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1주일
2016. 2.14 · 하부내포성지 만수리 공소
내 그림자와 같은 악마와 대결하여!
광야에서 답해야 할 우리의 세 가지 외침!
부활절을 준비하는 전통 - 사순절
우리는 지난 수요일에 머리에 재를 얹고 단식재와 금육재를 지키면서 사순절의 여정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40일간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부활절을 준비하는 전통을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준수합니다.
처음에는 사흘간의 기도, 단식, 자선이었다
본래 초기 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축일 전 사흘 동안 특별한 기도와 단식과 자선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러다가 4세기부터는 그 사흘 동안의 일을 40일 동안으로 늘려서 실천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단식하셨던 것처럼(루카 4, 2 참조) 기도와 극기를 통하여 악(惡)의 유혹을 끊고 새로운 다짐으로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고자 하는 열망의 발로였습니다. 그래서 이 기간을 자연스럽게 사순절(四旬節) 즉, ‘40일간의 절기(Quadragesima)’라고 일컬으면서 ‘봉재(封齋)시기’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절식하면서 검소하게 지내는 시기라는 뜻이지요.
사순 시기는 봄의 절기
이러한 사순 시기는 공교롭게도 봄의 절기입니다. 지난 금요일부터 봄비가 흥건히 내렸습니다. 그래서 우리 만수리 산골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에 쌓여있던 눈이 모두 녹아내렸습니다. 이번 주간 금요일이 봄비 내린다는 우수(雨水)인데 그 봄비가 앞당겨 촉촉이 내렸습니다. 그리고 곧 새싹이 올라올 듯 우리 공소 밭의 흙이 부드러워 보입니다. 이렇듯 만물이 소생하여 새로운 기운으로 생동의 환희를 펼치는 이 절기에 하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극기로써 자신을 움츠러들게 해야 하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해마다 맞이하는 이 사순절은 저의 기분에도 매우 못마땅합니다. 길고 긴 겨울의 추위를 가까스로 헤쳐 나와 봄맞이를 하려는 우리에게 이 사순절이 찬물을 끼얹는 격입니다.
봄은 그렇게 마음이 흔들리는 계절
그렇습니다. 생동하는 자연도 그렇거니와 우리 인간들도 들뜨게 되고 집밖으로 뛰어나가고 싶은 충동에 맞춰 이 봄의 계절은 마음을 산만하게 흩으려 놓습니다. 오죽하면 봄바람에 처녀들 바람난다는 속된 말이 생겨났을까마는 봄은 그렇게 마음이 흔들리는 계절입니다. 해서 사순절은 유혹의 계절, 곧 봄입니다.
봄 볕에 그슬려 임도 알아보지 못한다
하지만 봄나들이로 희희낙락하는 얼굴보다는 “봄볕에 그슬려 임도 알아보지도 못한다.”는 속담의 말마따나, 봄바람에 터진 손등과 그슬린 얼굴로 부지런히 새로운 생명을 심고 가꾸려고 농부들은 논밭으로 나갑니다. 이곳 만수리의 교우 여러분들은 벌써 비닐하우스에서 고추 모를 가꾸면서 허리 구부려 흙을 일구고 있습니다. 그런 농부 같은 태도로 이 계절의 뜻을 헤아리라는 것이 사순절 정신이라 할 것입니다.
봄은 땅을 갈고 씨를 심어 생산을 시작하는 계절
해서, 봄놀이로 소비를 부추기는 계절이 아니라 땅을 갈고 씨를 심어 생산을 시작하는 봄의 계절이어야 하는 것처럼, 이 사순절은 우리 자신을 다시금 추스르고 마음의 밭에 은총을 심어 새로이 변화하는 삶을 일으키는 시기인 것입니다. 즉 농부가 묵은 땅 갈아엎고 새 흙으로 고르게 다져 씨앗을 심어 싹을 틔우는 봄철이듯이, 우리는 이 사순절에 자신의 낡은 습관을 떨쳐버리는 회개로써 생활 속에 주님의 은총을 씨앗처럼 심어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부활절을 준비해가야 하기에, 이 사순절은 ‘은총의 시기’라 일컬어집니다.
