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5주일

2016. 3.13. 10:00 · 하부내포성지

 


간음한 여인은 나의 모습!

간음한 여인과 고해성사




간음하다가 붙잡혀 온 여인의 이야기

 

오늘 미사의 복음서에서 간음하다가 붙잡혀 온 여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요한 8, 1-11). 그 여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뭐라 판정하실까 시험해보려고 그 여인을 붙잡아 그분 앞에 끌고 온 사람들이 그분보고 어서 대답하라고 악다구니를 합니다. 예수님을 배척하는 사람들이 그분을 함정에 빠트리려는 간계였지요.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고 나서 통쾌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취하신 태도가 너무 멋지시거든요. 간계를 쓰던 사람들이 슬슬 도망간 그 현장이 너무 극적입니다.

 

요한복음 7~8장 사이에 엉뚱히 끼어있는 사건


그러나 이 사건 보도를 하고 있는 성경의 본 의도는 우리에게 그런 통쾌감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이 사건 보도를 읽노라면 요한복음서의 전후 맥락과 연결되지 않는 내용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 간음한 여인에 관계된 사건보도는 요한복음서의 7장과 8장 사이의 그 상황과 배경 하에서 전혀 연관성이 없이 엉뚱한 사건처럼 끼어 수록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요한복음서 저자의 작품이 아니라고 성서학자들이 말하기도 합니다.


사순절에 이 대목을 주목하는 까닭

 

그런데 교회는 사순절에 특별히 읽는 내용으로 이 사건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도 사순절의 절정에 이르면서 이 이야기를 읽는 것이 우리 교회의 오래 된 관례입니다. ‘간음한 여인’이라는 이 야기기의 제목을 거룩한 전례의 자리에서 말하기엔 좀 곤혹스럽기도 합니다만, 교회가 굳이 이 이야기를 사순절의 절정에 읽는 데는 그 까닭이 있습니다. 더욱이 사순절 제5주일의 주일복음으로 읽기도 하는데, 그 까닭은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주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하고 고백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자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 모두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그분 앞에서 우리 모두는 오로지 죄인일 뿐이라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우리 스스로 인정하라고 이 간음한 여인에 관한 사건의 이야기가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여인처럼 우리 모두도 처단 받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서 죄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 앞에 끌려온 여인은 단죄 받을 것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들 모두와 같은 모습입니다. 유다인들은 그 여인을 돌로 쳐 죽여야 할 죄인이라면서 예수님 앞에 끌고 왔습니다. 그렇듯이 나 자신도 주님 앞에 서고 보면 그 여인처럼 감히 용서를 청할 터무니란 조금도 없는 나의 처지입니다. 그 여인을 끌고 온 유다인들의 저주의 소리처럼 내가 저질러온 죄악들이 그렇게 나를 주님 앞에서 고발하고 있습니다.

 

내가 저질로온 죄악에 따라 단죄받아야 한다면


그 유다인들의 요구에 따라 주님께서 “저 여인을 돌로 쳐라.”하고 말씀하신다면 저 여인은 죽게 됩니다. 그렇듯이 내가 저질러온 죄악에 따라서는 주님께로부터 단죄 받을 것 밖에 다른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정말 그렇게 나는 주님 앞에서 죄인일 뿐입니다. 간음하다 붙잡힌 저 여인처럼 추악한 모습으로 이제 아무런 변명을 할 자격도 없이 처참한 멸망 속에 묻힐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어찌하여 주님은 땅바닥에 알 수 없는 글만 쓰고 계시나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주님께서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 주님께서는 구부리고 앉아서 땅바닥에 낙서처럼 알 수 없는 글만 쓰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땅바닥에 알 수 없는 글을 쓰고 계시는 것처럼, 그렇듯이 이 순간은 나의 죄악의 과거에 대하여 어찌 한 마디 할 수도 없이 말문이 막힌 순간입니다. 파국을 직면하고 있는 긴장의 침묵만이 흐릅니다. 이제 나는 어찌 되는가 하는 캄캄한 불안이 숨을 조이는 순간입니다.

