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4주일
2016. 1. 31. 10:00 · 하부내포성지 만수리 공소
사랑의 모순적 표현, 십자가!
사랑, 끊임없이 짊어지고 가는 짐!
안면도 6년 살이 마지막 주일 강론에 대한 추억
오늘의 강론은 제가 9년 전에 썼던 강론 원고를 그대로 읽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제가 안면도의 교우들과 6년을 살고 떠나던 마지막 주일의 강론 원고입니다. 2007년 1월 28일의 강론원고입니다. 저는 이 원고의 강론을 하던 그날 저녁에 안면도 성당의 사제관에서 마지막 밤을 지내면서 혼자 앉아 많은 반성을 하였습니다. 그 반성의 시간에 눈물을 흘리면서 후회의 주먹으로 가슴을 치기도 했습니다.
9년 전, 안면도를 훌쩍 떠나며
그러한 밤을 지내고 그 이튿날 월요일의 아침 미사를 안면도 성당에서의 마지막 미사로 봉헌하고는 그곳 사목회장님께 그날 떠난다고 말씀드리고 훌쩍 떠났습니다. 그리고 대전의 부모님 집에 가서 잠을 잔 다음의 화요일에 만수리 공소에 왔습니다. 주교님의 명령대로라면 그 주간 목요일에 안면도를 떠나서 만수리 공소로 와야 하는데, 제가 그 명령을 위반한 것입니다. 왜냐면, 3일간 더 안면도에 머물고 정작 떠나기로 되어있는 날에 그곳 교우님들께서 추운 날씨에 성당 마당에 줄을 서서 저를 배웅할 것을 저의 마음이 떳떳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애증은 가까운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애증(愛憎)은 가까운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도 미움도 가까운 사이에서 쌓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 사랑할 일도 없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미워할 까닭도 없습니다. 그러나 함께 사는 사이의 사람들 사이에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고향 사람들에게서부터 미움을 당하셨습니다. 까닭도 없이, 다만 복음의 선포 때문에 그분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고향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으셨다고 오늘의 복음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배척받는 사랑의 짐이 십자가이기에 그렇습니다.
이번주간 목요일(2월4일), 입춘(立春)입니다!
사랑! 끊임없이 짊어지고 가는 짐!
활동계획을 고향에서 발표하심으로써 그분의 사명수행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지난주일 봉독한 루카복음서 4장의 내용을 오늘 이어서 읽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인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시며 복음 선포를 하시던 날에 일어난 사건의 보도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고향에 가신 일을 마르코복음서나 마태오복음서는 그분의 활동기 중간에다 기록하였습니다만(마르 6, 1-6 ; 마태 13, 53-58 참조), 루카복음서는 그분의 활동 초기(開始期)의 사건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루카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활동계획을 고향에서 발표하심으로써 그분의 사명수행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의 활동 개시로 이사야서에 예언된 구원(解放)이 이루어진다고 예수님께서 당신 고향에서 직접 천명하셨던 것입니다.
"이 성경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이 성경 말씀(이사야 58, 6의 구원선포)이 오늘 너희가 듣는 가운데(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 21)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당신의 사명 수행을 시작하시는 그분의 말씀에 대하여 고향 사람들이 탄복하면서도 한편 그들은 마을에서 잘 알고 있는 요셉의 아들일 뿐이라고 빈정거리면서 받아드리려 하니 않습니다(루카 4, 22 참조).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그들의 그러한 반응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 24)고 말씀하시면서 엘리야와 엘리사의 예를 들어 개탄하십니다. 엘리야가 도와준 사람이란 소외되었던 이방인 과부 여인이었습니다(1열왕 18, 7-16 참조). 엘리사가 도와준 사람도 이방인이자 철저히 따돌림 당한 나병환자였습니다(2열왕 5, 1-14 참조). 그 이방인들은 소외당한 처지에서도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듯이 은총이란 그것을 베푸시려고 오신 분을 받아들여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결국 당신의 동족으로부터 제거되는 운명을 예측한 장면
그런데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그분을 한낱 마을 친구 중의 하나로만 보고 그분에 대하여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선입관에 의하여 예수님과의 인격적 신뢰 관계마저 저버림은 물론이려니와 하느님의 뜻도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앙적 태도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고향에서 당신의 사명수행 초기부터 그런 배척을 당하시는 그 비감한 현실은 그분이 결국 당신의 동족으로부터 제거되는 운명으로 가시게 되는 것을 예측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의 예언자들과 예수님뿐만이 아니라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과 초대교회도 유다인들로부터 배척을 당합니다. 그 후 박해를 받는 신자들도 예수님과 같은 운명의 길을 가고 있음을 루카복음서가 이렇게 예수님 초기 활동 보도를 통해서 벌써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그 활동개시 때부터 배척을 당하시는 것처럼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그 자체가 거부당한다는 암시인 것입니다.
