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공현대축일
2016. 1. 3. 09:00 하부내포성지 도화담 공소
강생신비는 역동적이다
주님 오심은 입체적으로 알려진다
동방정교회의 전통 - 주님성탄 축일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은 본래 1월 6일에 올리는 축제입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1월 6일을 공휴일로 할 수 없으므로 신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1월 2~8일 사이의 주일(일요일)에 이 축제를 올립니다. 본래 주님의 성탄 대축일로부터 13일 만에 삼왕내조(三王來朝)의 축일을 지내는 것이 교회의 전통이었습니다. 그 13일만의 이 축일을 동방교회에서는 주님의 성탄 축일로 지냅니다. 그리스, 루마니아, 불가리아, 터키, 시리아, 이집트 등지의 동방 정교회와 러시아 정교회에서 그렇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성탄절은 로마의 풍속에서 비롯
우리 가톨릭교회가 주님의 성탄절로 지내는 12월 25일은 예수님의 생신날을 찾아 기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로마인들의 풍속에 밤이 가장 긴 동지를 지나면 약해진 태양이 이제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기념하여 태양신을 섬기던 날입니다. 동지 전까지 짧아지던 낮의 길이가 동지를 지나면 조금씩 다시 길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다시 힘을 발휘하는 태양을 맞이하는 의미로 태양신(Mithras)을 섬기던 날이었는데, 우리 교회가 ‘참 빛’이시고 ‘정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날로 바꿔 지내기 시작하여 12월 25일이 성탄절로 고정되었습니다.
대도시 알렉산드리아의 경우
그런데 나일강 하류 이집트의 큰 도시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사람들이 1월 5일 밤에 나일강변에 나가서 6일 새벽에 강물을 길어올리는 축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태양신 아이온(Aion)의 출생의 의미로 나일강물을 길어올리는 의식을 했는데, 그때 물이 포도주로 변한다고 믿었다 합니다. 새벽 여명에 떠오르는 태양빛을 반사하여 강물이 붉게 물들어 보이는 게 포도주의 빛깔 같았겠지요. 그러한 이방 종교의 풍속 대신에, ‘참 태양’이신 예수님을 동방박사들이 뵈옵기 위해 찾아온 날로 기념하면서, 그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 신자들이 예수님의 성탄절로 기념하기 시작하여 이 축일이 고정되었다고 합니다.
입체적인 사건으로서의 강생의 신비
이렇게 하늘을 빛으로 채우는 태양을 숭상하고, 어둠을 가로지르는 별(彗星)을 바라보면서, 땅을 가로지르는 강물에 반사하는 햇빛으로 향기로운 포도주를 연상하듯이, 하늘과 땅을 아우르는 강생신비, 즉 하늘의 주님께서 땅의 인간들에게까지 오시는 구원사건을 기념하여, 이 성탄절 축제기간에 서쪽의 로마교회가 정한 축제로부터 동쪽의 정교회가 정한 축제로 이어 기념하며 우리는 입체적이자 역동적인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 입체적이고 역동적인 체험을 우리는 루카복음서와 마태오복음서가 전하는 메시지로 생생하게 얻을 수 있습니다. 루카복음서 2장에 의하면 베들레헴 인근의 가난한 목동들이 마구간에 찾아옴으로써 강생의 신비가 전해진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오복음서 2장에 의하면 멀리서부터 동방박사들 즉 이방인들이 찾아옴으로써 강생의 신비가 드러나게 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루카복음서는 소외된 사람들에게, 즉 인간 사회의 변두리에 주님의 오심이 알려지기 시작하는 것에 우리를 주목하게 하는 한편, 마태오복음서는 세계의 변방에서부터 인류가 주님 계신 곳으로 모여오게 함으로써 강생의 신비가 세계에 공개되는 계기를 이루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루카복음서에 의하여 강생의 신비가 우리 인간 삶의 밑바닥에까지 구현되는 것을 보는 한편, 마태오복음서에 의하여 강생의 신비가 세계만방의 온 인류 즉 모든 이방인에게 미치게 되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탄대축일부터 공현대축일까지
이렇게 우리는 루카복음서에 의한 12월 25일의 축제에서부터 마태오복음서에 의한 1월 6일 축제에 이르기까지 주님 강생의 신비를 입체적으로 기념합니다. 이러한 성탄 대축일에서 공현 대축일로 이어지는 강생신비의 입체성을 체험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루카복음식의 수직적 구현의 체험
