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3주일

2016. 2.28. 10:00 · 하부내포성지 만수리 공소

 


뉘우칠 줄 아는 존재는 인간 뿐!

아름다운 세상은 회개로써 시작된다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다

 

우리는 오늘 사순절 제3주일의 복음 메시지로 회개 촉구를 강렬하게 전해 듣고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다.”하는 오늘 주님의 말씀입니다(루카 13, 5).

 

사순절은 극기와 보속의 발걸음


우리가 기도 가운데 극기(克己)와 보속(補贖)의 발걸음으로 나아가는 이 사순절의 길은 회개를 그 바탕으로 합니다. 극기와 보속으로 자신을 갈고 닦음으로써 새롭게 되는 사람의 진정한 변화란, 그 근본이 회개인 것입니다. 그 회개란 자신의 속을(내면을,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생각을, 마음을, 의지를 바꾸는 것이 곧 회개인 것입니다. 그것은 곧 자신을 바꾸는 것입니다. 회개, 그것은 나를 내가 바꾸는 일인 것입니다.

 

나의 회개가 아니고서는 세상이 새로워지지 않는다


그러한 ‘나의 바꿈’, 즉 회개가 아니고서는 우리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해서 우리는 말합니다. “내가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고 말입니다. 오늘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과수원의 주인과 재배인 사이에 오간 말의 예화로, 우리 자신이 지금까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였다면, 이제 앞으로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무화과 나무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루카 13, 6-9 참조). 


하느님은 나무의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시는 분


열매를 맺기까지 기다려주시는 하느님의 뜻을 예수님께서 전해주시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무화과나무로의 변화를 기다려주시는 하느님께서는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시는 분(루카 13, 8-9 참조)으로 당신의 성자(예수님 자신)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러한 하느님을 찬미하는 우리는 화답송으로 다음과 같이 오늘 노래합니다.

 

“주님께서는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 당신을 경외하는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네.”(오늘의 제1독서 후 화답송 중 시편 102, 8-11의 내용)

 

하느님은 인자하고 분노에 더디신 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자하셔서 분노에 더디십니다. 혹여 잘못을 저질러 온 것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당장 징벌하시지 않고, 우리가 그 잘못을 청산하여 변화되는 날을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늘이 땅에서 높고 높은 것처럼 인자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변화되기까지 기다려주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허약한 무화과나무라면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시듯이,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교회를 통하여 은총의 거름을 얻을 수 있게 하여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변화될 수 있는 기회로써 사순절이라는 은총의 기회가 설정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그 사순절 과제로써, 회개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행보를 걷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즉 스스로의 변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한 변화로써 거듭나야 합니다.

 

회개는 자신에게 책임을 묻는 태도로 시작된다


그렇듯이 거듭나기에 이르기까지 회개는 자기 스스로에게 책임을 묻는 태도로써 시작 됩니다. 우리가 사순절에 판공성사를 보는 까닭은 주기적인 관례에 따르기 위한 행사가 아닙니다. 나 자신이 새로워지기 위한 회개의 행위가 곧 사순절의 참회 성사인 것입니다.


나 자신의 허물을 먼저 살펴라

 

그렇듯이 나 자신 먼저 새로워지는 우리 각자의 변화, 즉 회개로써 거듭나는 이 사순절의 길에서 우리는 그래서 각자 나 자신의 허물을 먼저 살핍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늘 혼란스럽고 사람들 사이에 싸움이 끊이지 않는 까닭은, 사람들끼리 서로 탓하고 책임을 떠넘기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싸움의 세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가 먼저 자신에게 책임을 묻고 뉘우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동물에게는 뉘우침의 능력이 없듯이, 뉘우칠 줄 아는 존재는 오로지 인간뿐입니다. 그래서 뉘우칠 줄 아는 사람, 즉 자기 자신을 탓할 줄 아는 인간은 자신의 변화와 더불어 벌써 자기 주변의 세상을 변화시키게 됩니다.

 

진정으로 뉘우치는 태도가 사람 모습 중 가장 아름답다


진정으로 뉘우치는 태도는 사람의 모습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인 것이기에, 그로써 서로간의 미움을 녹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즈음에 이른바 ‘국가비상사태’라는 정부의 발표를 들으면서 ‘테러방지법안’에 대한 여야 간 대립을 관망하는 가운데 우리 국민들은 불안과 답답함 속에 심란하기만 합니다. 현대세계에 그 유래가 없는 북한의 악독한 독제체제가 핵폭탄 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연이어 실행하는 가운데, 남한의 권력 당국이 북한의 그러한 무모성을 빙자하여 개성공단 폐쇄와 사드 배치 시도를 통한 불안을 조성하고 주변 국제정세 속의 우리 민족을 부끄럽게도 긴장국면의 울타리에 가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 민족의 처지가 참으로 가련하고 세계인들의 눈앞에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전 국민을 수상한 존재로 감시망에 가두겠다는 것인가?


