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5주일

2016. 2.7. 10:00 · 하부내포성지 만수리 공소

 


주님께 붙잡힌 우리들

새 봄의 소망처럼 우리 함께 새로운 날들을!




루카복음 5장 1~11절은 특유의 편집기사

 

우리가 오늘 봉독하는 루카복음서 5장의 1-11절은 이 복음서 특유의 편집 기사라 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오늘의 이 내용 병행구절을 다른 복음서에서 보면, 그 분위기를 전혀 달리하는 문맥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시다가 어로작업을 하고 있던 어부들(시몬과 안드레아 형제 ․ 야고보와 요한 형제)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 19 ; 마르 1, 17)하고 말씀하시자 즉시 그 어부들이 그물과 배와 아버지까지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다고 전하고 있습니다(마태 4, 18-22 ; 마르 1, 16-20 참조).


왜 갈릴래아가 아니라 '겐네사렛' 호수일까


그러나 루카복음서는 호수 명칭을 이방인들이 부르는 것처럼 ‘겐네사렛 호수’라고 하면서, 예수님께서 그 호숫가에 서 계시다가 그물을 그만 거두어 씻고 있는 어부들에게 다시 그물을 치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도합니다. 그 때 고기잡이라면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어부 시몬이 처음 보는 예수님께 즉 어부도 아닌 그분께 자기들이 하루 저녁 내내 헛수고 한 사실을 실토하면서도 그분 말씀대로 다시 한 번 더 그물을 치고 결국은 엄청난 어획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 말씀 따라 고기를 많이 잡게 된 사실을 요한복음서는 부록인 그 21장에 ‘티베리아스 호수’라는 또 다른 이방인들의 인지도에 맞춘 배경 설정에다가 여러 정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도 루카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의 부활 이후 사건으로 전하고 있습니다(요한 21, 1-14 참조).

 

루카가 전하는 시몬 베드로의 색다른 반응


그런데 루카복음서는 이 예기치 않은 어획 체험 후에 보인 시몬 베드로의 반응을 아주 색다르게 전해주고 있는데, 그 점이 오늘 우리가 깊이 새겨볼 내용인 것입니다. 요한복음서 21장에서의 베드로의 반응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에 대한 감격을 강조하고 있는데, 오늘 루카복음서에서는 사실상 예수님의 활동 초기 사건 중에 베드로가 처음 뵙는 분에 대한 체험에서 보인 특이한 반응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 8) 하고 말한 베드로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베드로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 5, 10) 하고 말씀하시자, 거기 있던 다른 사람들(야고보와 요한)도 베드로와 함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다는 것을 오늘의 루카복음서가 전하고 있습니다(루카 5, 11 참조).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 그물'에 먼저 포획되었다


여기서 루카복음서가 강조하고 있는 점을 우리는 쉽게 식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그물 다루는 데 선수였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 그물’에 먼저 포획되었다는 것과, 그런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아보았기 때문에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함으로써 그분 앞에 자신의 부당성을 완전히 승복하면서도 그분의 명령에 따라 그분의 제자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 덕분에 감당할 수 없이 많은 어획 수거작업에 동료들의 도움 요청을 할 수밖에 없었던 베드로와 더불어 그 현장의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실입니다.

 

이사야 6장 1절~8절에서 힌트를 얻는다


이러한 오늘 복음서의 특이한 내용을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는 오늘의 제1독서인 이사야 예언서 6장 1-8절에서 많은 도움을 얻습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이사 6, 3 : 우리가 미사 때마다 환호 하는 노래)하는 천사들의 찬미를 들으면서 하느님 현존을 체험한 이사야가 자신을 죄인으로 자각하여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이사 6, 5) 하고 전전긍긍 부르짖다가, 자기의 죄스러운 상태에 대한 치유은사를 내려주신 하느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낼까?” 하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는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 6, 8) 하며 주님의 명에 따라 완전히 투신하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베드로와 이사야의 공통점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와 이사야 두 사람 사이의 공통점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이 두 사람 다 주님한테 ‘붙잡힌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죄인으로 자인하고 주님의 명령을 전적으로 따른다는 점입니다. 저는 그래서 이러한 사실을 보면서, 하느님께는 대단히 무례한 표현입니다만, 주님께서는 마치 고구마를 캐듯이 우리를 당신 손에 줄줄이 매달려 딸려나가게 하시는 분이라고, 어쩌면 얌체 같으신 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에게 어쩔 수 없이 끌려가게 우리를 잡아당기시는 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1년 먼저 은퇴한 동기 사제와 있었던 일


하느님께서 그렇게 잡아당기시는데, 우리는 저항하기 어렵습니다. 사실상 모든 것이 하느님 손에 달려있다는 깨달음이 우리의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제 저의 친구 사제를 만나 대화하면서 그러한 깨달음을 함께 했습니다. 그 친구 사제는 지난 1월에 현직에서 물러나 은퇴생활로 들어섰습니다. 저와 함께 사제 되어 우리 교구에서 43년째 몸담고 사는 친구입니다. 56년 전에 저와 함께 신학교에 입학하여 같은 날 사제가 된 친구입니다. 70살이 되면 교구의 현직에서 물러나 은퇴하기로 되어있는데, 그 친구는 1년 앞당겨 은퇴했습니다. 저도 올해를 현직의 마지막해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 친구는 은퇴한 심정을 저에게 담담하게 말해주었습니다. 지난 세월에 대해서 아쉬움도 남지만, 이제는 하느님 대전에 자신의 모습을 좀 더 가지런히 보여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한답니다. 사람들 앞에서보다도 하느님 면전에 서있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며 남은 생애의 길을 가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사제생활 42년, 내 마음을 비추어 보니