 

드디어 입을 여신 예수님


이 긴장의 순간에 주님께서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바라보십니다. 그리고는 무엇을 말씀하실 것인가, 긴장이 폭발할 순간입니다. 저분의 입에서 나올 그 한 마디로 나는 이제 끝장입니다. 드디어 주님께서 입을 여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 7)

 

우당탕 쿵쾅, 돌덩어리들이 사방에서 날아올 순간입니다. 나의 머리통과 가슴과 팔다리가 으깨지고 짓이겨질 순간입니다. 한데 주님께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시 땅바닥에 낙서하시려고 구부리시고 사방은 정적뿐입니다. 부스럭거리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조금씩 멀리 사라지는가 싶더니 사방은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습니다. 아직도 폭발하지 않고 팽팽하기만 한 긴장뿐입니다.

 

너를 죽이려던 이들은 다 어디 갔느냐?


한참 만에 주님께서 그 정적을 깨십니다. 땅바닥위의 낙서를 중지하시고는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려 질문하십니다. 아주 낮은 음성으로 그분은 긴장을 살짝 풀어 물어보십니다. “너를 단죄하여 죽이라던 사람들이 다 어디 갔느냐?”(요한 8, 10 참조) 주님께서 이렇게 나에게 나지막하게 건네시는 이 물음에 나는 뭐라 대답해드릴 수 있나요? “아무도 없습니다.”하고 대답할 수 있나요? 아니면 아무 대답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만 있어야 하나요? 이제는 나를 단죄하실 분은 정작 그분뿐 이시니까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저 여인은 대답했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요한 8, 11)하고 말입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하던 사람들이 모두 물러간 사실을 이렇게 저 여인은 담담하게 확인합니다. 왜 그렇게 대답할 수 있었을까요? 감히 그렇게 여인이 대답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녀를 바라보시던 그 순간 주님의 눈빛은 전혀 단죄하실 분이 아니라는 확신에서 그렇게 대답했던 것입니다. 그녀의 그 확신은 왜일까요?

 

마음 속에 스며든 양심의 빛으로 죄악의 구름을 걷어내


사실은 그녀를 단죄하던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물리쳐주신 것입니다. 악의로 가득 찬 그 무리를 예수님께서는 어떤 실력행사로써 물리치신 것이 아니라 모두의 마음속에 소리 없이 스며드는 양심의 빛으로 죄악의 구름을 걷어 내주신 것입니다. 고발하는 자들도 고발을 당한 사람도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무엇인가 낙서하듯이 쓰시는 그 침묵의 긴장 속에서 양심의 가책으로 자신들의 죄악을 가슴에다가 말없이 기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다른 이의 죄를 고발한다는 건 내 죄를 덮으려는 짓


다른 사람의 죄악을 고발하는 짓이란 사실은 자신들의 죄악을 그 고발로 덮으려 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악을 다른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 떠내 보내려 하는 비열함이 그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죄로써 불화살을 삼아 엉뚱한 방향의 사건을 향해 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도덕한 정치 노름에서 흔히 보아온 작태들이 그런 비열함입니다. 사람들의 눈앞에서 자신들의 죄과에 대한 식별을 차단하려는 연막전술로 타인을 희생물로 삼으려는 부도덕성이 그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미끼로 하여 예수님을 함정에 빠트리려는 그 비열함이 그것입니다. 그렇듯이 자신들의 더러운 죄과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막아보려는 정치 게임으로 요즘 선거철이 다가온 이 나라가 온통 시끄럽습니다. 모두들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부도덕의 극치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죄 없는 자들이 먼저 돌을 던져라


그렇듯이 유다인들은 간음한 여인을 내세워서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 자신들의 더러운 입지를 정당화 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후안무치의 부도덕성을 정공법으로 맞서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부도덕한 양심으로 하여금 무거운 침묵의 맛을 보도록 하시고, 그 침묵의 공간에서 메아리치는 대답을 던지십니다. “죄 없는 자들이 먼저 돌을 던져라.”하고 말입니다. 그분의 그 대답은 각자의 양심이 침묵으로 답해야 할 대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침묵의 양심들은 부도덕의 악다구니를 더 이상 지를 수 없이 발소리도 내지 못하고 멀리 사라져갔습니다. 악의의 불화살은 그렇게 꺾이고 말았습니다.

