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2주일
2016.4.3. 09:00. 하부내포성지 도화담공소
꼭 눈으로 봐야겠나?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요한 20,25)
부활 제2주일은 부활대축일과 동일한 축제의 날이다
오늘 부활 제2주일은 부활대축일 당일과 동일한 축제의 날입니다. 지난 부활주일로부터 오늘까지 교회는 만 일주일, 즉 8일 동안의 부활축제를 올립니다. 그래서 오늘을 영어로 The Octave Day of Easter라 하고, 부활주일 즉 Easter Sunday에 대한 Low Sunday라 부르기도 합니다. 세례를 받은 새 신자들이 부활성야에 입었던 흰 옷을 일주일간 입고 지내다가 오늘 여드렛날을 지냄으로써 그 흰 옷을 벗을 수 있기 때문에 오늘을 사백주일(啣白主日), 즉 라틴어로는 Dominica in albis, 독일어로는 Weisser Sonntag이라 부릅니다.
예수의 부활발현 사화
그러한 8일 부활축제의 내용을 우리는 오늘의 복음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의 요한복음서 20장 19-31절에서 볼 수 있는 예수님의 부활발현 사화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만남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서가 사실상의 그 끝맺음을 하고 있는 이 대목에서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오늘의 우리에게도 생생한 체험으로 계속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즉 우리가 부활주일로부터 여드레 만에 맞이하는 주일, 그런 주일은 매주일입니다. 그런 주일을 일컬어 요한복음서는 ‘주간 첫날’이라 하고 있습니다(요한 20장 1절과 19절 참조). 이 ‘주간 첫날’이란, ‘일요일’을 지칭하는 날입니다. 이러한 일요일을 우리는 ‘주일(主日)’이라 부릅니다. 즉 ‘주님의 날’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임에 오시는 날입니다.
지난 일요 모임에 빠졌던 토마스가 오늘 모임에 참석했는데
그러한 ‘주간 첫날’의 이야기로 오늘은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모였다고 요한복음서는 보도하고 있습니다(요한 20장 26절 참조). 그런데 여드레 전에 제자들의 그 모임에 함께 하지 않았던 토마스가 오늘은 모임에 참석하였다는 사실이 오늘 강조되고 있습니다. 지난 일요일에는 모임에 빠졌던 사람이 오늘은 함께 자리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지난주일 나오지 않았던 신자가 오늘은 성당에 나왔다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그렇게 지난주일 불참했던 토마스처럼 다시 여드레 만에 참석한다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교회 공동체의 주간 첫날(주님의 날)에 자리를 함께 한다면 부활주일의 같은 체험을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요한복음서는 20장 31절로 사실상의 끝맺음을 합니다. 21장은 나중에 누군가 덧붙인 부록입니다.
오늘의 요한복음서 20장 이야기로, 우리는 부활하신 그분을 일주일 만에 항상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요한복음서는 강조하면서 끝맺음하고 있는데, 그 후 초대교회 신자들이 살아가면서 계속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을 21장의 부록이 암시하고 있습니다.
문을 닫아걸고 불안 속에 모여 있던 제자들이 받은 평화 ...
그렇다면 오늘의 이야기로써 강조하고 있는 내용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주일 즉 ‘주간 첫날’ 아침에 마리아 막달레나와 두 제자가 예수님의 빈 무덤을 확인한 사실(요한 20, 1-9 참조)을 보도한 요한복음서는 그 당일 저녁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오신 사실(요한 20, 19-23 참조)을 보도해주고 있습니다. 부활하여 오신 예수님을 그날 저녁에 뵙게 된 제자들의 방에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우리는 부활이 의미하는 평화와, 파견과, 성령 받음과, 죄 사함의 체험 사건이라고 해설해주는 강론을 들을 수 있습니다. 문을 닫아걸고 불안 속에 모여 있다가 거기에 오신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들이 받은 평화와 파견과 성령과 죄 사함 그 자체가 모두 제자들이 체험한 부활입니다.
파견과 성령과 죄 사함 그 자체가 모두 제자들이 체험한 부활
이러한 예수님 부활 당일 저녁의 체험에 관한 요한복음서의 보도(요한 20, 19-23 참조)와 그 다음 일주일 후의 사건에 대한 보도내용(요한 20, 26-29 참조)을 함께 이어서 오늘 우리가 읽고 있습니다. 즉 ‘주간 첫날 저녁’(요한 20, 19)의 사건과 그 ‘여드레 뒤’(요한 20, 26)의 사건을 오늘 우리는 함께 이어서 보는 것입니다.
