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6주일
2016.5.1. 09:00 하부내포성지 도화담 공소
사랑한다면 …
우리 사랑의 거울
웃으면 천당 가요
마산교구의 구병진 신부님께서 10여 년 전에 교회의 우스갯소리를 모아 책을 냈습니다. ‘웃으면 천당 가요’라는 책입니다. 그 책 가운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성당에서 주일학교의 미사 중에, 아담과 하와의 원죄를 설명하기 위해서 사제가 어린이들에게 질문을 했답니다. “아담이 낙원에서 어떤 죄를 범했지요?”하고 말입니다. 그러자 한 어린이가 번쩍 손을 들더니 일어나서 대답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죄를 졌습니다.”
사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게 어째서 죄를 지은 건가요?” 어린이가 대답했습니다. “하느님이 먹지 말라고 했는데, 하와의 말을 듣고 따먹었기 때문이지요.”
사제가 다시 질문했습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그 때문에 아담은 어떤 벌을 받게 되었나요?” 꼬마 녀석은 자신이 없는 듯 머뭇거리다가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 저어… 아담은 그 벌로 하와하고 결혼하게 되었지요.”
아담은 어떤 벌을 받게 되었나요?
이 우스갯소리 속에는, 혼인이란 죄의 벌처럼 어쩔 수 없이 맺어지는 수도 있다는 뜻이 숨어있는 것 같습니다. 상대방의 원의를 따르다 보면 무거운 짐을 함께 지는 결과까지 얻게 되는 사이가 된다는 뜻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꼬마 녀석의 엉뚱한 대답을 달리 해석하여, 아담은 하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하와가 시키는 대로 죄를 지어 벌을 받게 되었다는 우스개를 덧붙여봅니다. 하와가 아담에게 그 금단의 열매를 먹으라고 하면서 아마 다음과 같이 말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당신, 나를 정말 사랑한다면 하느님의 말보다는 내 말을 들어줄 수 있겠지요? 그러면 이 열매를 나와 함께 먹어보세요.”하고 말입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요구하는 사랑이란
본래 남편이 아내의 말을 무조건 들어주어야만 그게 사랑의 징표라고 생각하는 여자들의 근성을 잘 아는 남자였었기에, 그렇게 하느님께 벌 받을 것을 깜빡 잊어먹고 그 실수를 하게 되기까지 우매한 아담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남녀 간의 사랑은 맹목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특별히 여자들은 자기를 사랑하는 남자가 그 사랑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어떤 무모한 행위를 서슴지 않기를 기대한다고들 말합니다.
여성에게 바친 최초의 사랑 고백
아마 그래서 하와는 정말 아담이 자기를 사랑하는지 확인해보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금하신 일까지 자기를 따라 해보라고 요구한 듯도 합니다. 왜냐면 하와는 이미 전에 아담의 사랑 고백을 정말 찐한 말로 들은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셔서 데려다 주시자 아담이 보인 반응은 인류의 역사상 남자가 여자에게 고백하는 사랑 표현으로 최고의 걸작이기 때문입니다. 오래도록 간절히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하고 하와에게 사랑을 고백했습니다(창세 2, 21-23). 그러한 아담의 사랑 고백이 진실인가 아닌가를 확인하고픈 마음이 하와의 심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정말 나를 그렇듯 사랑한다면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기보다는 내 말을 따를 수 있어야 되지 않겠어요?”라는 식으로 하와가 아담에게 앙탈을 부리는 바람에, 흔히 남자들이 여자 앞에서 무모한 짓을 해서라도 여자의 환심을 사려는 그 만용을 부린 것이 아담의 실수였을 것 같기도 합니다. 가련한 남자들의 모습이지요.
