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0주일
2016. 6. 5. 10:00 하부내포성지 만수리 공소
슬퍼할 줄 알아야 사람이다.
진짜 사람다운 모습의 예수님
슬픔을 참지 못하신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우리가 오늘 봉독하는 루카복음서 7장 11-17절 단락의 제목을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시다’라고 한국어 번역 성경책에 씌어있습니다. 그리고 6월의 매일미사 책 오늘의 복음서가 수록된 곳에는 그 제목을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고 씌어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의 복음말씀 단락에다가 그 제목을 바꿔 달고 싶습니다. ‘슬픔을 참지 못하신 예수님’이라고 말입니다.
루카복음서의 독특한 특징 - 자비의 복음서
루카복음서는 다른 복음서와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성서전문 학자들은 루카복음서에다가 ‘자비의 복음서’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합니다. 그 까닭은 연약한 사람들이나 병자나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을 보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많이 전하는 복음서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루카복음서의 저자는 아마 의사였을 것이라고 학자들이 말합니다. 왜냐면, 아픈 사람들을 늘 보아온 의사의 입장에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썼으리라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처지의 과부를 보신 예수님
오늘의 내용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찾아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 보도 내용의 분위기를 전하는 표현들이 매우 감성적입니다. 안타깝고 슬픈 상황을 먼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루카 7, 12)고 하는 상황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안타까운 처지의 과부를 보신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마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루카 7, 13). 그런 다음에 예수님께서 몸소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고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루카 7, 14). 그러자 죽었던 아이가 살아났다는 것을 보도하는 루카복음서는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고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루카 7, 15).
이러한 오늘의 이야기 말미에 예수님을 예언자로 보는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고 말했다는 토를 달고 있는 루카복음서입니다(루카 7, 16-17). 안타깝고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보듬어주시는 예수님을 사람들이 ‘하느님’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들의 불행을 함께 하시는 예수님은 곧,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 그분은 곧,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셨다고 오늘의 복음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신 예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불행한 사람을 보고 슬퍼할 줄 아는 진짜 사람이 예수님이시며, 그분이 곧 하느님이시라고 오늘 복음서는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을 되살려내시는 능력을 지니셨기 때문에 그분은 하느님이시라고 하는 오늘 성경 내용의 해석을 할 수도 있습니다만, 저는 불행한 처지의 사람을 보시고 함께 슬퍼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먼저 보고 싶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서 요한복음서에도 표현 된 대목이 있습니다. 죽은 라자로의 무덤을 찾아가셨을 때 거기서 울고 있는 사람들을 보시고는 마음이 북받치셔서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을 요한복음서 11장 33-36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진짜 사람의 모습임을 강조하는 까닭은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진짜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을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루카복음서에서는 외아들의 죽음으로 슬퍼하고 있는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신 예수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외아들의 죽음과 과부’의 이야기보다 더 안타까운 사람의 처지가 있을 수 있을까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외아들의 시신을 품에 안게 되셨던 성모님의 처지가 연상됩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십자가 밑에서 죽은 외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묘사한 미술 작품을 일컬어 ‘피에타(Pieta)’라 합니다. 미켈란젤로의 조각 작품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 ‘피에타’란 글자 그대로 ‘연민’ 즉 ‘가여워하는 마음’입니다. 이걸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고들 문자화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피에타’란 측은해하는 마음보다 더욱 처절하리만큼 애통해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죽은 외아들을 끌어안고 있는 어머니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요? 그저 ‘한없는 슬픔’이라고만 할까요? 이렇듯 한없는 슬픔의 주인공이신 예수님 자신과 성모님의 처지를 예수님께서는 미리 오늘의 죽은 외아들과 그 어머니 과부의 상황에서 스스로 보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그저 ‘측은지심’으로만 표현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 상황을 나 자신의 상황으로 보는 것입니다.
자비의 특별희년과 피에타
그래서 저는 올해 ‘자비의 특별희년’에 오늘 보는 상황의 ‘피에타’를 그 핵심적 주제(테마)로 삼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비’란 시혜적인 것이 아닙니다. 더 나은 위치의 사람이 그보다 못한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자비’가 아닙니다. 딱한 처지의 사람과 나 자신의 처지를 동일시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죽은 외아들을 끌어안고 있는 어머니의 마음과 같은 것이어야 합니다.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시고, 오늘 죽은 외아들의 장례 대열에서 가엾은 마음이 되신 예수님의 마음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슬픈 사람과 똑 같이 슬퍼하신 예수님의 마음이 곧 ‘피에타’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부드러운 부처님의 미소로 표현되는 ‘자비’라기보다는, 슬픔으로 주저앉아 얼굴을 감싸고 있는 처연함의 ‘자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해 우리의 ‘자비의 특별 희년’에 내걸 수 있는 경구(캐치프레이즈)를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면 무리일까요?
‘슬퍼할 줄 알아야 사람이다!’
이러한 제안은 혹여 불쾌감을 자아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함께 슬퍼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를 시도하는 사람들이 많다고들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어주는 끈이 오늘의 우리 사회에서 무엇일까요? 아마도 지금 시대 자본주의의 극도의 타락상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결속의 끈은 ‘돈’일 것입니다. 그 ‘돈’ 때문에 적나라한 이기심과 무감각한 거래관계 밖에 남은 것이 없는 사회가 우리의 오늘 세상 아닐까요? 이것이 오늘의 우리 사회상이라면, 이건 이미 150여 년 전에 칼 마르크스가 무섭게 예견했던 것임을 상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진 ‘돈’이 없더라도, 그 때문에 참담한 처지에서 함께 그 처지를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 나의 옆에 있다면, 그 사이엔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결속을 이루는 끈이 될 것입니다. 즉, 슬퍼할 줄 아는 사이에 서로를 사람의 이유로 손을 맞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오늘 루카복음서는 극적 감동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장례행렬에 다가가셔서 관에 손을 대셨다는 보도입니다. 그리 하시자 관을 메고 가던 사람들이 멈추어 섰답니다. 죽음의 길이 멈추었답니다. 이러한 오늘의 성경보도를 실감하기 위해서 그대로 다음과 같이 옮겨봅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울지마라'하고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루카 7, 13-15)
그렇습니다. 함께 슬퍼할 줄 모르는 오늘날의 우리들이라면, 루카복음서가 오늘 전해주는 이야기에서 함께 슬퍼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우선 알아보아야 합니다. 함께 슬퍼하시는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가 새롭게 발견해야 할 진짜 사람이셨습니다. 그러한 그분의 손은 죽음의 길을 멈추게 하셨고, 죽은 사람도 되살려내셨습니다. 그러한 진짜 사람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당신 백성을 찾아오신 하느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듯 진짜 사람들이 사는 우리 세상이라면, 거기에 하느님 오셔 계십니다.
'가톨릭노트 > 신부 윤종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통일의 살을 붙이려면 시간이 필요…! 그 시간이란 ‘역사’이다 (0) | 2016.06.20 |
---|---|
어울리지 말아야 할 사람이 따로 있는가 (0) | 2016.06.12 |
그리스도신자라면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이어야 (0) | 2016.05.15 |
인간의 삶이란 결코 땅에 묻혀 스러져버리는 것일 수는 없는 것 (0) | 2016.05.08 |
예수님의 부활로 성령의 시대를 열었다 (0) | 2016.05.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