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2주일

2016. 2.21 · 하부내포성지 만수리 공소

 


우리가 걸어야 할 영광의 길

산에 오르는 것처럼!




사순절 두 번째 주일의 거룩한 모습

 

사순절을 지내면서 그 두 번째 주일인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측근 제자들과 함께 산위에 올라가셔서 보여주신 일에 대한 복음 성경을 읽게 됩니다. 이와 똑같은 복음 성경의 내용에 따라 특별한 축일을 매년 8월 6일에 지내기도 하는데, 그 축일의 명칭이 ‘주님의 거룩한 변모(變貌) 축일’입니다. 옛적에는 이 축일을 좀 어려운 한자어로 ‘현성용(顯聖容) 축일’이라 했습니다. 그 뜻은 거룩한 용모를 찬란하게 보여주신 축일이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모습을 아무나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렇듯이 찬란하게 보여주시는 그분의 거룩한 모습을 볼 수 있었던 이들은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 세 사람이었음(루카 9, 28 참조)을 오늘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의 거룩한 모습은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러한 체험은 아무 때 아무데서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오늘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보았듯이 그것은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시는 동안에 일어난 일입니다(루카 9, 28-29 참조).

 

42년 사제생활 중 가장 가슴 아팠던 기억


이렇게 오늘 복음서에서 주목해야 할 점을 제가 강조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사제생활해오면서 수많은 애환을 겪어왔습니다만, 그 중에서 제가 가끔 자책하면서 가장 마음 아프게 기억하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한 도시 본당에서 있었던 일


제가 도시의 한 본당에서 지내던 때의 일입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오래 근무하신 분 내외분을 예비교우로 맞이하여 저 나름으로 성심껏 교리와 신앙 지도를 해드려서 그 부부에게 기쁘게 세례를 베풀어드렸습니다. 그 부부께서 영세하신 후 저는 그분들 사시는 지역의 신자들과 잘 어울리도록 구역반 모임에 안내를 하여 드리고 본당의 성경 공부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권고를 했습니다. 


천주교회는 하라는 일이 너무 많아서 다니기가 참 힘드네요


당시 그 본당에서 저는 매주간마다 교우들께서 읽고 공부할 수 있는 성경 해설을 본당주보 형식으로 발행하여 배부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부도 그러한 성경 읽기 프로그램에 따라 점점 더 신앙적 기쁨과 신심의 성숙을 얻도록 이끌어드렸습니다. 그리고 본당의 전례 활성화를 위하여 전례공부와 전신자의 성가개창 연습을 시켰습니다. 그리 하던 중에 그 부부께서 저에게 항의조로 하시는 말씀이 “천주교회는 하라는 일이 너무 많아서 다니기가 참 힘드네요.”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세례받는 것으로 한 번의 자격증을 얻는 삶은 아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그 부부에게 저는 “신앙생활이란 세례 받은 것으로 한 번의 자격증을 얻은 삶이라기보다는 끊임없이 노력함으로써 깊이를 더해가고 성숙해져가야 하는 것입니다.”하고 대답했는데,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그분들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간 그 부부께서 보이질 않기에 방문하겠다는 전화를 드렸더니 오지 말라며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해서 구역장을 통하여 그 부부의 사정을 알아본즉, 그분들은 천주교 믿기가 힘겨워서 마음 편하게 다닐 수 있는 불교의 절에 다니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불교 사찰에 다니면 우리 천주교에서처럼 매주간 정해진 날에 성당에 꼭 가지 않아도 되고, 우리 천주교회에서처럼 밥을 굶어야 하는 날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계속적인 공부를 하라는 닦달을 당하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신앙의 길은 힘들여 올라가는 여정


신앙의 길은 힘들여 올라가는 여정인 것입니다. 해서 저는 신앙의 길이란 등산하는 것과 흡사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 산위에서의 체험을 전하고 있는 성경은 산을 특별한 장소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하느님께 바치러 올라간 곳, 모세가 민족을 구해야하는 사명을 하느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곳, 그리고 엘리야 예언자가 하느님을 체험한 곳이 산이었습니다. 그렇듯이 예수님의 측근 제자들이 주님께 대한 특별한 체험을 한 곳이 곧 산이었습니다.

 

산에 오르는 것 자체가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한다


성경에서뿐만이 아니고, 우리의 일반적 체험으로도 산은 그 영험함으로 인하여 거기 오르는 인간으로 하여금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하여줍니다. 그리고 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땀을 흘려야하고, 정작 산꼭대기까지 오르면, 거기 오르면서 흘렸던 땀처럼 잡다한 생각과 자만과 모든 욕심을 자신에게서 떨쳐낸 마음이 되어, 산 아래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 부질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마치 산이 하늘과 가까운 곳이듯이, 거기 오른 사람은 하늘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마음이 되어, 잡다한 세상의 일거리에로의 집착을 벗어버리는 순간이 됩니다.

 

1999년 은경축 기념으로 백두대간을 종주


저는 1999년에 개인적으로 백두대간을 종주한 일이 있습니다. 제가 사제되어 25년 되던 해의 일입니다. 사제서품 25주년을 ‘은경축’이라 하지요. 통상적으로 그 25주년을 성대한 축하행사로 지내는 게 관행처럼 되어있습니다만, 저는 그런 것을 생략하고 백두대간 종주로 자축했습니다. 25년의 산을 올랐는데 과연 성실하게 올라온 것인가 하는 스스로의 점검을 그 의미로 삼았습니다.