아담처럼 인간은 현실적으로 요구하는 사랑에 눈이 먼다
제가 덧붙인 이 우스갯소리를 가지고 오늘의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 말씀을 이야기해보고 싶습니 다. 아내 하와가 하느님 말씀보다는 자기 말을 더 따라주어야만 남편 아담이 진정 자기를 사랑해주는 것으로 앙탈을 부렸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그렇듯이 현실적으로 눈앞에서 요구하는 사랑에 우리 인간은 아담처럼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연약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양심에서 들려오는 꾸짖음에 귀를 막고 죄를 짓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우리 신앙인들이 게으름을 피우기도 하고 비리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게 나쁜 짓인 걸 다 알면서도 저지르는 것이 인간의 죄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의 꼬임에 빠져서 인간은 죄를 짓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해서 그러한 인간인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요한 14, 23) 하고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덧붙이신 말씀을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 25-26)
예수님의 이 말씀은 눈앞의 사랑에 눈이 멀었던 최초의 인간 아담 이래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 제쳐두고 맹목적으로 현실만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깨우침을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아직 이 세상에 속하는 육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현세적 유혹에 쉽사리 이끌리곤 합니다. 하지만 피조물 가운데 우리 인간은 육체적인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 육체적인 한계 너머에 인간이 건너갈 수 있는 그 능력을 일컬어서 인간의 영성(靈性)이라 합니다. 즉 물질적 및 육체적인 테두리를 초월하는 그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육체적 한계성을 함께 지닌 동물들과는 본성적으로 다른 존재인 것입니다. 그렇듯 육체적 현실의 한계성을 초월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는 본성을 인간으로 하여금 새롭게 성취하도록 하는 것이 곧 부활의 신비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영적 본성을 먼저 보여주신 분이 곧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현세적 상황에서 알게 된 바를 통하여 이제 현실 너머에까지 이르는 영적 깨우침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영적 단계에 이르는 것이 곧 본래적 인간의 참 본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참 본성은 영성(靈性)
그 인간의 참 본성인 영성(靈性)을 회복하게 될 때에는 곧 하느님 말씀을 들을 줄 아는 단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하느님의 말씀을 진정 알아듣는 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바를 옳게 되새기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적(靈的) 단계에 이르도록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聖靈)을 보내주실 것이라고 예수님 친히 보증해주신 것입니다(요한 14, 26 참조). 우리에게 있어서 영적인 주도를 해주시는 분이 곧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적 주도자이신 성령으로써 인간의 본성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본래 창조되었습니다(창세 1, 27 참조). 그러한 인간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신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창조주 아버지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그 영적 주도를 하실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성령의 시대를 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로써 이제 우리에게는 성령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렇듯이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써 전에 떠나갔다가 다시 오시겠다고 하신 약속에 대하여(요한 14, 28 참조)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이루어주십니다. 그 부활하신 분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새로이 회복된 인간상을 이루시는 분이시기에 그렇습니다.
평화는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참 삶의 길로 돌아서는 것
그 부활하신 분이 우리 인간 안에 성령으로 이루어주시는 구체적인 새 인간상은 진정 평화를 얻은 삶인 것입니다. 아담이 인간의 꾀에 넘어감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한 이래 우리 인간 자신 안에서 상실된 평화가 진정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다는 참 평화란 곧 인간이 하느님과 이루는 평화입니다. 즉 성령께서 깨우쳐주시는 대로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참 삶의 길로 돌아서는 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하여, “나를 사랑한다면 내 말을 들어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모두에 우스개로 제가 풀이했던 바대로 아담이 사랑하는 하와의 말을 들어서 하느님을 거역했지만, 이제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줄 앎으로써 그분을 사랑한다는 증명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성령을 받았다는 것
우리는 이미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의 새로운(부활 신비의) 삶을 주도하실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 성령의 주도하심에 따르는 삶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듯 성령을 받는 세례 때 고백했던 믿음은 곧 주님 사랑을 반영하는 거울입니다. 믿음이란 사랑하기 때문에 우러나오는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의 바탕이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믿음 없이 사랑 없습니다. 다시 말하여, 믿음은 사랑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부활 신비 가운데 다시 고백하는 우리 믿음은 하느님을 향한 우리 사랑의 거울입니다.
출처 - 하부내포성지 다음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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