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의 대표 인터넷 언론가톨릭뉴스 지금여기가 후원하고우리신학연구소가 발간하는 격월간 <가톨릭 평론>의 창간 기념식이 2015년 12월 12일(토) 오후 3시, 서울 명동 전진상 교육관에서 열렸다. 기념식은 먼저 고려대 명예교수이며 원로사학자 조광 교수의 특강과 한상봉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주필의 강의로 시작되었으며, 이어서 음악치료사의 간단한 몸풀기 노래로 숨을 돌린 후, 4시 50분 경이 되어서 본격적인 창간기념식 행사가 진행되었다. 그렇게 창간기념식 행사는 오후 6시경 끝을 맺었다. 




2015년 12월 12일(토) 오후 3시 50분경 특강이 시작되는 모습 @ 서울 명동 전진상교육관 강당



가톨릭 평론」의 창간 기념 특강

한상봉의 - 한국 천주교회 독재에 대한 기억


2015.12.12(토) 오후 3시50분경~4시 16분
서울 명동 전진상 교육관 강당(1층)


친일 문제와 국정화, 그리고 한국 천주교회


(앞서서 강의를 해주신) 조광 교수님의 말씀과 연결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한국사회 쟁점과 키워드는 친일 문제랑 독재에 관한 문제로 볼 수 있겠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국정화 논란이 불거지면서 글을 한번 써볼까 고민하다가 왜 이 문제가 불거져 왔는가를 생각해 보니까, 이와 비슷한 문제가 한국 천주교회에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한편으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발언을 듣고 정말 정답이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왜냐하면 역사학자는 좌파가 아니고 될 수가 없는 겁니다. 좌파란 공산당이나 공산주의 같은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현존하는 현실을 삐뚜름히게 보는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김무성 "역사학자 90% 좌파"...김세균 "어불성설"  신문고 2015-10-18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치는 이유는 오늘의 시점에서 과거 바라보고 미래를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늠하는 작업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사람은 역사학자로서의 자질이 없는 것이란 생각을 한다는 점에서 김무성 대표가 명석한 말씀을 해주셨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서에서는 역사학자에 해당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런 사람을 성경에서는 예언자라고 합니다. 예언자는 현실정치나 왕정에 바판적 시각을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비판의 근거로 삼은 것은 바로 과거였습니다. 그 과거란 이스라엘 백성, 이집트에서 고난받던 히브리 노예들로 살던 그들을 구출하신 하느님에 대한 기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그들은 하느님을 만난 기억을 불러일으켜 현실을 진단하며 미래를 열어나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언자는 과거와 비교해서 미래를 열어나가고 지금 있는 현실을 다시 하느님의 시선으로 판단하고 비판한다는 측면에서 또 다른 의미의 역사학자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예언자의 말로


예언자 중에 가장 대표적안 사례를 꼽자면, 역사학자 같은 예언자의 전형이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요한이 했던 이야기도 마찬가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선포는 구약의 희년에 대한 기억을 되살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예언자는 말로(末路)는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CaravaggioSalomeLondon

카라바조의 세례자 요한 목을 갖고 있는 살로메(Salome with the Head of John the Baptist)

Caravaggio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1607년작

Oil on canvas, 91.5 cm × 106.7 cm (36.0 in × 42.0 in), National Gallery, London



마찬가지로 그 반열에서 나오신 분 중에는 우리가 주님으로 모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비슷한 길을 걸어가시다가 십자가에서 정치범으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나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님도 오늘날 언어로는 좌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좌파가 아니고서는 예수님 제자가 될 수도 없고,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할 자격도 없을 것입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진짜 모습


그렇다면 한국 천주교회는 어떠할까요? 1970년대와 80년대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기억이 생생할 것입니다. 한국 천주교는 일면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에 대해서는 반성할 점이 있다고 할 수가 있고요.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반성할 점이 없다고 보는 경우도 있으나 사실상 찾아본다면 꼭 그렇지 만은 않은 것이에요. 예나 지금이나 한국 천주교회에서 현실개혁적 입장은 사실 소수에 불과합니다. 주류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꼭 '대한국민수호 천주교모임'만 그런 것은 아니다


한국 교회를 돌아보면 목소리 큰 사람들로 대변되는 사람들 중에 대한민국수호 천주교 모임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일종의 국가주의 세력입니다. 실제로 그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 약 30명 정도라고 해도, 사실상 한국 천주교회의 60~70%가 그런 시각을 가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 지도자 일수록, 장상일수록, 권력자일수록 그럴 가능성이 짙어요. 그리고 그것은 아주 오래된 뿌리를 갖고 있기도 합니다. 


