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주일
2016. 1. 24 · 하부내포성지 만수리 공소
우리의 날개를 활짝 폅시다
성령의 바람을 타고 날아오릅시다!
오늘 말씀이 전하는 감동
오늘 우리는 미사 중에 봉독하는 성경에서 매우 감동적 분위기를 느낍니다. 제1독서인 느헤미야기 8장과 루카복음서 4장이 그러한 감동을 느끼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고향 나자렛 회당의 안식일 예배 중에 성경을 읽으시고 해설을 하신 말씀을 들으면서, 마치 어떤 암흑의 시대를 넘어 새로운 시대에로의 전환점에 이른 감격을 맛보게 됩니다.
사제 에즈라의 강론에 감격하여 울었다
제1독서 느헤미야기 8장은 바빌론에 노예로 끌려갔던 유다인들이 수십 년 만에 해방되어 고국 예루살렘에 돌아와 첫 기도 모임을 열고 사제 에즈라의 강론을 들으며 감격하여 울었다고 보도합니다(느헤 8, 2 - 9 참조). 그리고 이 날은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거룩한 날, 곧 해방의 날임을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축제를 올리는 날이 되었다고 보도합니다(느헤 8, 9 - 10 참조). 바빌론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70년 동안 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에서와 같이 성전에 모여 기도할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서러움이었습니다.
나부코 중 '노예들의 합창'에 담긴 서러움
이탈리아 대음악가 베르디(Verdi)의 유명한 오페라 나부코(Nabucco) 중에 ‘노예들의 합창(Sklavenchor)’이 그 유다인들의 바빌론 노예 생활의 서러움을 감동적으로 표현합니다. 그 합창의 노랫말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조국이여, 그대를 향해 그리움이 달려가노라!(Teure Heimat, nach Dir geht das Sehnen!)” 이러한 그리움으로 끼리끼리 몰래 모여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이 그 70년간의 노예 생활 중 유일한 위안이었습니다만, 이제 조국에 돌아와 공식적으로 모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실컷 들을 수 있음의 의미
그래서 그들의 지도자 사제로부터 “해 뜰 때부터 한낮이 되기까지”(느헤 8, 3) 성경 말씀을 실컷 들을 수 있음은 그들이 실감하는 해방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이 날의 해방 선언을 들어 보십시오: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단 술을 마셔라. 오늘은 우리 주님께 거룩한 날이니, 미처 마련하지 못한 이에게는 그의 몫을 보내주어라.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그대들의 힘이니, 서러워하지들 마시라.”(느헤 8, 10)
예수님이 고향에서 선포한 것은?
그러한 주님의 날, 곧 해방의 날을,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향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 18 - 19)
오늘의 이러한 예수님의 선언 말씀을 제가 번안하여 다음과 같이 읽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구세주로 삼으시어(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나에게 내리신 성령의 힘으로써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 18 - 19) “이러한 예언은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자리에서 현실로 이루어졌다.”(루카 4, 21)
이사야 58,6의 예언을 인용하신 예수님
이러한 말씀은 이사야 58장 6절의 예언을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해방 예언이 당신 오신 이 날에 실현된다고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것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 21)는 말씀을 직역하면, “이 성경 말씀이 오늘 너희들의 귀 안에서 이루어졌다(Quia hodie impleta est haec scriptura in auribus vestris)”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의 출현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귀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것이 옛날이야기도 아니고 앞날의 이야기도 아니고, 이 말을 듣고 있는 지금 당장 여기서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귀' 안에서 이루어졌다
이런 예언을 당신 자신에게 인용하시는 예수님께서 오신 것 자체가 벌써 우리의 구원인 것입니다. 이렇듯 희망을 잃고(가난한) 노예 살이 하는(묶인) 절망의 어둠 속에서(눈먼 사람 같이) 억눌려 신음하는 중생에게 구세주가 오셨다는 것 자체는 벌써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절망으로 짓눌린 우리에게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이제 그 구원을 우리 자신의 몸에 직접 받아들임에서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깨닫는데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꾸민 이야기입니다만, 만화가 황중환씨의 ‘386ⓒ’라는 연재만화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만화가 황중환의 '386 씨' 중에서
아주 오래전에는 새들에게 날개가 없었답니다. 새들의 몸을 유심히 살펴보면, 몸집에 비하여 두 다리가 아주 가느다랗게 생겨서 걸어 다니기란 매우 어렵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새들은 자기들에게 볼품없고 연약한 다리 두 개만을 주신 하느님을 원망하며 신세를 한탄하였답니다. 그러자 어느 날 하느님께서 새들을 불러 모으시고는 등에 지고 다니라면서 커다란 짐을 두 개씩 주셨답니다. 새들은 다음과 같은 불평을 했습니다. “에이! 가느다란 두 다리로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든데, 왜 이런 짐까지 지고 다니라고 하시는 거야!” 이렇게 새들이 투덜대고 있는데, 어디선지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낙엽들이 바람에 날리는데, 하느님께서 짐으로 주신 것이 새들의 등에서 나뭇잎처럼 펄럭이는 것입니다. 새들은 하느님의 명령을 어겼다가 혼이 날 것 같은 두려움으로 그 짐 두 개씩을 놓치지 않으려고, 그 짐이 펄럭이는 대로 몸뚱이를 움직였답니다. 아니,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새들의 몸이 공중에 둥둥 뜨는 것이 아니겠어요. 하느님께서 주신 그 짐을 가지고 투덜거리던 새들에게 그것은 두 개의 날개였답니다. 그래서 새들은 어디든 다리 품 팔지 않고도 자유롭게 갈 수 있는 날개를 가지고 오늘까지 훨훨 날아다닐 수 있답니다.
