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1주일

2016. 6. 12. · 하부내포성지

 

죄인인 여자의 예수님 스킨십(?)

세상에 어울리지 말아야 할 사람 따로 있는가?

 


만수리공소에서 10년째 


저는 지금 몸 붙여 지내고 있는 만수리 공소에서 10년째 살고 있습니다. 만수리라는 산골의 이 마을은 시골 치고는 도시 못지않게 있을 것 다 갖춘 곳이라서 살아가는 데 불편함이 없는 곳입니다.

 

만수리는 사통팔달의 편리한 동네


우리의 만수리에 면사무소와 경찰파출소와 119소방서구급소와 보건소와 우체국과 농협과 작은 병원과 약국이 있어서 멀리 가지 않고도 행정적인 서비스와 웬만한 보건의료 서비스 혜택 등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중교통망의 중심지입니다. 행정구획으로는 부여군에 속하지만 보령시와의 경계선이 2Km 이내이고 청양군과의 경계선이 7-8Km입니다. 그래서 부여군의 시내버스와 보령시와 청양군의 시내버스가 우리 마을에서 서로 만나는 시내버스 터미널이 있습니다.

 

만수리에서는 5일장도 열린다


그러한 모든 행정서비스 기관과 교통망의 센터를 보유한 우리 마을에서는 어지간한 일을 보러 가기 위해 멀리 가지 않아도 되고 저렴한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거기다가 덧붙여 5일 만에 열리는 장터가 우리 공소 후문 밖에 있습니다. 그래서 5일장이 열리는 날엔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만수리를 회고하는 까닭


그런데 오늘의 주일 복음을 묵상하기 위해서 뜬금없이 제가 사는 만수리라는 마을을 소개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제가 이 마을에서 살아온 10년 세월의 회고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고 싶어서입니다.

 

오해 아닌 오해, "왜 마을 술꾼들과 어울리나?"


저는 마을 주민들과 어울려 살아보려고 10년 가까이 나름의 노력을 하는데, 그래도 아직까지 주민들을 일일이 모두 사귀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을 주민들의 행사에 참석하고 금일봉 찬조를 하고 주민들의 애경사에 찾아보는 등의 노력을 해봅니다. 그러면서 천주교 입교하길 희망하는 사람 하나라도 생기길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런 분이 아직 나타나질 않습니다. 마을 음식점에 식사하러 가게 되면 만나는 사람들에게 소주잔을 권하면서 접근을 시도합니다. 그러다가 술 좋아하는 마을 사람들과 ‘먹자 계’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마을의 장날에 모여서 나이 순서에 따라 그날의 음식 값을 내기로 하고, 별도로 1만원씩 걷어서 모았다가 봄가을로 차량 대절하여 놀러가기도 합니다. 그리하길 8년 동안 계속하면서 혹시 그 계원들 중 한 분이라도 천주교 예비자로 만들어 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계원들 가운데 예비교우로 영입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실정에서 우리 만수리 공소 교우들의 오해를 사게 되었습니다. 교우들께서 말합니다. “왜 신부님이 마을 술꾼들과 어울리는지 모르겠다.” 제가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서 술 마시는 게 우리 교우들 눈에 매우 거슬리는 처신인가 싶습니다.

 

사제가 사람들과 잘못 어울리면 오해를 산다


오늘의 복음 내용을 묵상한다면서 저의 마을 사람들과 지내는 이야기를 꺼낸 까닭이 있습니다. 사제가 사람들과 잘못 어울리면 오해를 사기 때문입니다. 사제란 사람을 가려서 사귀어야 합니다. 아무러한 사람들과 어울리면 사제답게 처신하지 못한다는 악평을 받게 됩니다. 그로써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잃게 됩니다. 제가 그러한 악평을 듣게 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비난하는 시몬이라는 바리사이


오늘 복음 내용 중에 시몬이라는 바리사이가 예수님을 비난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에 대해서 실망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바리사이’란 당시 유다인들 가운데 아주 경건한 신앙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경건한 바리사이의 눈앞에서 예수님께서 불량한 여자의 스킨십(?)을 허용하셨습니다. 그러한 현장을 목격한 바리사이가 예수님을 비판합니다.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하고 악평을 했습니다(루카 7, 39).