 

처벌받을 죄가 아니라 용서받을 죄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다시 침묵의 글을 쓰십니다. 긴장의 침묵을 부드럽게 차단하시어, 그분은 죄악으로 고발당하여 죽어야 할 그 극도의 불안 속에 서있는 여인의 긴장을 풀어주십니다. 죄악의 고발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시면서 말입니다. 이미 죄악의 고발은 잦아들었기에 그 죄악의 당사자로 하여금 이제 그 죄란 처벌받을 죄가 아니라 용서받을 죄라는 것을 깨우쳐주시는 말씀이 그분의 그 물음이었습니다. “너의 죄를 고발하던 자들은 어디에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우리는 감히 그분에게 대답합니다. “아무도 없습니다.”하고 말입니다. 그 여인의 대답이자 죄 많은 나의 이러한 대답은 곧 우리 교회의 대답입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모여온 우리 죄인들의 모임이 곧 교회이거든요.


내 죄를 고발한다는 것 - 고해성사


그래서 죄인인 나는 교회 안에서 나의 죄를 고발합니다. 교회 안에서 나의 죄에 대한 고발은 곧 고해성사입니다. 그래서 죄 많은 사람들의 이 교회는 나의 죄를 가지고 하느님께 감히 맞서 고발하지 못하고 그저 주님의 용서를 간구할 뿐입니다. 그렇게 고해성사는 이루어집니다. 나의 죄에 대하여 교회로 하여금 나와 함께 주님께 용서를 청하도록 하는 고해성사가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나를 처벌하지 못하는 교회이고 오히려 교회가 나의 죄를 교회의 죄로 고백하는 영역이 고해의 자리입니다.

 

병 낫게 하는 기적보다 더 큰 기적, 사람을 낫게 하는 기적


여기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 11)하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어느 불치 병자를 낫게 하여주신 기적보다도 더 위대한 기적을 이루어주십니다. 여기서 ‘병을 낫게 하는 기적’보다도 더 큰 기적인 ‘사람을 낫게 하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기적처럼 정치권에서도 다른 사람들에게만 탓을 찾는 비열한 짓들을 뚝 그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서로 물고 뜯는 사람들이 국민들의 지도자 위치에 오르려는 작태를 보는 국민의 마음은 상처만 받습니다. 진정 고해성사와 같이 우리 모두와 개인은 주님 앞에서 오로지 죄인임을 깨닫는 거기에 새로운 삶의 희망이 엿보이는 것입니다. 죄인임을 모두가 먼저 스스로 깨닫는 순간에 우리 사이에 기적은 일어납니다.


그 분 앞에서 우리 모든 죄악이 소멸한다는 깨달음


죄지은 사람도 그리고 다른 사람의 죄를 고발하는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그분 앞에서는 모든 죄악이 그 힘을 잃게 되고, 그분의 용서로써 새로운 발걸음의 날을 시작하게 된다는 것을 ‘간음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가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 끝에 얻는 것이 그래서 예수님의 태도에 대한 통쾌감이기보다는, 그분 앞에서 우리 모든 죄악이 소멸한다는 깨달음이어야 합니다. 죄인으로서 그분 앞에 선 우리의 처절한 모습을 먼저 깨닫고 보면, 어느새 그분은 오로지 우리의 죄를 없애주시는 분으로 우리 앞에 계십니다. 참으로 멋지신 예수님의 모습은 바로 우리 모두의 죄를 없애주시는 그 모습이십니다.

 

이 사건의 교훈은 새로운 삶으로의 전환을 촉구하는 것


그래서 ‘간음하다가 붙잡혀 온 여인’에 관한 이 사건의 이야기는 교회 초기부터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삶으로의 전환을 하도록 촉구하는 교훈으로 활용되어 왔습니다. 오늘날에도 단계적 세례예식에 있어서 예비자들에 대한 마지막 단계의 수련식 때에 이 이야기를 복음으로 들려줍니다. 부활절에 세례를 받기 위한 정식 절차의 마지막 수련식을 사순 제5주일에 거행하면서 듣게 되는 복음인 것입니다.

 

그렇듯이 다가오는 부활절에 새로운 삶으로의 전환을 다짐하여 우리는 진정 참회하는 자세로 주님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참회를 통하여 우리는 부활성야에 우리의 세례를 갱신하는 서약을 할 것이며, 그러하기 위해서 고해성사에 먼저 임하기로 합시다.



출처 - 하부내포성지 다음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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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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