매년 이렇게 봄맞이로 다시 은총의 사순절을 새롭게 맞이하듯이, 늘 그렇게 주님의 은총은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하여줍니다. 그러한 새로운 인간으로의 변화를 우리는 오늘 예수님께서 유혹을 이기시는 모습에서 터득해야 합니다.
유혹이란 무엇입니까?
유혹이라는 것은 나를 해코지 하려는 원수가 눈에 보이게 나타나서 마수를 뻗치는 것이겠습니까? 그 원수란 나 아닌 타자(他者)로서 나타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나를 걸려 넘어지게 올가미를 놓아 유혹하는 악마는 사실 나 자신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내 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즉 악마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 자신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악마는 늘 나와 떨어지지 않고 어디든지 나를 따라다닙니다. 그 악마의 모습은 곧 나를 붙어 다니는 나의 그림자와 같습니다. 나에게 늘 붙어 다니면서 나를 약하게 만들고 나를 죄악에 빠지게 하는 악의 세력이 곧 악마입니다.
악마를 볼 수 없는 이유는 내 안에 들어와 붙어 있기때문
그래서 저는 이러한 생각이 듭니다. 늘 그렇게 나에게 붙어 다니는 그러한 악마의 모습은 곧 나 자신의 그림자일 거라는 생각입니다. 우리 인간이 아담 이후 원죄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늘 그렇게 붙어 다니는 것이 악의 유혹이라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그 유혹은 나의 그림자처럼 늘 나를 따라다니면서 나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걸핏하면 나를 악한 생각에 담그게 합니다.
나의 그림자와 같은 그 악마, 그것은 어둠속에서 나를 따라붙지 않습니다. 어둠이란 죄악에 이미 빠져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악마가 지배하는 상태이기에 이미 그 어둠 속에서는 나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밝음 속에 거닐 때 그림자가 나를 따라다닙니다. 내가 주님께 나아가고자 노력할수록 악마는 나를 따라붙습니다.
예수님에게도 그림자가 있었다
그렇듯이, 오늘 유혹을 받으신 예수님도 인간이시기에 그분에게도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악마의 유혹이 따라다닌 것입니다. 그래서 하마터면 빠지게 되는 것이 유혹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세상을 사는 동안 끊임없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것이 그러한 유혹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유혹하는 악의 세력이 얼마나 집요하고 강렬한 것인지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깨닫게 하여 주는 것이 오늘의 예수님이 당하신 ‘유혹 사화’(루카 4, 1-13)입니다.
예수님을 집요하게 유혹한 악마는 '인간의 본능'이었다
예수님에게도 그렇듯 집요하게 그리고 강렬하게 다가왔던 유혹의 악마는 도대체 그 정체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인간의 본능이었습니다. 인간의 그 본능이란 나 자신을 붙들고 나를 약하게 하는 육욕과 권세욕과 자기과시욕인 것입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인간을 어떻게 흔드는 것인가를 우리는 오늘 예수님께서 당하신 유혹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배고픔에 대하여, 명예에 대하여, 그리고 자만심에 대하여 예수님을 시험하는 악마의 유혹이 그것입니다.
배고픔을 참기란 참으로 어렵다
우리의 육욕은 어떠한 것입니까? 배고픔을 참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는 그런 육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의 육체는 배고픔을 면하기로 그 욕망을 멈추지 않고 더욱 나아가 끊임없이 쾌락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먹고 마시고 육체의 즐거움을 채우기 위한 향락 산업이 도처에 성황을 이룹니다. 이러한 풍조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신명 8, 3 참조)는 말씀으로 육체의 욕망을 물리치십니다(루카 4, 4).
권세욕은 우리를 비굴하게 만든다
우리의 권세욕은 어떠한 것입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비굴하게 만들기 까지 하면서 세상에서 얻는 것을 가지고 권세를 지닌 것처럼 착각합니다. 권력에 빌붙어서 신념을 팔아먹는 짓은 비단 정치인들만의 것이 아니고, 평범한 사람들도 세상 체면 때문에 양심을 저버리는 짓을 숨 쉬듯이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듯 세상에 대한 굴종으로 그 세상 것을 얻으려 하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께 경외하고 그분만을 섬겨라.”하는 말씀(신명기 6, 13 참조)을 상기시켜 주십니다(루가 4, 8).