구한말까지 올라가는 한국 교회의 죄지음


멀리까지 구한말과 일제 감정기에 거슬러 올라가서 그 뿌리에서부터 2015년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를 규정하는 역사적 경험들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좀 축약을 해서 설명을 드리면, 해방 후에 한국 천주교회는 미군정과 결탁을 하게 됩니다. 당시 미군정에서는 (한국천주교회 최초 한국인 주교, 1942) 노기남 주교님(1901~ 1984)을 불렀어요. 모 호텔에서 만나서 한국 사회의 지도층에 해당하는 인사들을 추천해달라는 요청을 받게 됩니다. 그러자 노기남 주교는 다음 날 알려주겠다고 말하고는 교구청에 장면(1899~1966)과 함께 앉아서 인물들을 골라봅니다. 그러면서 주로 한민당 계열의 사람들을 추천하게 됩니다. 그 당시 노기남 주교의 고민은 가톨릭 신자 중에는 추천할 만한 인물이 없다는 거였습니다. 유일하게 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장면 선생 뿐이었던 거였습니다. 그 안타까움을 가슴 속에 품으며 명단을 건네줬고, 이후 한국 교회와 미군정은 유착 관계를 맺게 됩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친일 교회


이것과 다른 방향에서 형성된 베이스는 일제 강점기의 한국 교회가 친일교회였다는 점입니다. 2009년 친일 인명사전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행했습니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친일 인사로 7명이 등재되었어요. 주교가 1명, 사제가 4명, 평신도가 2명 등이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종교에 비해 적은 숫자입니다. 심지어 대종교에서도 열 몇명이 친일파로 분류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친일인명사전 편찬관련 김승태 위원에게 한번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그 분이 말하길 "천주교에서는 개별 인사들이 친일을 한 것이 아니고, 교단 전체가 친일행위를 한 것이기때문에 대표자들만 적어놓은 것"이라고 답변을 한 겁니다. 그러니까 천주교회의 친일행위라는 업보가 있었기에 해방 이후의 상황이 불편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해방 정국에서 친일 행위자들이 주도권을 잡으니까 들고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게 바로 '반공' 키워드였습니다. 


반공 이념은 교회사(史)적으로 뿌리가 깊다


그런데 반공 이념은 교회사적으로 뿌리가 더 깊습니다. 그것을 일제시대의 상황을 교회사적으로 보았을 때, 당시 바티칸과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독일의 나치즘 그리고 일본의 군국주의는 다 연결이 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이탈리아 파시즘 세력인 무솔리니는 교황과 협약이 되어 있었어요. 교황령을 인정하는 대신 파시즘을 인정한다는 거였어요. 그 이후 이탈리아와 독일과 일본은 반공동맹을 맺습니다. 그 틀, 프레임 안에 바티칸이 들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제시대 한국 사회는 사회주의를 충분히 경험하지는 못한 상황이었지만, 교황청의 입장이 있었기 때문에, 일제시절 잡지에서도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민족 해방과 파시즘에 대항하는 세력들이 대체로 다 사회주의 세력들이었습니다. 일본의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국내의 반전평화운동자들 역시 사회주의자들이었습니다. 


교황청의 입장이 미군정과 연결되는 지점


이런 정서 속에서 미군정과 연결되면서, 친일을 업보로 갖고 있는 교회가 유일하게 살 길은 바로 반공이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전쟁이 끝나고 비오 12세 교황과 트루먼은 상호 친서를 교환합니다. 자유 우방을 지키겠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과 미국 천주교회가 있고, 그 미국 교회를 대표하는 최초의 추기경이 된 스펠만 대주교가 군종사령관으로 한국에 오면서 한국 천주교도 커넥션에 포함이 됩니다.