배척당하시는 실정에서 오히려 복음적 소명이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그렇듯 배척당하시는 실정에서 오히려 복음적 소명이 역설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분께 대한 예언은 그렇게 반대자들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그분 스스로 인지하셨던 것입니다(루카 4, 21 참조). ‘반대를 받으심으로써 오히려 드러나는 진실’을 여기서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렇듯이 역풍을 정면으로 맞닥뜨림으로써 구원을 성취하시는 길이 곧 그분이 가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죽음으로써 참 삶의 길을 가는 것’ 그것이 십자가의 역설적 상황입니다. 그분께서 제시하시는 십자가의 정의는 결국 우리 모두에게도 구원의 방향은 그렇게 세상의 역풍 속을 나아가는 쪽에 있음을 교시하신 것입니다.
‘나에게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될 사람들이 나에게 그렇게 하다니!’
나와 가장 가까이 지내는 사람, 일상적으로 사랑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 잘 아는 사이의 사람, 더구나 나의 덕을 입은 사람이 나를 배척하는 상황에서 내가 사랑과 희생을 단념하지 않는 그 길이 곧 십자가의 길입니다. ‘나에게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될 사람들이 나에게 그렇게 하다니!’ 내가 이렇게 느낄 때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짊어진 처지의 나’, 즉 진정 예수님의 제자 대열에 들어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배반과 배척을 당해도 사랑과 희생을 단념치 않는 것이 십자가의 길
그렇습니다. 배반과 배척을 당하면서도 사랑과 희생을 단념하지 않는 그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배반을 희생으로 상쇄시키고 배척을 사랑으로 갚아주러 가는 길이 그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모순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횡선(橫線)과 종선(縱線)이 한 원리를 형성하는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모순 형상은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 익숙해진 세상살이의 원리로써는 해명되지 않는 것입니다.
코린토 1서 13장 ‘사랑의 찬가’의 백미, 13장 7절
그러한 모순적 십자가의 원리를 읽을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한 십자가의 원리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오늘 바오로 사도는 그 유명한 코린토 1서 13장 ‘사랑의 찬가’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 ‘사랑의 찬가’ 중에서 13장 7절의 말씀은 그 백미(白眉)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낸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이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그런 행위가 아닙니다. 배신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덮어줌으로써 원수를 삼지 않고, 배척의 땅에도 믿음(信賴)의 씨를 심으며, 갈등의 가시밭에서도 화해를 소망하면서(바라면서) 끝까지 견디는 희생의 길로써 용서의 마당에 이르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그래서 끝없는 숙제를 안고 나아가는 삶의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즉 끊임없이 짊어지고 가는 짐인 것입니다. 언제까지라도 벗을 수 없는 그 짐이 곧 사랑입니다.
중요한 건 계속 지고 가야 하는 짐
어떤 사람이 사막의 길을 가다가 짐을 짊어지고 힘겹게 걷고 있는 낙타를 만나 물어보았습니다. “얘 낙타야, 오르막길과 내리막길 중 어느 쪽이 낫니?” 그러자 낙타가 대답했습니다. “오르막길이냐 내리막길이냐가 문제가 아니죠. 중요한 건 계속 지고 가야 하는 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벗어버리거나 가볍게 할 어떤 방식을 선택할 일이 우리의 숙제는 아닙니다. 끊임없이 짊어지고 가는 낙타의 짐과 같이 우리가 풀어가야 할 사랑의 숙제는 쉬운 길, 덜 어려운 길, 재미스런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짐은 어느 낯모르는 사람보다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나에게 부과시키는 짐입니다. 그것도 나를 참기 어렵게 만드는 짐으로 나의 가까운 사람들이 나를 난처하게 하는 그런 사랑의 시험으로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런 십자가의 숙제는 그래서 나의 가족, 나의 배우자, 나의 형제, 나의 동족, 우리 공동체의 사랑하는 신자들, 나의 친구들, 나의 가까운 이웃들이 나에게 지우는 무거운 사랑의 짐인 것입니다.