 

지리산부터 강원도 향로봉까지


그 백두대간 종주는 일주일에 하루씩 구간을 이어 가는 여정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구간 이어가기 종주라 합니다. 출발지로부터 끊임없이 이어가야만 정식 종주인데, 그리 하자면 적어도 한 달 반 이상을 그 대간에서 내려오지 않고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사목자로서 그렇게 한 달 반 동안 본당을 떠날 수 없지요. 그래서 저는 일주일 하루(월요일)의 구간 목표로 삼은 산 밑으로 찾아가 능선에 올라가서 종일 걸을 수 있는 구간까지 가서 다시 내려오고, 그 다음 주간 월요일에 그 내려왔던 지점을 찾아가서 다시 능선에 올라 걷는 식으로 지리산에서부터 강원도 향로봉까지 걸었습니다. 중간에 병이 나서 한 달 동안 산행하지 못하다가 다시 이어서 향로봉까지 13개월 만에 도착했습니다.

 

여명의 하늘 아래, 가슴이 고동치던 기억


그런 식으로 일주일 만에 한 번씩 산허리에 접근하는 그날그날의 새벽마다, 여명의 하늘 아래 마루 금을 드러내는 그 산의 정상을 바라보게 되면 가슴이 고동치곤 했습니다. 하늘과 맞닿은 저 산꼭대기의 기상으로 이 땅위에서 버둥대는 나 자신을 이겨보자는 결의에 차서 가슴이 뛰는 것입니다. 한번은 영하 10여도로 떨어진 추위 가운데 한 밤을 자동차로 달려서 강원도 태백과 정선 사이의 만항재에 이르러 새벽 4시에 함백산을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눈밭의 어두운 산허리를 혼자 오르면서, 정상의 턱밑에서 신비스럽게 밝아오는 여명을 따라 꼭대기에 빨리 올라 해돋이를 보고픈 마음으로 성급히 기어오르느라고 넘어지기를 여러 번, 드디어 정상에 오르는 순간 험준한 동녘 준령위로 떠오르는 찬란한 태양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 일출의 장관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순간의 기분을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순간의 장관을 보지 못하는 산 아래 사람들이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의 그 순간 심정은 아마 오늘 복음 성경에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면서 예수님께 거기 머물러 지내자고 말한 베드로(루가 9, 33-34 참조)의 기분과 같은 것이었다 할 것입니다. 그 순간을 붙잡아두고 싶었습니다. 베드로가 체험한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은 아마 제가 함백산 정상에서 바라본 일출의 장관보다 훨씬 찬란하였을 것입니다.

 

태양보다 더 빛나는 그분의 모습을 체험한다는 것은 ...


그렇습니다. 태양보다도 더 빛나는 그분의 모습을 체험한다는 것은 곧, 땀 흘려 산을 오르듯이 우리가 노력하고 또 노력하여 얻어야 할 신앙의 체험인 것입니다. 목적도 없이 세상의 편안한 길을 배회하는 삶이 신앙의 길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 영광의 주인공이신 그분에게 다가와 이야기를 건네는 예언자들(모세와 엘리야)은 예수님께서 머지않아 당할 고난과 죽음에 관한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루카 9, 30-31 참조). 


그러한 영광의 순간은 고난과 죽음을 전제로 한 미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 미래가 당도하기까지는 자기들이 본 바에 대하여 뭐라 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루카 9, 30-31 참조). 그것은 우리 또한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기까지는 지금의 현실을 가지고 진정 신앙으로 성취할 목표를 잣대질할 수 없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신앙으로 성취할 진정한 목표를 달성하기까지는 오로지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 35)하는 말씀에 따를 수밖에 다른 기준이 없습니다.


구름 속에서 오로지 예수님 가시는 길을 따라 가는 길일 뿐


그렇습니다. 우리가 목표를 향하여 걸어가야 할 신앙의 길이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오리무중에서 즉, “구름 속에서”(루카 9, 35) 오로지 예수님 가시는 길을 그분 말씀 따라 가는 길일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 사순절의 길을 걷는 동안에도 그분의 영광스런 모습을 찾는 발걸음이 되어야겠기에, 오늘 성경은 그분의 수난을 예견하는 순간적 이벤트처럼 그 영광 체험에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임께서 가신 길은 영광의 길이었기에 그 모진 길을 가셨으리라”는 말은 옛 유행가의 노랫말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길임을 오늘 복음이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사순절의 길, 즉 고뇌와 참회 보속의 길을 가는 것은 진정 우리가 주님과 함께 얻고자 하는 영광의 길인 것입니다. 그러한 길을 가면서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그 사순절 속에 이미 부활의 영광이 함유되어 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기쁨을 향하여 가기까지는 고뇌와 참회로 우리 자신을 일깨워야 


봄의 생동을 대지에게 선사하기 위해서 눈 녹이는 봄비가 내린다는 우수(雨水)가 지난 금요일이었습니다. 아직도 우리 집 강아지 집의 물그릇이 밤이면 얼게 된다는 것을 아침마다 아침마다 보게 되는 여기 만수리 산골마을이지만, 여태 늑장부리고 있는 봄은 분명히 지금 우리의 산야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렇듯이 부활절은 멀기만 하고 우리의 사순절이 길게만 느껴질 수 있습니다만, 기쁨을 향하여 가기까지는 고뇌와 참회로 우리 자신을 일깨워야 함을 오늘 복음서는 그 사순절 메시지로 전하고 있습니다.



출처 - 하부내포성지 다음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203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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