가톨릭 정치세력화에 나선 노기남 주교


100년간 박해에 대한 경험을 가진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적 경험 앞에서 노기남 주교는 가톨릭의 정치적 세력화를 위해 굉장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래서 노기남 주교에게 붙은 별명이 '정치주교'입니다. 그리고  그 대변인 역할을 한 이가 바로 장면 선생인 것이에요. 장면 선생 또한 나름 친일 이력을 가진 일곱명 중 한명입니다. 


황군의 무훈장구를 빈다는 원고작성의 주역, 장면


일제시절에 서울교구장 주교가 사국강연회를 수차례 했습니다. 일제시대 황군의 무훈장구를 빈다는 내내용인데요. 그 원고를 대필해 준 사람이 장면 선생입니다. 장면은 그 전에 마국에서 공부하고 와서 영어를 잘했던 가톨릭 계의 인재였습니다. 그 분이 노기남 대주교와 가톨릭의 정치세력화를 위해서 그 때 협력자로 잡은 이가 바로 이승만이었습니다. 제헌의회 선거 당시에 장면이 종로을구에 입후보를 합니다. 그런데 그 때 그 지역이 정치일번지였지만 이승만이 양보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천주교회의 친일에 대한 트라우마


그래서 한국교회는 그 이후에 친일에 대한 트라우마를 안고 그걸 반전시킬 힘으로 반공 키워드를 갖고 끝가지 오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승만 자유당 정권과 같이 오다 갈라서는 시기가 있습니다. 그 시기에 장면이 민주당을 만들고, 그 민주당 계열에서 나온 사람들 중에 김대중, 노무현까지 이어져 온 것입니다. 


70년대 아후 교회가 민주화운동에 나셨다고 하지만 그 시대적 배경에서 두가지 방식 활동이 있었어요. 하나는 대구교구 중심으로 박정희 정권과 유착관계를 형성하는 방식입니다. 대구대교구의 서정길 주교(1911~1987)와 이효상(1906~1089)이란 사람으로 대변되는 정권 결탁적 흐름이 하나이고요. 다른 흐름으로는 장면 선생 때문에 영세를 받게된 김대중으로 상징되는 정치라인 속에 포힘된 분들이 김수환(1922~2009), 전주 김재덕 주교(1920~1988), 원주 지학순 주교(1921~1993) 등입니다. 


장  면(1899~1966)

노기남(1901~1984)

이효상(1906~1089)
서정길(1911~1987)
김재덕(1920~1988)
지학순(1921~1993)
김수환(1922~2009)



'통일'보다 중요한 게 '반공'이라고 동조한 가톨릭신문


교회가 원죄를 몇가지 갖고 있는데요. 그 중 첫번째 원죄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1961년 군사 쿠데타가 생겼을 때 교회는 어떤 입장을 취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군사정부는 포고령에서 앞으로 대한민국은 반공을 국시로 한다. 혁명 정부는 반공을 국시로 한다고 선포합니다. 그때 대구교구의 가톨릭시보(현 가톨릭신문)는 반공을 국시로 한 것은 너무나 잘한 일이라고 하면서, 어떤 기사들이 나오냐면, 국토통일보다도 더 소중하고 중요한 게 반공이다. 그래서 공산주의가 만연한 상태에서 민주주의를 위해서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는 건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모든 것의 상위개념으로 반공을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가톨릭시보에 나온 내용입니다. 게다가 1962년 12월달에 국민 재건 운동에 본당에 나오는 모든 신자들 전력을 다해서 협조하라는 교서도 나옵니다. 


재건국민운동 천주교 서울교구추진회 총재 노기남


등짐 지고 종이 줍고 다니시는 넝마주의하는 분들을 재건대라고 하면서 국민재건운동을 시킵니다. 부당한 권력이 정권을 잡고 시작하면서 흔히 도덕적 정당성을 획득하려고 벌이는 일들이 있습니다. 5공화국 당시에 전두환이 했던 삼청교육대도 그런 식이었던 것인데요.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재건국민운동본부」에 서울대교구가 가입하고, 재건국민운동 천주교 서울교구추진회」를 결성합니다. 그 추진회의 총재가 바로 노기남 주교였습니다. 군사정권 초기에 군사정권을 승인하고 그 시책에 부응하고 앞서 나간 것이 바로 한국 천주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 교회가 죄책고백을 지금이라도 해야 된다고 봅니다. 대구 대교구는 그들 나름대로 그런 잘못을 고백해야 하는 죄가 너무나 많습니다.