성탄의 밤에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일어난 사건은 저 높은 하늘로부터 어두운 인간의 삶 속으로 주님께서 내려 오셨음을 말해주는 것임을 루카복음식의 강생 신비에 대한 수직적 구현으로 체험합니다. 로마제국의 황제와 그 총독의 위압적 통치체제하에 연약한 아기가 탄생하였음(루카 2, 1∼7 참조)을 소개하는 루카복음서는 그 세속 권세의 상층부와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이 낮은 곳에 버려진 비천한 사람(목동)들에게 저 한없이 높은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분의 강생 소식을 알려주었는데(루카 2, 8∼20 참조), 이를 우리는 강생 신비의 수직적 구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식의 강생신비의 수평적 구현에 대한 깨달음
그러한 반면, 마태오복음서에서는 강생신비의 수평적 구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요셉이라는 의인의 마음속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을 통하여 동정녀가 무사히 아기를 낳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의 신비가 이루어짐(마태 1, 18∼25 참조)을 소개하고, 이어서 예루살렘이라는 중심부에 멀리 동방이라는 주변부(변방)의 인류가 모여오게 된 사건(마태 2, 1∼12 참조)을 보여줌으로써 이 강생신비의 수평적 구현을 오늘 마태오복음서가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강생신비를 루카복음식의 수직적 구현으로, 마태오복음식의 수평적 구현으로 교회가 입체적으로 고백하는 과정이 성탄절로부터 공현 대축일에 이르는 전례입니다. 이로써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구원 메시지를 우리 사회의 높은 곳으로부터 낮은 곳까지, 그리고 우리 안에서부터 세계만방에까지 전해야 함을 다짐하게 됩니다. 이로써 강생신비는 역동성을 지니게 됩니다.
강생신비의 역동성이 뜻하는 건 무엇일까
그 이 강생신비의 역동성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그것을 우리는 또한 성탄절로부터 공현 대축일에 이르며 체험합니다. 성탄절에 우리는 루카복음서에 따라서 하느님이신 분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잠든 밤에 이 세상의 가장 후미진 베들레헴 동리 밖 마구간에서 어린 아기로 태어나셨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가장 알려지지 않은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 밖에서, 그것도 어느 누구 상상할 수조차 없는 마구간에서 태어난 아기를 향하여, 저 높은 하늘의 합창을 실은 광명이 쏟아짐으로써, 저 낮고 감추어진 곳에 버림받은 사람들의 가슴속이 환한 기쁨으로 채워지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역동성을 여기서 체험합니다. 작은 아기의 알려지지 않은 탄생이 이 세상의 가장 낮은 곳 어둠에 잡혀있던 사람들로 하여금 마구간으로 달려가게 하였고 그들에게 구원이 되었듯이(루카 2, 15 참조), 그리고 그 구원을 이웃에게 전하기 위해 기쁨의 발걸음이 뛰었듯이(루카 2, 17 참조), 사람이 바뀌는 체험이 여기에 있습니다.
강생은 그저 들려오는 한낱 소식에 불과한 게 아니다
그렇듯이 세상의 가장 먼 곳의 사람들에게 또한 구원 사건이 되는 것을 오늘 우리는 동방 박사들의 찾아옴(마태 2, 1 참조)에서 보게 됩니다. 그들의 찾아옴은 또한 세계를 움직이는, 즉 세상을 바꾸는 강생신비의 역동성을 보여줍니다. 그 아기의 탄생 소식은 세상의 지배자에게 직접 전해지지 않지만, 세력가들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 만큼 강렬한 힘을 발휘하는 소식이 되어, 멀리서 찾아온 사람들의 열정으로 알려집니다. 이 소식을 갑자기 듣게 된 권력자들의 처지가 불안해졌습니다. 예사롭지 않은 소식이니까요! 그것은 세상을 바꿀 소식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구세주 강생이란 이제 다른 세상을 만들 분이 오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제 한 번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이 사건으로 오늘도 이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실 일을, 곧 그 분께서 세우셨던 심오한 계획(에페 3, 3∼5 참조)을 이제 실행하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강생은 그저 들려오는 한낱 소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큰 변혁을 일으키는 일대사건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강생신비는 저 외진 마을 어귀에서부터 세계 방방곡곡에 미치는 사건이 되고, 저 버림 받은 변두리 사람들에게서 일어난 보잘것없는 일거리가 예루살렘 당국 중심부를 흔들어 놓는 위력으로써 역동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공현 - '주님께서 우리 세상에 출현하였다.'