 

바리사이의 악평을 받으신 예수님


바리사이의 악평을 받으신 예수님의 입장과 우리 만수리 공소 교우들로부터 의아한 말을 듣게 된 저의 입장을 같은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는 루카복음서의 내용은 자신을 죄인으로 자처하여 참회하는 여인의 태도가 예수님께는 하느님께 향한 사랑의 표출이었습니다(루카 7, 47 참조). 진정으로 참회하는 사람의 눈물이란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한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하느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깨닫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른다는 사실을 오늘 복음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더불어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래서 악령과 마귀를 떨쳐낸 사람들이었다고 오늘 복음은 강조하고 있습니다(루카 8, 1-3 참조). 저는 그래서 제가 마을에서 사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천주교 예비자로 변화되지 않는 사실에서 다음과 같은 반성을 합니다. ‘나는 아직도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구나!’하고 말입니다.

 

꿍꿍이 속을 지니고 있을 뿐


저는 사실상 마을의 사람들과 사귀면서 꿍꿍이 심보를 지니고 대합니다. 끌어들여서 예비자로 만들어 보려는 꿍꿍이속을 지니고 있을 뿐, 진정으로 하느님 사랑을 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고뇌를 모두 품어 안을 수 있는 자세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저를 통하여 사람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저 오며가며 알고 지내는 사이로 저와 마을 사람들 사이가 될 뿐인 것 같습니다.

 

루카복음서의 특징은 ... 


지난 주일의 강론에서 제가 말했습니다. “루카복음서의 특징은, 연약한 사람들이나 병자나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을 보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많이 전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들의 불행을 함께 하시는 모습을 많이 전하는 루카복음서라고 지난 주일에 제가 강조했었지요. 그러한 예수님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분을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이시라고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하느님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드러내놓고 죄인이던 이들과 가까이 지내던 예수님


예수님께서 가까이 하시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분을 오해하는 사람은 사실상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바리사이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오해를 뛰어넘는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가까이 하는 사람들 때문에 받는 오해란 예수님께 하등의 문제꺼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드러내놓고 죄인이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시는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처신은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초월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란 선별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은 그렇게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이셨습니다.

 

사람들을 선별적으로 대하던 바리사이


그러나 사람들을 선별적으로 대하면서 바리사이처럼 스스로 훌륭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자만에 빠진 사람의 눈에는 하느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자만의 눈을 가지고 본다면 무조건 경건주의로써만 신앙을 유지한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참 신앙이란 하느님께로부터 한없는 용서를 받게 되었다는 깨달음이 그 바탕을 이룹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참회하는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7, 50)하고 말입니다.

 

신앙이란 누구나 용서받는 것


그렇습니다. 참 신앙은 우리 인간 모두가 하느님께로부터 용서 받을 수 있다는 깨달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루카 7, 47) 그러한 깨달음으로 하느님께 화답하는 사랑의 태도가 곧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세상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죄인과 선인을 가려내려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경건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자만하는 시몬이라는 바리사이는 오늘 예수님을 초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면서 그분을 예언자인가 아닌가를 가려보려 했습니다.

 

어울리지 말아야 할 사람이 따로 있는가


우리가 세상 살면서 어울리지 말아야 할 사람 따로 있는가 하는 눈으로 사람들 사이를 가른다면, 그건 정면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울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가려내려는 눈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란, 사람들 사이에 먼저 불신을 깔아놓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인간 사이의 불신으로는 하느님께 향한 마음 역시 ‘믿음’의 것이 되지 못합니다. 인간 사이의 불신이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망각한 불신앙이지요. 그래서 모든 죄인도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루카복음서는 오늘 죄인인 여자의 예수님 스킨십(?) 사건을 보도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이라야 진정 신앙인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반성해야겠습니다. 제가 어울리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지 못하므로 그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도 아직 신앙으로 이끌지 못하고 있나 봅니다. 저 스스로도 아직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은 아닌지…!


출처. 하부내포성지 다음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219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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