반공이 먼저냐, 민주화가 먼저냐


반공주의라는 흐름은 1970년대 지학순 주교님을 비롯하여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도 영향력을 많이 행사했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었냐면, 대구대교구를 중심으로 하는는 사람들은 '민주화보다 반공이 우선이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반면에 지학순 주교님을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을 하는 분들은 '민주화가 곧 반공'이라는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완전한 민주화를 이루면 반공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공과 민주화는 선후(先後)의 문제인 것이지 반공을 부정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1987년도 6월 민주화 대항쟁 이후에 1989년도에 임수경, 문귀현 신부님 등이 북한에 갔다 옵니다. 그리고 1980년대 초반에는 한국교회가 해방신학의 세례를 받게 됩니다. 


경찰에 연행되기 전 KBS와 인터뷰하는 최기식 신부(1982년 4월 5일) 



부미방 사건과 최기식 신부


그런데 해방신학에 대한 논란은 1982년 3월 18일 반미운동의 성격을 띈 미문화원 방화사건(부미방 사건)이 있었습니다. 최기식 신부님(1943년생)이 구속되었죠. (원주교구 최기식 신부는 광주민중항쟁과 관련된 수배자 김현장과 부미방의 방화범 문부식을 숨겨주었다고, 범인은닉죄로 구속되었다가 다음해 광복절 특사로 나왔다). 부미방 사건 이후로 해방신학에 대한 논란이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에 대한 군불을 지킨 것 중에 하나는 교황청이었어요. 1984년 교황청에서 해방신학에 대한 일부 단죄가 있었죠. 신앙교리성 라칭거 추기경 에 의해서 그랬어요. 그래서 그 논쟁 이후로 오히려 시회교리에 준하게 되면 반공주의적 시간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해방신학의 세례를 받게 되면 공산주의는 꼭 나쁜 건 아니라는 시각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서 반공주의라고 하는 족쇄로부터 교회가 1980년대에 벗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것을 깨부순 게 1989년도 문규현 신부님의 방북 사건 이후입니다.



반공 패러다임에 갇혀있는 우리 교회


교회가 새로운 '반공'이란 틀로부터 벗어나는 흐름이 생기고 있지만 여전히 한국 교회는 반공 패러다임에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장상이건 일반 신자들이건 대한민국 수호 천주교 모임이든 반공에 대해서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일제 시대로부터 100여년간 이어져 내려온 반공 패러다임에 우리 모두가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충분히 성찰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상봉의 강의내용은 가톨릭 평론 창간호의 첫번째 글로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그래서 제가 이 글(가톨릭평론 창간호, 한국 천주교회, 독재에 대한 기억)에서 주로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은 한국 교회가 과거 군사정권 하에서 독재정권의 강력하게 저항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과 결탁해서 기득권을 획득했던 과거들, 또한 군사 쿠데타에 대해 승인했던 과거들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지금이라도 죄책을 고백하고 용서를 청해야 하고 그 모범은 이미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베르골료 신부님의 죄책 고백, 무려 네 번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미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을 체험하신 분이시죠. 이 분이 베르골료 신부님이시죠. 1973년 아르헨티나 예수회 관구장이 되십니다. 그리고 1976년 3월 24일 아르헨티나에서는 군사 쿠데타를 통해 페론 정부를 전복시키고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장군이 정권을 잡습니다.  그래서 1983년도까지 군사독재 정권을 유지하는데 그 시기에 수만명의 사람들이 납치 고문 살해 당했습니다. 그 와중에 아르헨티나 교회 주교들이 침묵하거나, 정권과 결탁하거나 일부는 저항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대부분이 침묵을 했던 과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적어도 그분이 아르헨티나 주교회의 의장으로 있을 때 네 번이나 죄책고백을 합니다. 


한국 교회의 죄책고백 스타일 "부끄럽다. 끝."