동방박사들이 주님을 찾아온 오늘 이 축제의 명칭으로 ‘주님의 公現’(Epiphania : splendid appearance = ‘公顯’이 적합하다)이라 함은, 그 말의 뜻이 그렇듯이, 이제 주님께서 우리의 세상에 출현하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세주께서 우리 세상에 오셔 계심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예루살렘 당국자들처럼, 우리는 세상 혼란의 암흑 속에 파묻혀 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임금으로 탄생하신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다”(마태 2, 2)고 동방박사들이 말하였을 때 예루살렘 당국자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몹시 놀라서 당황하였다고 성경 기자가 전하고 있습니다(마태 2, 3 참조). 이 세계의 변혁을 이루게 될 하느님의 위대한 사건이 일어났음을 저 멀리 세상의 동쪽 변두리 이방인들도 알아차리고 수만리 길을 찾아왔는데도, 예로부터 하느님의 도성이었던 그 예루살렘 중심부의 당국 사람들은 캄캄하게 모르고 있었음은 무슨 연고이겠습니까? 저 멀리서부터 진리의 별빛 따라 수만리 길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이방인들이 찾아오는 동안에 헤로데의 궁전과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무엇을 했단 말입니까? 베들레헴 동구 밖에 소외된 사람들 사이에서 조용하게 일어난 위대한 사건 소식이 중심부 예루살렘 당국자들에게 전해지지 않은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구원의 소식이 퍼지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해가 지고 밤이 되어 깊어진 겨울밤의 하늘은, 도시의 하늘이건 시골의 하늘이건, 같은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이겠지요. 동지섣달 긴긴 밤 베들레헴 동구 밖 얼어붙은 밤하늘의 별들은 쓸쓸한 목동들에게 보석들의 속삭임처럼 고요한 노래를 뿌려주고, 어렴풋한 산마루에서는 새로운 하루의 삶을 밝혀오는 새벽이 달려옵니다. 그러나 사람의 힘만이 뻗치는 곳, 그래서 위세 등등한 명성만이 번쩍이는 그 곳, 사람들의 힘자랑으로 떠들썩한 그 곳, 일컬어 ‘사람들의 도시’에서는 하느님께서 하실 일이란 없는듯합니다. 하느님께서 무엇인가 하시고자 하셨던 그 예루살렘, 그곳은 이제 ‘하느님의 도성’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들의 도시’로 변하고, 그곳의 하늘은 세상 권세의 매연으로 하느님 별빛의 그 반짝임을 가려버렸던 것이지요. 그 도성의 하늘 아래 천사들이 합창을 한들, 권세로 지붕 삼은 사람들의 호사로운 잠자리에 무슨 구원의 메시지로 들려올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날도 구세주 오시고 우리들의 세계에 그 분이 함께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쾌락과 물질만능의 흥청거림 속에서 우리의 하늘 또한 구원의 소식 퍼지지 못하는 듯 캄캄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세상에 오셔서 우리 가운데에 계심을 동방박사들이 찾아와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멀리서 알아보고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깨닫지 못하고 당황해 했던 예루살렘 당국자들이 부끄럽게도 먼지 덮인 성경책을 꺼내들어, 주님 오셔 계심에 대한 예언을 뒤늦게 확인하려 했던 것처럼, 구원 소식을 깨닫지 못하고 살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미 와 계심을 새삼 깨우쳐주는 공현대축일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미 와계심을 새삼 깨우쳐 주는 이 축제의 날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깨달아 결심합시다. 온갖 거짓과 추악한 탐욕과 불의한 권력으로 세상의 하늘이 캄캄할지라도, 짙은 어둠일수록 가녀린 호롱불 하나가 더 소중하듯, 강생의 신비를 깨달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올바른 삶의 태도가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 별빛처럼 잡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역사의 징후를 항상 하느님의 말씀(성경)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주변에 아직 이방인처럼 소외된 처지에서 구원의 빛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의로운 태도와 작은 사랑의 실천으로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렇듯이 강생신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 역동적으로 구현(공현)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 오신 소식은 입체적으로 퍼집니다.
출처 - 하부내포성지 다음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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