부활주일이란 '주간 첫날'이며 인류의 첫 날
부활주일이란 ‘주간 첫날’입니다. 즉 인류의 첫 날입니다. 새 삶을 시작한 날이라는 뜻의 첫 날입니다. 그래서 그 첫 날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그래서 주간 첫날마다, 즉 일요일이 될 때마다, 우리는 그 부활의 날을 매번 체험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날에 우리가 갖는 체험은 무엇인가?
이러한 부활의 날에 우리가 갖는 체험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만나고 새 삶을 얻는 체험인 것이지요. ‘새 날’인 것이지요. 엄청난 변화의 날인 것입니다. 그 변화는 사람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지요. 불안에 갇힌 제자들의 상태, 즉 아직도 불신앙의 문고리를 철저히 잡아매둔 상태를 타파하는 일대 변혁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그 과정을 오늘의 복음서가 서술해주고 있습니다. 부활주일의 여명에, 즉 ‘주간 첫날 이른 아침’(요한 20, 1)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발견한 예수님의 빈 무덤을 베드로와 다른 제자 한 사람이 함께 확인하고 집에 돌아온 후(요한 20, 1-10 참조), 제자들은 이어서 그 동일한 인물인 마리아로부터 주님을 만나 뵌 이야기를 들었지만(요한 20, 11-18 참조), 그들은 ‘두려워서’(요한 20, 19), 즉 믿음이 허약한 의혹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불안의 벽을 무력하게 하시며 평화의 주인공으로 오시는 주님을 만남으로써 그 불신앙을 일소하게 됩니다. 그리고 불안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이제 밖으로 나갈 파견명령을 받게 됩니다.
파견이란 주저앉아있던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가라는 명령
예수님께서 하신 첫 마디 말씀이 곧 그 불안을 타파하시는 평화의 선언이었고, 그리고 즉시 파견하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파견이란 주저앉아 있던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가라는 명령입니다. 평화선언의 파견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제자들에게 건네신 첫 말씀은 그래서 이렇습니다. :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 21)
이 평화선언의 파견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성령을 받아 죄 사함을 전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 22-23)
그렇습니다. 짓누르던 죄의 무게를 이제 벗어버릴 수 있는 새 세상을 펼치게 된 것입니다. 그 때까지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요한 20, 9) 그들은 부활하여 오신 그분으로부터 이제 그 새 세상의 새 삶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을 뜨는 은총을 직접 얻은 것입니다.
쌍둥이라고 불리던 토마스의 경우
아직도 이러한 부활체험을 얻지 못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쌍둥이라고 불리던 토마스”(요한 20, 24)입니다. 그는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요한 20, 24)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간 첫날 저녁 그 자리 그 제자들의 모임에 “함께 있지 않았던”(요한 20, 24) 사람입니다. 신자이면서도 공동체의 주일미사에 참석하지 않는 신자와 같은 사람이지요.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일주일 전의 부활주일에 우리가 체험한 것이 교회 공동체의 신앙 안에서 함께 한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새 삶을 얻는 세례를 받는 것이 홀로 만의 것이 아니라, 교회의 신앙 속에 들어가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라자로의 부활을 현장에서 목격했던 이가 바로 토마스
토마스는 어떠한 인물입니까? 그는 유다인들이 잡아 죽이려 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부활시키러 가실 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 16)하며 자기 동료들인 다른 제자들을 부추길 만큼 용기 있는 사나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며 생명이다.(…)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 25)하고 말씀하시며 라자로를 부활시키시는 것을 현장에서 목격했던 사람이 토마스였습니다. 그러나 한편, 예수님께서 최후만찬에서 고별담화를 하시면서 당신이 가실 길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 자리의 제자들이라고 말씀하시자(요한 14, 1-4 참조), 토마스는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 5)라고 이의를 제기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면모로 보아 토마스의 됨됨이를 저는 다음과 같이 짐작합니다. 말을 먼저 하는 사람,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 사람, 이유를 많이 내세우는 사람, 자기 식으로 마음대로 행동하는 자유분방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교우 형제자매들 간에도 그런 분들이 많이 계시지요.
