서 기운이 약해진다. 여기서 프랑스 인들이 가져온 종교는 믿을만해도 프랑스인은 믿을만하지 않다는 것으로 무장운동으로 가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안중근은 그 후에 의병이 되기 위해서 그 당시 직접 부산 배를 타고 원산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갈 계획이었다. 마침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에 원산에서 내릴 때, 그럴 때는 고해영성체를 미덕으로 알고 실천을 한다. 당시 안중근은 원산본당 신부 브레(Bret)에게 가서 고해성사하고 영성체를 모신다. 흥미로운 것은 그 시절에도 선교사(신부) 사이에서 안중근이 누구라는 소문이 다 돌았던 모양이다. 브레는 안에게 너가 하는 것은 정치활동이니 그걸 안그만두면 영성체를 하지 않겠다고 한 것인데, 그것은 실제로 파문인 것이다. 


안중근과 영성체


결국 영성체를 받지 못하고 블라디보스톡까지 가서, 이범윤 밑에서 의군참모중장으로 실제 전투를 한다. 초기 전투는 꽤 성공적으로 진행한다. 일본 군인 2명. 상인 7~8명 포로로 잡는다. 이 포로 어떻게 하느냐 문제로 여러 장졸들과 다툰다. 이 포로는 일본인들이니 다 죽여야 한다. 즉결 처분해야 한다에 끝까지 거부한다. 버티던 안중근. 그러자 휘하의 중간 세력들은 자기들이 데려온 의병들 데리고 떠나버린다. 일본인들을 풀어주는 안중근. 우리가 이렇게 잘 대해주면 그들도 우릴 배신 안한다고 했지만, 하필 그 뒤 야습으로 철저히 당한다. 그들이 부대 가서 불었을 것이다. 안중근이 현실주의자는 아닌 셈이었다. 로맨티스트. 그렇게 뿔뿔이 흩어지고, 의병집단에서 2명의 부하와 3명이 산 속을 헤매며 열이틀 거의 죽게되어 이젠 죽는구나하며 교리를 가르친다. 빌렘 신부 복사로 교리 가르치던 경험을 되살려, 세례를 준다. 


찬밥신세 안중근


그는 두만강 건너서 살아온다. 찬밥신세. 그런 과정에서 이또 히로부미가 하르빈에 온다는 얘기를 드고 제거하려고 한다. 자신을 의군참모중장인 자신의 작전 반경에 들어온 적장을 사살하는 것으로 아이덴티파이했고, 이또를 죽이고 만세를 불렀다. 러시아니까 “어레이 유라”를 부르짖었다고 했는데, 일본 심문관이 묻자 “그렇다. 십자성호를 긋고 대한만세를 불렀다”고 대답했다. 철저히 신자로서 생활한 것이다. 그래서 안중근은 자신 전투행위에서 이토 히로부미 죽인 걸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그 당시 조선교회는 야단이 났다. 안응칠이라는 조선인이 일본 이토 히로부미 공을 사살했다고 나오니, 그 때 그 기사를 보던 통관부 기관지 영자지에 뛰어가서 항의한다. 우리한테는 그런 신자 없다. 너네들이 오보했다. 그러자 그 다음날 안중근의 다른 이름이 안응칠이다. 그러자 땅이 꺼지는 것 같다고 하는 조선교회 탄압에 대한 두려움. 그래서 안중근은 천주교 신자라도 이미 천주교를 떠난 사람이라고 그 의무를 다한 사람이 아니니. 무관한 사람이다라고 주장한 게 뮈텔 주교였던 것이다. 


뮈텔 신부의 냉대


여순감옥에 갇힌 안중근은 고해신부를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우리 본당 빌렘 신부를 보내달라고 하고, 빌렘도  가겠다고 하는데, 뮈텔이 못가게 한다. 빌렘은 고해성사를 받기로 하고 간다. 자신이 세례주었는데 성사를 안받으면 지옥에 간다고 하니. 고해성사를 주고 마지막 미사를 지낸다. 예전에는 신부와 복사가 주고받는 전례문이 다 라틴어였다. 굉장히 긴 것인데, 단 한마디도 틀림없이 대화를 주고 받고 빌렘은 돌아온다. 10여년 만에 복사로 미사를 본 것이다. 


교회 조직을 보호하려는 뮈텔 주교는 전전긍긍


안중근이 죽은 다음 문제가 생겼다. 주교의 명령을 어긴 빌렘 신부가 안중근에게 갔으니 성무 정지처분을 받은 것이다. 성직자에게 미사 지내지 말라는 벌을 내린 것이다. 2개월인가. 빌렘의 입장에서는 좋은 일 해놓고 당한다는 입장이지만 주교 명이라서 따른다. 그 때 프랑스 조선 선교사들이 빌렘을 왕따시킨다. 주교 명령 거슬린 것 외에 빌렘 신부의 독특한 성격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고, 또 이름 빌렘(Willhelm)으로 보면 독일계통이다. 불란서 시민권 늦게 딴 경우다. 보불전쟁 끝난 뒤 뒤늦게 선교사로 나와서 불란서 시민권 그런 문화차이도 작용했을 것이다. 프랑스 농촌 출신 선교사들이 왕따 시킨 게 아닌가. 연판장으로 추방시키고, 파리에서 40km 떨어진 르망에서 보좌신부 노릇하며 파리외방전교회에 매일 편지 보낸다. 1918년 베르사이유 조약 체결 때 김주식 등 몇몇 파리 갈 때 거기서 신문에 낼 때 빌렘의 도움을 받는다. 사촌동생을 데려갔는데, 이태리에서 조선학을 해서 박정희 시대 때 돌아와서 사장도 하다가 불우하게 죽고 그런 일이 있었다. 안중근 조카가...


