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5주일

2016.4.24. 10:00 하부내포성지 만수리 공소

 


사랑하기 때문에 죽어야 …

“사랑은 주기 전에는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죽기 전에는 사랑이 아니다!”



 

착한 목자콤플렉스와 사랑 콤플렉스


제가 착한목자주일을 주제로 한 지난주일의 강론에서, “내가 정말 착한목자인가?”하는 질문을 저 자신에게 던지면서 진정 대답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하는 말이, 저에게는 ‘착한목자콤플렉스’가 있다는 변명조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사랑의 새 계명’에 관한 주제로 강론을 하려 하니, 또 다른 저의 콤플렉스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건 ‘사랑콤플렉스’입니다.

 

사랑의 새 계명에 대한 오늘 복음서 말씀


‘사랑의 새 계명’에 관한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 최후 만찬 때에 제자들에게 하신 고별담화중의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요한복음서의 저자가 그 최후 만찬장에 기자처럼 동석하여 속기록으로 적어둔 말씀일까요? 그런 게 아닙니다.

 

승천하신 후 70~80년이 지났을 때 ...


요한복음서가 전하는 이 말씀은, 그 최후 만찬 때에 예수님께로부터 들은 것을 오랜 세월 후에 회상하는 사람이 묵상록으로 적은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 거의 70-80년이 지나자, 그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당시 신자들이 까마득한 옛일로만 생각할 수도 있었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직접 모시고 살았으며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체험했던 요한 사도가 자신의 그 체험을 이러한 묵상록으로 기록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지금도 예수님께서 생생하게 우리 사이에 계심을 깨닫도록 전해주는 말씀이 곧, 오늘 우리가 읽는 복음 내용인 것입니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그 죽음을 넘어 부활하신 그 단계의 삶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요한 사도는 오늘의 복음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 때 당신 자신에 대하여 계시하시던 그 모습을 회상하면서, 그 분의 부활 이후 우리 가운데 계시는 현존 양식과 일치한 상황의 말씀으로 요약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듯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분이 하신 말씀실천을 통하여 하느님 안에 함께 살아 있다는 초기신앙인들의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어느 교우님을 심하게 나무랐더니


그래서 오늘의 복음 말씀 따라 저의 ‘사랑콤플렉스’가 저를 더욱 움츠러들게 합니다. 제가 전에 있던 본당에서 어느 교우님을 심하게 나무랐더니 그분이 저에게 항의하셨습니다. “신부님은 강론하면서 사랑을 말씀하시곤 어찌 그렇게 야단을 치십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항의 말씀을 듣고부터는 제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가지고서는 정말 사랑을 말할 자격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사랑을 주제로 하는 성경 구절을 대하게 되면 마음속에 늘 부담을 느낍니다. 그게 바로 저의 또 다른 콤플렉스입니다. 일컬어 ‘사랑콤플렉스’입니다.

 

저는 그러한 ‘사랑콤플렉스’를 지닌 사람으로서 오늘 예수님의 ‘사랑의 새 계명’에 관한 주제로 강론에서 저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한 말을 인용하여 말씀을 드려볼까 합니다.

 

그것은 “사랑은 주기 전에는 사랑이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인기 탤런트 김혜자 씨의 말입니다. 김혜자 씨가 10여 년 전에 펴낸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책에 나오는 말입니다만, 그 말에 기억(ㄱ)자 하나 더 붙여서 “사랑은 죽기 전에는 사랑이 아니다.”라고 들리기도 합니다. 그 책은 전쟁과 빈곤 가운데 죽어가는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을 찾아다니며 자기 나름으로 사랑의 손길을 펴면서 얻은 김혜자 씨 자신이 체험 소개의 글을 수록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 책 속에서 저자는 그리 대단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꾸밈새 없이 평범한 표현의 이야기로 독자의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안겨줍니다. 배고픔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어린이들을 만나볼 때마다 미어지는 한 한국인 여성의 가슴에서 억제할 수 없이 흘러나오는 말들로 그 책은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말들은 그래서 어떤 거창한 화두를 던지는 것도 아니고 매끄러운 논법으로 독자를 설득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아픈 가슴을 토로할 뿐입니다.

 

그 글들을 읽으면서 저는 그 어떤 사랑의 이야기보다도 더 사람의 마음을 저려주는 것임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어떤 설명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란 주는 것이 아니면 사랑이 아니다.”라는 그 책 저자의 말은 사랑에 대한 이러저러한 표현들 가운데 압권이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일진대, 그저 내가 주는 사랑이 아니고서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표현할 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책의 저자는 그 단순하고 강렬한 표현을 조금 더 진하게 가슴에 와 닿도록 토를 달고 있습니다. “종(bell)은 누가 그걸 울리기 전에는 종이 아니다. 노래는 누가 그걸 부르기 전에는 노래가 아니다. 사랑은 주기 전에는 사랑이 아니다.” 하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소리를 낼 목적이 아니고 그저 장식처럼 달려있대서야 그게 무슨 종(鍾)이겠으며, 부르지도 않는 노래 곡조를 악보로만 가지고 있대서야 그게 무슨 노래이겠으며, 주지 않고 말로만 해서야 그게 무슨 사랑이겠습니까! 그래서 사랑은 몸으로 실천하지 않고서야 사랑일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한 사랑을 오늘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사랑하여라.”(요한 13, 34)라는 말씀으로 다 말해진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사랑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는 사랑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설명 밖에 더 할 말이 없는 사랑입니다. 그것은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보여준 사랑일 뿐입니다. 해서 “너희도 그렇게 사랑하여라.”라고 하신 말씀이 곧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사랑의 새 계명’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거두절미하고 일언지하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말로 밖에 표현되지 않는 사랑입니다.