국제사회에서 우리 ‘한반도’의 현실을 말할 때, 그 명칭은 ‘Korea’라는 것입니다. ‘한반도의 위기’란 Crisis of Korean Peninsula입니다. 그리고 북한과 남한을 일컬어 North Korea와 South Korea라 합니다. 이러한 명칭으로 보도되는 뉴스를 미국이나 유럽 등 외국의 일반인들이 들을 때, 어찌하여 Korea라는 곳의 민족은 그 작은 땅위에서 저렇듯 서로 원수가 되어 늘 일촉즉발 싸우려 드는가 하고 혀를 내두를 것입니다. 참으로 부끄러울 뿐입니다. 한 민족으로 우리는 어찌하여 이런 부끄러운 모습으로 언제까지 이렇게 적대감 속에 서로를 경계하고 미워하며 곧 죽일 듯이 싸우는 모습을 국제사회에 보여주어야 한단 말입니까? 그리고 더욱 남한에서 이제는 ‘테러방지법’이라는 것을 제정하여 아무런 법률적 제제 없이 통화감청과 계좌감시 등으로 정보기관이 국민을 옥죄려 하고 있습니다. 전 국토를 감방처럼 만들겠다는 것인가! 전 국민을 수상한 존재로 감시망에 가두겠다는 것인가!

 

우리 민족 최근대사의 이렇듯 불행한 상황은 사실상 국민들의 탓이 아닙니다. 체제수호를 빙자한 소위 정치지도자들이란 자들의, 즉 권력자들의 탓일 뿐입니다. 우리 민족의 분단 상황에서 남북한 간의 국민을 불안 속에 몰아넣어 옥죄면서 권력유지의 야욕으로 군림하는 자들의 탓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남북한의 권력자들은 서로를 나쁜 놈으로 규탄함으로써 양쪽의 국민(인민)으로 하여금 자기들의 권력에 맹목적으로 순종하도록 정세조정을 합니다. 그러면서 분단으로 치러야 할 부담은 죄 없는 국민(인민)들이 짊어지고 있습니다. 마치 오늘 복음 성경에서 빌라도에게 학살당한 갈릴래아 사람들과 실로암 탑의 붕괴로 깔려죽은 사람들처럼(루카 13, 1-5 참조), 추궁당할 잘잘못도 모른 채 남북한의 국민(인민)들이 당하는 불행입니다.

 

북한보다 우월한 민주체제를 수립한 대한민국


남북한 통치세력은 서로의 증오에 길들여진 국민(인민) 위에 권력유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 전체의 이 불행에 대한 그 탓을 남과 북 사이의 국민(인민)들이 서로에게 총체적으로 뒤집어씌우면서 증오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남북한 국민(인민)들은 자신들의 통치자들에게 이렇듯 불행한 상황의 탓을 엄정하게 물어야 합니다. 그것을 우선 남한의 국민들이 정치지도자들에게 물을 수 있습니다. 남한의 국민들이란, 그 통치자들을 국민의 손으로 가려 세우는 ‘주권행사’로써 북한보다 분명히 우월한 민주체제를 수립해온 국민이기 때문입니다.


확실한 주권행사야말로 가장 완전한 안보의 보장


확실한 ‘주권행사’야말로 가장 완전한 ‘안보’의 보장인 것입니다. ‘주권행사’가 확고한 남한의 체제라면, 왕조국가처럼 주권을 독재자 한 사람이 행사하는 북한 체제보다 분명한 안보를 보장하게 됩니다. 그런 민주체제의 남한을 북한독재세력이 넘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남한 체제의 확고한 우월성을 확보하는 것이 최고의 국가안보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한 남한 체제의 우월성에 대한 인식이 북녘의 동포들에게 점차 스며들어감으로써 우리 민족의 하나 되는 날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논지로써, 우리는 현재까지 지속되는 민족적 불행의 원인을 먼저 우리 자신 안에서의 상황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치지도자들(권력을 쥔 사람들)이 또한 자신의 잘못 된 야욕을 반성해야 합니다. 반성할 줄 모르는 자들은 지도자이기는 고사하고, 더욱 사람이기를 포기한 자들입니다.

 

자기 탓을 뉘우칠 수 있는 인간이라야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짐승은 반성할 줄 모르는 반면에, 자기 탓을 인식하고 뉘우칠 줄 아는 ‘반성능력’을 지닌 존재가 ‘사람’입니다. 그런 반성능력에 의해서 우리 인간은 신성(神性)에 접근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즉, 자기 탓을 뉘우칠 수 있는 인간이라야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인간이기에, 함께 사는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바꾸어 나갈 능력을 또한 지니고 있습니다.


해서 그러한 뉘우침으로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 인간의 본래적 선성(善性)을 되찾는 마당이 열리고 새로운 세상으로의 전기(轉機)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뉘우침을 우리는 회개(悔改)라 합니다. 회개하는 사람이라야 새로워지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회개를 더욱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심정


오늘은 마침 2월 28일이면서 이러한 회개 촉구 메시지의 사순 제3주일입니다. 본래 2월은 28일로 끝나지요. 그런데 혹여 우리가 아직도 회개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래도 하느님께서 우리의 회개를 여전히 기다리고 계신다는 의미인 듯, 덤처럼 내일 29일로 하루가 더 남은 올해의 2월입니다. 우리의 회개를 더욱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심정을 상징하듯, 올해의 2월은 우리에게 하루를 선물한 것 같습니다.

 

그렇듯이 회개는,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인간 자신의 본모습을 되찾는 것이자 세상을 참 사람의 세상으로 되찾는 일입니다. 그래서 진정 뉘우침을 보이는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자기의 죄를 인정하는 사람이라야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기에 그렇습니다. 정치지도자들도 자기 탓을 살필 줄 알고, 모든 사람들이 세상의 죄를 자신의 탓으로 읽을 수 있는 양심 속에서 새롭게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이 다시 탄생하며, 그러한 사람들로써 세상 또한 아름답게 변화됩니다. 부활절을 향한 우리의 사순절은 그래서 회개의 여정이요, 그로써 새로운 삶을 향한 행보인 것입니다.  



출처 - 하부내포성지 다음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204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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