참고기사. 안중근의 친인척 [조광의 역사의 창, 교회 9] 2008년 11월 29일 (토) 가톨릭뉴스



안중근이 복권된 것은 1946년의 일


안중근 때문에 빌렘이 쫓겨가며, 사촌동생. 우리나라 독일유학 1호. 또 목침 하나를 들고 갔다고 한다. 다들 성격이 만만치 않았던 분들이다. 빌렘이 두들겨패니 안중근은 목침을 집어던졌다고 한다. 바로 그 목침이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으로 안중근은 일제시대 내내 교회 찬밥 언제 다시 복권되는가? 1946년 3월 26이 안중근 기일. 그날 죽었는데, 그 때 노기남 주교가 장례미사 중 가장 큰 걸 지낸다. 대례미사라고 한다. 우리나라를 구한 대표적인 인물로 그 때 교회가 인정해준 것이다. 그 때 안중근의 옥중투쟁기가 경향잡지사. 서울교구 발행하는 거기에서 번역되어 나온다. 옥중투쟁기와 같은 게 번역되고, 대례미사를 지낸 것은 복권이다 그 이후 계속 말이 많았다. 살인자니까 안된다 된다 그러다 김수한 추기경이 다시 1980년인가 다시 언급한다.



서울 가톨릭대학 진리관 3층 강당에서 오후 4교시(45분*4회) 특강으로 진행된 조광 이냐시오 고려대 명예교수님의 「한국천주교회사」특강, 2014년 1월 11일(토) 오후 4시 58분 촬영.



천주교는 해방에 기여한 게 별로 없다


학술회의 참여해서 한 입장이지만, 맨 처음 미사강론 안하겠다고 하다가 설명 죽 듣고, 미사 강론 하겠다고 하며 예정보다 2배 길게 하며, 1980년대 와서 복권된걸로 보는데, 실은 그 이전 해방직후 복권시킨 까닭은 천주교가 해방에 기여한 게 별로 없었다. 그런데 안중근이란 뚜렷한 집안. 건국공로훈장이 12개이다. 그 집안에서만. 그러니까 천주교 독립운동에서는 안중근 빼고 얘기가 안된다. 해방 이후 남한 교회의 체면을 살려주고, 또 떳떳하게 얼굴을 들게 해주었고, 북한과의 통일에도 기여할 것이다. 진남포에도 비석이 있고, 안중근 조카 중 하나는 북한 통일열사 무덤에 묻혀있고, 복잡한 해방 직후 상황을 반영하는 게 안중근이다.


1939년 제사 문제를 해결한 교황청


원래 제사문제는 중국 전례 때문에 금지되었다가 1939년에 이걸 교황청에서 풀어준다. 이제 조상 제사는 부모에 대한 공경이니 그걸 인정한다고 풀어준다. 그렇게 풀어주려면 1740년 1789년 우리나라 윤휴일에게 못하게 했는가 한스럽다. 교황청이 잘못한 것이니 사과해야 한다. 사과하고 우리나라 박해시대 때 불효자로 죽었다. 조상숭배 조상신 우리나라 조상제사는 신을 모시는 게 아니고 조상에 대한 불효이고, 중국과 다르고 교황청 판단의 착오이다. 언젠가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학살시킨 일에 대해서 교황청은 공식 사과를 했다. 사과한다고 위신 떨어지는 게 아니라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교황에게 제사 문제 사과하라고 큰 소리 낼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지만, 이러한 일은 교황청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본다. 교황청에도 체면이 있으니, 여러 가지 조건 내세웠지만, 그건 그 당시 별로 중요하지 않고, 조상에 대한 추념으로 별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1939년 이 제사 문제 해결되어, 우리는 제대로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2014년 1월 11일(토) 오후 5시 01분,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조광 교수의 한국천주교회사 특강]은 2014년 1월 11일(토) 오후, 4시간에 걸쳐 가톨릭대학 진리관 3층 대강당에서 펼쳐진 조광 이냐시오 교수님의 명강의를 정리한 내용이다. 이 특강은 가톨릭 교리신학원 통신신학교육과정의 1단계 1학년 2학기를 마친 학생의 1일짜리 동계연수의 오후 과정으로, 전체 교육과정은 2년씩 3단계로 각 1~2학년을 6년 동안 마치는 우편교육과정이다. 또한 조광 교수님은 지난 2010년경 고려대 사학과에서 정년퇴임한 민족역사의 전문가이며, 실제 강의내용은 경어체를 사용했으나, 기록의 편리를 위해 말투를 바꾸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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