우리에게 주신 무거운 숙제를 놓치지 않는다면
그 새들의 날개처럼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주신 무거운 짐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즉 성령을 따라서 우리가 받은 무거운 숙제의 짐을 우리 몸에서 놓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불행한 처지로부터 자유롭게 해방되어 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처지를 세상이라는 땅에서만 버티고 지탱하기에는 우리 인간의 능력이란 우리 자신을 볼품없고 고역스럽게만 만듭니다. 그러나 하늘을 날 수 있는 몸짓으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도록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앙의 짐을 그리고 사랑의 짐을 하사하십니다. 그 신앙을 잃지 않고, 그 사랑의 짐을 짊어지고 사는 방법에 대하여 오늘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1서 12장에서 한 몸의 여러 지체를 예로 들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1코린 12, 12 - 30 참조). 그렇듯이 하느님께로부터 하사받은 우리 삶 속의 짐을 신앙으로 놓치지 말고 짊어지는 일이 사랑의 역할인 것입니다.
신앙의 과제라는 짐
그러한 믿음의 힘으로 사랑을 실천할 희망을 가지고 우리는 세상이라는 이 땅 위에서만 집착하지 말고 비상(飛上)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비상할 수 있는 힘을 내려주시는 바가 곧 예수님께서 이 땅의 중생을 구원하시려고 지니고 오신 성령입니다. 곧 우리가 이 세상의 불행 속에 허우적거리지 않도록 하늘의 바람을 우리에게 불어주시는 바가 성령입니다. 신앙의 과제라는 짐, 그리고 사랑의 과제라는 짐이 우리의 두 개의 날개요, 그 날개를 펄럭일 수 있는 용기가 하늘을 향하여 비상하고자 하는 우리의 희망일 것입니다.
그것을 사랑의 과제로 여긴다면 ...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곧 우리가 하늘을 향하여 날아오를 수 있는 우리의 날개입니다. 그 믿음의 날개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짐을 짐으로 여기지 않고 하늘을 향한 희망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 얻게 되는 모든 짐을 사랑의 과제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꺼이 하늘을 향한 날개 짓으로 그 짐들을 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사랑의 짐을 지고 날아갈 희망의 날개 짓을 하게 합니다. 믿음은 곧 우리의 날개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바람으로 우리는 사랑의 짐을 기꺼이 지고 날아오를 희망을 띄우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한 믿음과 사랑과 희망에 대하여 다음 주일에는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1서 13장에 특별히 사랑을 찬송하는 말씀으로 설명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구원을 현실화 하시러 오신 분이 성령을 지니고 오셔서 오늘 우리에게 그 길을 제시하십니다. 우리 귀속에 들려온 그분의 구원 선포로 우리는 지금 그렇게 절망의 굴레를 끊고 천상의 행복을 향하여 눈을 뜨고, 우리를 짓누르던 세상 부조리의 짐을 벗어버리며, 그분이 제시하시는 곳으로 날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소망으로 사랑의 짐을 지고 하늘을 향하여 날아오를 수 있도록 주님 앞에 우리의 날개를 활짝 폅시다. 달리 표현하여, 땅에서 즉 세상에서 엉겨 붙어 살 생각만 하지 말고 하늘을 향하는 삶의 진로를 모색하자는 것입니다.
나가사키 오우라 성당에서
우리의 신앙선조들은 현세적 삶에 집착하지 않고 기꺼이 현세를 포기하여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오늘의 우리 또한 그런 길을 가고 있는 신앙인들입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38명의 순례자들과 함께 일본 나가사키 지역의 순교지를 찾아 기도하며 순례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하부내포 지역의 서짓골에 묻히셨던 병인 순교성인 네 분의 유해를 경건하게 모셨던 나가사키의 오우라 성당을 찾아 제단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면서 저는 다음과 같은 묵상을 했습니다.
순교자들이란 세상을 버리고 하늘로 뛰어오른 분들
순교자들이란 세상을 버리고 하늘로 뛰어오른 분들이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세상에 집착하여 살아가고 있다. 나는 세상에 묶여 하늘을 향하여 뛰어 오를 용기가 없다. 이렇듯 부끄러운 나의 모습은 하느님께서 주신 날개를 무거운 짐처럼 원망하면서 연약한 육신으로 허우적거리는 미련한 새의 모습인 것 같다. 믿음의 왼쪽 날개와 사랑의 오른쪽 날개를 펼치고 세상 풍파 위로 날아오를 용기를 주님께 청해야 할 것 아니겠는가!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을수록 하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해방이란, 하늘의 힘으로 즉 성령의 힘으로 살아갈 삶의 진로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얻을 것을 찾기 보다는 하늘이 주는 것을 찾을 때 진정 우리의 삶은 해방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해방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셨습니다. 성령의 바람을 타고 날아오를 우리의 날개를 활짝 펴야겠습니다.
출처 - 하부내포성지 다음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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