동족에게 박해 받고 결국 모함을 받아 사형을 당하는 예수님
예수님은 그래서 동족으로부터 박해를 받고 결국 모함을 받아 사형을 당해야 했습니다.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예수님 말씀은 당신에 대한 동족의 증오를 마지막 십자가의 길에서 결정적으로 대결하실 것을 미리 예견하신 말씀입니다. 그러한 대결의 길을 가야하는 소명은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의 말씀대로 스스로 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뽑아 세워 그렇게 하도록 정해주신 것입니다(예레 1, 5 참조).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 소명의 길에서 역풍에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세워 주시고 옆에서 도와주실 것입니다(예레 1, 19 참조).
모든 거슬림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으려면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위기를 정면으로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2독서 코린토 1서 13장에서 바오로 사도가 천명하시듯,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어 내고”(1코린 13, 7), 사랑은 “가장 강력한(으뜸의) 것”(1코린 13, 13 참조)인 까닭에 그렇습니다.
용서는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의 승리하는 마지막 태도
그래서 미움과 배신과 저주 가운데서도 순교자적 자세로 몸 바쳐 모든 것을 사랑하고, 그리고 오로지 사랑 때문에 죄를 뒤집어쓰게 된 그에게는 그로서 할 것 한 가지만 남습니다. 그것은 용서입니다. 그 용서라는 것은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의 승리하는 마지막 태도입니다. 루카복음서는 오늘 고향에서 배척받으시고 죽임 당할 위기까지 당하셨던 예수님께서 결국 당신 동족들로부터 고발되어 십자가상의 죽음을 당하시며 마지막까지 용서로 일관하셨던 그분의 사랑의 승리를 우리에게 전합니다.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운명하시면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 34) 하고 기도하셨다고 그분의 최후 순간에 대하여 특징적으로 루카복음서는 전합니다.
그렇듯이 그리스도와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은 그런 사랑의 승리로 마쳐져야 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반대 받는 표적이자 수치스러운 것이 십자가이면서 또한 사랑의 도구이며 영광을 드러내는 승리의 표징이 십자가인 까닭이기에…, 그래서 그렇습니다.
안면도의 마지막 주일미사 봉헌
그러한 사랑의 승리를 향하여 끝까지 나아가는 우리의 삶을 다짐하자고 말씀드리면서, 저는 오늘을 마지막으로 안면도의 여러분과 이 주일미사를 봉헌합니다. 저는 주교님의 명령에 따라 미지의 먼 곳으로 이번 주간에 떠나갑니다. 많은 두려움을 안고 가게 됩니다. 여러분과의 지난 세월은 짧았다고 말할 수도 없고 길었다고 말할 수도 없는 만 6년의 삶이었습니다. 아쉬움과 섭섭함을 지닌 채, 그리고 여러분에게 제가 본의 아니게 잘못한 것들을 일일이 되갚지 못하고 어떤 숙제를 풀지 못한 심정으로 떠나갑니다. 마치 갑자기 넘어졌다가 일어나면서 쓰려오는 생채기를 아파도 체면상 아프다 말 못하듯이 떠나면서 변명할 수 없어 곤혹스런 표정만 여러분에게 보이고 떠나가야 한다는 것이 어쩌면 억울하고 서럽기도 합니다만, 그러한 것을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의 사랑으로 쓸어 덮어 주실 것이라 기대하면서도, 한편 돌덩이 같이 무거운 심정으로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앞으로의 미지의 시간에 대한 불안
그러면서 미지의 시간에 대한 불안으로 말미암아 차마 걸어 나갈 다리의 무릎 아래 힘이 빠져서 발걸음 기우뚱거리는 것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저 자신의 인간적 나약성은 결코 어쩔 수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어찌 하겠습니까! 주님께서 이러시는 것을 말입니다. 줄기에 주렁주렁 매달려 딸려 올라오는 고구마처럼 주님 손에 끌려가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말입니다. 어느 유행가 노랫말이 그렇듯이 주님 앞에 서면 작아지는 죄인인 걸요! 그리고는 그분 시키시는 대로 맡겨야 하겠지요. 그야말로 주님에게 몸을 맡기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허공에 몸을 날리는 심정이라 할까요, 불 속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절박감이라 할까요, 물에 몸을 던져야 하는 불퇴전의 입장이라 할까요…!