 

사랑함에 있어서 다른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러한 사랑은 그저 절절한 마음으로 몸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쏟아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그러한 사랑은 마음 없이 물건으로 때우는 것일 수도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수년 전에 작고한 최인호 작가가 TV대담에서 하던 말이 새롭게 기억 됩니다. 역시 10여 년 전의 TV대담입니다. 그해 ‘어버이 날(5월 8일)’을 맞이하여 ‘최인호의 사모곡’이라는 TV대담프로였습니다. 최인호 씨가 어머니를 회상하는 이야기의 내용인데, 그것을 제가 지금까지 대략 기억하는 바대로 각색하여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TV대담프로에 등장한 최인호의 어머니 회상


아들딸을 많이 낳아 어렵사리 키워놓고 늙어가시던 어머니가, 모두들 자기 살림 차리고 나가 사는 자식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갖가지 이상한 행동을 하시더랍니다. 젊은 아들이 생각하기엔 그게 노인의 투정이려니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로서는 그저 맛있는 음식이나 좋아하실만한 옷이나 선물을 가끔 사드리는 것으로 즐겁게 해드리면, 그게 어머니의 사랑에 보답하는 도리라고 여길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한데 오래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회상해보면, 그리 했던 아들로서 얼마나 비정하고 잔인했던가 하는 후회가 남아서 부끄럽기만 하다는 것입니다. 수십 년이 지나버린 옛적의 그 어머니 모습을, 즉 세상 떠나신지 오래 된 어머니의 모습을, 회상해볼 때 그분이 자식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하시던 행동들이 어쩌면 자식들에 대한 그분 자신의 사랑의 관심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30년 전에 외국에 나가 있던 아들에게 보내셨던 어머니의 편지를 보관 했다가 꺼내 읽어보니, 그때는 들리지 않던 어머니의 그 사랑스런 음성이 들린다는 것입니다. 그 편지에서 그때는 어머니가 무슨 그런 잔소리를 늘어놓는 글을 보내셨나 했는데, 돌아가시고 숱한 세월 흐른 다음 그 편지를 다시 읽으니, 그게 모두 아들 사랑하는 어머니의 말씀으로 비로소 읽혀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자식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말로 할 수 없는 깨달음을 뒤늦게 깨우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이란 어떠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저 자식에게 주는 사랑일 뿐이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렇듯이 진짜 사랑은 그저 주는 것일 뿐입니다. 마음과 몸으로 몽땅 주는 것이 그런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에 대해서 뭐라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그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간단한 말씀으로, 그렇게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사랑한 그 사랑으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곧 그분의 ‘사랑의 새 계명’입니다.

 

말로 하지 말고, 온 마음을 다하여 실천으로 사랑을 보여주어야


그러므로 제가 이렇게 강론으로 사랑에 관하여 여러 말을 늘어놓는 것 자체가 사랑의 본질을 흐리게 하는 것입니다. 말로 강론하지 말고, 온 마음을 다하여 몸을 바치는 실천으로 사랑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실 사랑에 대한 강론은 부질없는 언설일 뿐입니다. 사랑은 실천으로 보여야 하는 것일 뿐이기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그렇듯 실천으로 먼저 보여주시고 그렇게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의 주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을까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 방식


우리 각자는 나름대로 자기 식의 사랑 방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랑 방식은 그래서 어떠한 것이라고 일반화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함에 있어서 “예수님의 방식으로 하자”고 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사랑 방식”이란 곧,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으로 깨우쳐질 것입니다. 다른 말로, “사랑하기 때문에 죽는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럴까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사랑하여라.”고 하신 말씀은 곧, 죽으시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하시던 자리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 35)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전해주는 요한복음서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에, 그 말씀을 회상하는 가운데 새롭게 깨달은 제자들의 고백으로 오늘의 이런 말씀을 요한복음서가 전하는 것입니다. 앞서 최인호 씨가 어머니의 30년 전 편지를 꺼내들고 어머니의 사랑스런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가 뒤늦게 열렸다고 고백하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거기 예수님의 제자라는 표시가 되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되어야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그게 곧 내 제자라는 증명이다.”(요한 13, 34-35의 내용)라는 말씀 속에, 부활하여 우리 가운데 계시는 예수님의 음성이 그렇게 지금 들립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도 사랑하기 때문에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 방식으로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이라면 나 자신을 죽이는 것이 곧 예수님 제자의 사랑 방식일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 사랑이란 주기 전에는 사랑이 아니라는 말과 같이, 사랑하기 때문에 죽을 수 있기 전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처럼 사랑을 말할 수 없으리라는 깨달음의 사랑 실천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의 주제는?

 

“사랑하기 때문에 죽어야…”

 

그리고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출처 - 하부내포성지 다음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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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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