죄책 고백을 2000년도에 한국 교회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란 것이 "무엇 무엇을 해서 부끄럽다. 뭐~뭐~를 반성한다." 이런 식입니다. 그런데 아르헨티나 주교회의 문건들은 "국민들과 하느님 앞에서 용서를 청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 낱낱이 씁니다. 한국 교회에서 죄책 고백을 했던 2000년 쇄신과 화해라는 문서는 A4 용지 2장 짜리입니다. 그리고 과거 일제 시대 우리가 잘못했던 것은 2.5줄입니다. 3줄이 되지 않습니다. 짧은 글 속에서 "뭐~뭐~ 해서 안타깝게 생각한다."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적극적 독립운동에 나서지 않았고, 독립운동에 나선 신자들을 제지하였음에 대해서 부끄럽게 생각한다." 이게 전부입니다. 


일본 천주교회의 스타일 "낱낱이 고백합니다."


그러나 일본 천주교회는 다릅니다. 1995년, 종전 50년을 맞이해서 주교회의에서 문건을 냅니다. 이른바 '참회의 문건'입니다. 똑같이 아르헨티나처럼 "하느님께 용서를 청한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정신대 얘기까지 나옵니다. 그 당시 아시아인들을 징용하고 징병하며, 위안부로 삼은 것에 대해 죄책 고백하는 내용까지 나옵니다. 그리고 일본 교회는 책 한권을 씁니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 전시(戰時), 일본 가톨릭교회의 입장과 신사 참배』(가톨릭출판사, 2000)라고 우리나라에도 번역 소개되었어요. 1869년 메이시 시대부터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끝난 1945년까지, 일본 교회가 어떤 방법으로 군사체제에 휩쓸려 협력해 왔는지를 상세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 주교회의 의장이 뭐라고 그러나면,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이런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겁니다. 


필요하다면 진실을 밝히는 것은 모두를 위해 좋은 일


교황님은 뭐냐고 하시냐면, 독재정권 당시 군종장교로 있던 신부(폰 베르니치 군종신부)가 살해납치 사건에 연루되어 2007년 종신형을 선고받자, 당시 주교회의 의장으로 있던 베르골료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성명서를 발표합니다.


"필요하다면 진실을 밝히는 것은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이다. 그래서 필요하다면 교회가 갖고 있는 모든 자료를 공개하겠다."라고 먼저 이야기합니다. 바로 교황님이 교회는 교회 안에 안온하게 머물지 말고 밖으로 나가라. 교회는 야전병원이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병사들처럼 밖에 나가서 싸우고 다치면 교회 안에서 치료받는 그런 교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과감히 말씀하시고, 정치는 자선의 최고 형태다. 누구도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누구도 종교를 사적인 영역에 가둬서는 안된다고 교황님이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은 아르헨티나 주교회의 의장으로 있으면서 철저한 자기 반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는 제대로 반성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는 그러한 반성이 없었습니다. 아직도 대구대교구에서 자신들이 독재정권 시절에 어떤 잘못을 했는지, 전두환 시절에 어떤 잘못을 했는지, 지금도 어떤 잘못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공적으로 단 한 마디도 한 적이 없어요. 물론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도 군사독재시절에 어떠한 잘못을 했는지에 대해서 한 마디도 얘기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아무런 얘기도 안하는 상태에서 뜬금없이 안중근 의사에 대한 시복시성을 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굉장히 엉뚱한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과거에 대한 과거청산이 되어야만 한국교회의 미래가 열린다고 생각을 합니다. (끝)

2015.12.12(토) 오후 4시16분


한상봉 주필님의 강연 내용은 격월간가톨릭평론창간호의 첫번째 글한국 천주교회, 독재에 대한 기억」에 더욱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링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신학연구소 홈페이지 : http://www.wti.or.kr/         가톨릭평론 홈페이지 http://review.wti.or.kr/




2015년 12월 12일(토) 오후 3시 50분부터 4시 16분까지 약 26분간에 걸쳐 진행된 강의 내용을 정리자의 기억과 기록을 바탕으로 재편집된 것이므로 위의 내용은 실제 강의와는 차이가 있다.


한상봉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주필의 약력

한상봉 이시도르. 가톨릭뉴스 지금 여기의 주필이며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가톨릭평론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서강대 사학과와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천주교 사회문제연구소 연구원,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 간사,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사무국장, 격월간 잡지 <공동선> 편집장을 지냈으며, 전북 무주에서 농사를 짓다가 예술심리치료사로 일을 했다. 그동안 쓴 책으로 《지상에 몸 푼 말씀》, 《연민》,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 《그대 아직 갈망하는가》, 《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 《행동하는 사랑》 등이 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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