자신의 보잘 것 없음에 대한 승복
하여튼 주님의 손바닥 안에 투신해야 하는 믿음만이 유일한 끈인 걸 실감하며 떠나야겠습니다. 마치 손오공이 뛰어봐야 부처님 손바닥 위라는 말이 있듯이, 사실은 우리 모든 인간이 계속 달려가도 하느님 품속에서 체조하는 것입니다. 어떤 두려움 속에서도 그렇듯 하느님 생각하시는 판도 안에서 나의 모든 것이 결정되고 있다는 깨달음만 있다면 불안의 발걸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겠지요. 이렇게 어쩔 수 없이 하느님 의향의 테두리 속에 던져진 몸이라는 깨달음의 바탕은 사실상 내가 그분 앞에 서 있는 죄인이라는 것, 즉 자신의 보잘것없음에 대한 승복인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법을 바오로 사도의 말씀 가운데서 터특합시다
우리 모두 그렇게 살아갑시다. 그렇게 사는 법을 바오로 사도의 말씀 가운데서 터득합시다. 자신을 칠삭둥이 같다고(1코린 15, 8 참조) 토로 하시는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1서 15장 가운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애를 많이 쓰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 것입니다.”(1코린 15, 9-10).
그렇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 우리 자신들을 전적으로 맡겨드립시다. 우리는 ‘하느님께 붙잡힌 신세’라는 새로운 깨달음이 곧 신앙이요, 그러한 믿음이 있음으로써 철저한 투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안면도 공동체의 새날 시작을 기원하며
제가 떠나고 나면 여러분께서 저의 후임으로 오실 신부님을 맞이하여 그분과 함께 첫 주일미사를 봉헌하시게 될 2월 4일은 마침 입춘일(立春日)입니다. ‘鴻禧’ 또는 ‘萬事亨通’이나 ‘立春大吉’이라 문짝이나 대들보나 천장에 써 붙이는 소박한 관습이 있듯이 그날의 春祝, 즉 立春祝願은 새봄을 벌써 맞이하는 축원으로 여기 안면도 공동체의 새날을 시작하는 기원이 될 것입니다. 눈 녹는 틈새에 솟아오르는 여린 햇나물을 무쳐 立春節食을 삼고, 五穀을 가마솥에 볶아서 맨 먼저 튀어나오는 곡식으로 올해의 풍년 될 곡식(豊作穀)을 바라보는 마음이듯이, 공동체의 소망을 심으시고 서로에게 축원하며 사랑하는 눈으로 서로를 알아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각 가정과 한분 한분의 신실한 소망을 주님께 올리면서 새봄맞이의 문을 마음에서부터 열어 제키시기 바랍니다. 추운 겨울의 끝자락을 벗어내면서 새싹처럼 깨어나듯 아이들이 방학에서 깨어나고 새 학기를 준비하는 이 때입니다. 그렇듯이 여러분 각자와 공동체가 새로운 계절의 시작을, 즉 새 출발을 다짐하면서 늘 주님 안에 그 소망을 키우는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항상 열심히 하느님의 은총으로 일할 수 있도록 서로 축원하고, 오늘 바오로 사도의 사랑 찬가(1코린 13, 4-13 참조)처럼 여러분의 삶이 사랑 그 자체가 되기를 빕니다. 그리고 떠나는 제가 또한 새로운 임지에 가서 그러할 수 있도록 立春大吉의 春祝처럼 主님께 빌어주십시오.
출처 - 하부내포성지 다음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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