자기과시욕은 연약한 자신을 깨닫지 못해 생기는 일
우리의 자기과시욕은 어떠한 것입니까? 우리 인간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탓에, 우리 그리스도 신자라는 사람들도 하느님께 기도하지 않고 세상살이에만 몸을 바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마치 하느님 아니 계신 듯 착각하면서 늘 인간 자신의 생각만을 척도로 삼고 신앙인의 기도를 비웃기만 합니다. 그러한 비신앙적 인간에게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는 성경의 경고(신명기 6, 16 참조)를 들려주십니다(루가 4, 12).
모범으로 보여주신 예수님의 광야 40일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먼저 그러한 유혹을 물리치시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범은 자신을 억제하시는 광야의 40일 체험이었습니다. 광야라는 곳은 세상의 번다함을 떠나 자신만의 존재를 확인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40일간이라는 기간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 말씀을 따르기 위해 걸어간 40년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순절에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광야 같은 나 자신만의 조용한 자리를 마련해야 합니다. 그 ‘나 자신만의 조용한 자리’란 오로지 주님을 만나는 나 자신의 내면인 것입니다. 세상의 번다한 바람 즉 유혹을 차단한 나 자신의 내면 안에서 주님을 만나는 그것을 일컬어 ‘기도’라 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 속에서 오로지 주님만을 만나는 그것은 곧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신 예수님의 태도와 같습니다.
광야, 그곳은 나 자신의 내부
그 광야, 그곳은 나 자신의 내부입니다. 그곳에서 나는 세상의 유혹에게 휘둘리지 않는 평정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을 끊어버린, 즉 나 자신의 인간적 욕망을 벗어버린 나 본래의 참 자아가 그 광야에 나선 모습이요, 거기서 유혹이라 할 모든 것을 떨쳐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광야의 참 자아는 그래서 닥치는 모든 유혹을 하느님의 말씀에 성실하게 응답하는 기도로써 물리칠 수 있습니다. 기도란 오로지 하느님께만 마음을 기울이는 내면의 응답인 것입니다.
하는 일에 전심을 다하면 유혹은 보이지 않는다
옛적에 어느 고명한 스승에게 제자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기가 힘이 듭니다. 날마다 많은 유혹이 저를 괴롭힙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고 사는 방법은 없습니까?”
스승은 대답 대신 작은 그릇에 물을 가득 채우게 한 후, 그 그릇을 들고 정해진 시간 안에 동네를 한 바퀴 돌아오되 물을 조금도 흘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 제자는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스승의 명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자 스승이 물었습니다. “거리에서 누구를 만났는가?”
“거리에 누가 있었는지 아무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제자에게 스승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삶도 그와 같은 것이다. 네가 하는 일에 전심을 다한다면 유혹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사는 길이란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전심으로 하느님 말씀을 따르려고 기도하며 자신을 억제할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의 본능 속에서 뻗어 나오는 유혹의 손길과 세상의 악의 세력을 예수님과 같이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40일 광야의 여정을 가는 우리는 예수님께서 악마에게 응수하여 들려주신 세 가지 성경 구절을 외우다시피 하면서 죄악에 빠질 위험시에 늘 기억해야겠습니다. 40일 광야의 기도 속에서 나의 그림자 같은 유혹을 그렇게 대결해야 합니다.
유혹이 다가오면 이렇게 외쳐라
그렇습니다. 이 유혹의 계절에 자신을 억제할 수 있는 우리는 광야에 나선 듯, 기도의 시간으로 주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다운 길을 감으로써 그분의 부활에 참여하러 40일의 여정을 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악의 유혹이 닥칠 때면 늘 예수님처럼 이 성경 말씀을 외워 대처하기로 합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 말씀으로 산다.”(신명 8, 3)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만을 섬겨라.”(신명기 6, 13)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신명기 6, 16)
그렇습니다. 이러한 성경 구절을 외우기만 하여도 악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 40일의 광야에서 이 세 구절을 우리는 외칠 수 있어야겠습니다!
출처 - 하부내포성지 다음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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