토마스 사도를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저는 여기서 토마스 사도나 또는 그와 비슷하게 잘난 척하며 말 많이 하고 자유분방한 신자들을 비판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서의 이 대목이 우리에게 깨우쳐 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한 토마스, 즉 말 많고 이유가 많으며 공동체 참여에 불성실한 신자라 할지라도, 이제 진실로 믿음을 갖게 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 부활체험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토마스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 28)하고 고백하는 신앙에 이르게 된 변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요한복음서의 이 대목은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오신 예수님을 만난 사실을 전하는 내용으로 이 복음서의 결론을 맺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 전해들은 요한복음서의 이야기로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어야겠습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모든 불신으로부터의 해방을 이루는 평화와, 그 평화를 세상에 전해야 할 사명을 받아 우리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파견 받았음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평화의 성취는 성령을 받아 이루어지는 죄 사함의 은총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신앙의 차원 즉 부활하신 주님을 믿음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이 오늘의 이 요한복음서 결론 부분의 핵심입니다. 오늘 읽은 이 복음서의 마지막 구절이 그것입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 31).
이러한 결론에 이르는 요한복음서의 마지막 장면에서 보인 토마스의 태도와 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그 핵심적 요소입니다. 토마스라는 제자! 그 말이 앞서는 사람! 그런 반면 열정적으로 예수님과 생사를 같이 하자고 했던 그 제자! 그러나 의심도 많고 자유분방한 사람! 그러한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결국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 28)하고 신앙을 고백할 수 있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 29).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 믿음의 눈을 떠야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기적, 즉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려내시는 것과 같은 엄청난 기적을 보아야만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기보다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 25)라는 그분의 말씀 자체에서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깨달을 수 있는 믿음의 눈을 떠서 그분이 가시는 길을 따라 가야 할 것입니다. 그분을 육안으로 보아야 할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새 사람으로 벌써 변화하여야 하는 길을 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새 삶을 시작한 사람이란, 기적과 같은 것을 봄으로써 변화된 사람이기보다, 믿음으로 새로워진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 25).
보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것
새 삶의 길로 들어섬이란, 즉 부활체험이란 보고나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렇게 세례로써 그 길에 들어갔지 않습니까? 그 세례 받는 믿음이란 “꼭 봐야겠나?”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 “보지 않고도 믿는 행복”(요한 20, 25)의 새 삶인 것입니다. 그 새 삶이자 부활의 세례를 받는 체험은 매주간 ‘첫날’에, 곧 주일에, 그리고 그 부활주일의 여드레 만에, 즉 매주일에 다시 그 똑 같은 주님 만나는 일로 얻는 체험입니다. 즉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와 같은 우리 주일미사의 자리에서 우리는 그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체험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행복
“보지 않고도 믿는 행복”(요한 20, 25)의 주인공들을 저는 지난 수요일(3월 30일)에 만났습니다. 순교성인 안장되었다가 이젠 흔적조차 남지 않은 서짓골 성지에서 그런 분들을 만났습니다. 병인년에 갈매못에서 순교하신 성인들의 유해를 죽음 무릅쓰고 모셔다 안장한 옛적의 서짓골 신자들처럼, 완장포구에서부터 두 시간 이상 걸어 순례한 160여명 교우님들은 그렇듯 ‘보지 않고도 믿는 행복’의 체험을 하신 얼굴들이었습니다. 순교성인들 묻히셨다가 이젠 흔적도 없이 ‘빈 무덤’처럼 처연한 ‘서짓골’의 그 자리를 찾아온 순례자들은 그렇게 ‘보지 않고도’ 믿음을 고백하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부활의 이른 아침에 막달레나가 찾아갔던 곳을 함께 찾아온 순례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그러한 순례자들은 그 체험으로 얻은 믿음을, 곧 부활체험을, 세상에 알리러 파견 받아 나아가는 사람들로 돌아갔습니다. 세상에 나가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 25)하고 말할 수 있는 그 신앙을 고백하며 순례자들은 떠나갔습니다. “거기서 무엇을 눈으로 꼭 봐야겠나?” 하는 물음에 대해서 그날의 순례자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눈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본 것이 있습니다.” 하고…
출처 - 하부내포성지 다음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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