그 친구와 식사하고 헤어진 다음에 어제 오후 저는 그의 그 심정을 저 자신의 마음에다가 비추어보았습니다. 제가 여기서 성지성역화의 일에 동분서주하면서 사실상 저는 하느님 면전보다는 바쁜 일들과 사람들을 대하는 시간에 쫓겨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저 자신 역시 지금까지 신학생으로 그리고 사제로 살아온 수십 년 동안 하느님 손에 잡아당겨져 살아왔다고 느낍니다. 저는 신학생 시절에 여러 번 신학교를 그만 둘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차마 그리 할 수 있는 즉, 성소를 포기할 용기(?)를 갖질 못했습니다. 사제가 되어서도 여러 번 포기하고픈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감히 그리 할 수가 없었습니다. 비겁한 변명을 하자면, 성소 즉 하느님의 부르심을 거역할 경우에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성소포기의 용단(?)을 차마 내릴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저의 비겁하고 소극적인 마음가짐으로 말미암아 사제생활 자체가 불행한 것처럼 느껴지던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제가 사제로서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일들에 휩싸여서 지내다 보면 즐거움을 되찾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제로서 42년을 살았습니다. 


주님의 손에 잡힌 신세라는 깨달음


돌이켜보면, 질질 끌려오면서 살았던 세월이 많습니다. 그러한 세월이 아마도 하느님께서 잡아당기신 저의 살아온 세월이었다 할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과 더불어 어제 만났던 동료 사제의 담담한 소회가 저로 하여금 이제부터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자세여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이왕지사 고구마 줄기를 잡아 올리시는 하느님의 손길에 기꺼이 딸려가야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이미 주님의 손에 잡힌 신세라는 깨달음을 새롭게 해야겠습니다. 즉, 주님께서 던진 그물에 포획된 저 자신이라는 깨달음으로 남은 삶을 기꺼이 바쳐야겠다는 것입니다.


가치있는 삶을 사는 깨달음이란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을 그렇게 당신의 것으로 삼으십니다. 보잘것없는 나를 주님께서는 뭐 그리 대단한 값어치 있는 존재로 여기시고 당신 손안에 꽉 잡아넣으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러한 존재라는 깨달음이 있다면 삶 자체가 더욱 값진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살아갑시다. 그렇게 사는 법을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 가운데서 터득합시다. 자신을 칠삭둥이 같다고(1코린 15, 8 참조) 토로 하시는 바오로 사도는 오늘 제2독서 코린토 1서 15장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 것입니다.”(1코린 15, 9-10).

 

주님께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맡겨드린다면


그렇습니다! 주님께 우리 자신들을 전적으로 맡겨드립시다. 우리는 ‘하느님께 붙잡힌 신세’라는 새로운 깨달음이 곧 신앙이요 그러한 믿음이 있음으로써 철저한 투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하고 자청한 이사야처럼, 다마스커스를 향하던 당돌한 행보 중에 주님에 의하여 자신이 무너지는 깨달음 얻고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투신하게 된 바오로처럼, 그리고 어부로서 전문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엄청난 어획 체험을 함으로써 예수님께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완전히 자신을 맡겨드리는 사람이 된 베드로처럼 말입니다.

 

이렇듯이 주님 앞에서 우리도 나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 깨닫고 보면, 전적으로 삶을 바꿀 결행(決行)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오늘 예수님의 ‘말씀 그물’에 먼저 걸려듦으로써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듯이, 우리 역시 먼저 주님께 붙잡힌 사람이어야 다른 사람들을 낚는 어부로서 세상에 주님 사랑의 그물을 치러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만수리 우리 산골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만수산과 아미산에는 아직 흰 눈이 가득하지만 이미 입춘(立春)을 지난 계절입니다. 이번주간의 설 명절을 지내면 그 다음주간에 우수(雨水)가 옵니다. 눈을 녹이는 봄비가 내릴 것이라 예고된 계절입니다. 그리되면, 밭둑에 새싹들이 솟아오르겠지요. 새봄맞이의 문을 마음에서부터 열어 제키기로 합시다. 


새봄처럼 이번 주간에 사순절을 시작합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봄철이지요. 어제 오후 늦게 해지는 시간에 이웃 마을 노인 한 분을 찾아 설맞이 인사로 선물을 드리고 돌아오는데, 긴 겨울 추위를 견뎌낸 밭둑에서 한 아주머니가 냉이를 캐고 있었습니다. 봄은 그렇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새싹들이 솟아오르듯이 아이들이 방학에서 깨어나고 새 학기를 준비하는 이 때입니다. 그렇듯이 우리 모두 새로운 계절의 시작을, 즉 사순절을 맞이하는 계절로 새 출발을 하면서 모두 주님께 이사야처럼 아룁시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 6, 8)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바오로처럼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하느님의 은총으로 일할 수 있도록(1코린 15, 10 참조) 서로 축원하고, 베드로처럼 벌떡 일어나 주님을 따라나섭시다(루카 5, 11 참조). 그러한 우리의 삶을 다짐하는 우리의 믿음을 주님 앞에 함께 고백하시면서, 봄의 기지개처럼 주님께 소망을 올립시다.



출처 - 하부내포성지 다음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200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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