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2015년 12월 27일 하부내포성지 만수리 공소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1921년 처음 제정된 축일




성가정 축일이 제정된 배경


오늘은 성가정 축일입니다. 이 축일은 1921년에 처음으로 제정되었습니다. 이 축일이 제정된 배경을 우선 알아야 합니다. 1921년 전 까지는 우리 교회에서 이 축일을 별도로 지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제가 이 축일의 제정 연대를 기억하자고 말하는 까닭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에는 가정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것을 반성


역사에 대한 비판적 및 근본주의적인 시각으로 볼 때, 1921년 전까지는 우리 가톨릭교회에서 ‘가정(family)’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저는 솔직한 반성으로 회고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 회고 回顧해야 한다는’ 그것은 역사적 반성을 하자는 저의 제안인 것입니다.

 

뒤 늦은 깨달음 


그 ‘회고’는 간추려서, 다음과 같습니다. 1921년 전 까지는 교회가 신자들에게 ‘성당 잘 나오고 판공성사 잘 보면서 교회법대로 규정을 잘 따르라’고 해왔는데,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문제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깨달음은 너무나 뒤늦은 것이었습니다. 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지적을 해봅니다.

 

시민혁명의 시대(18~19세기) 


18세기 후반(1700년대 후반기)은 산업혁명의 발동시대였습니다. 그리고 그에 이어서 시민혁명의 시대로 이어집니다. ‘시민혁명의 시대’란 1700년대 말부터 1800년대에 이어지는 시대입니다. 즉, 산업의 변화에 따라서 사회 체제에 대한 의식의 급격한 ‘깨달음’이 따르고 있었던 18세기 후반 이후의 19세기가 격동적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 교회는 세상의 변화, 즉 시대의 징표에 대한 감지에 둔했습니다. 


교리적 신심만을 신자들에게 요구한 시대착오적 방식


그 시기에 유럽 사회는 그야말로 ‘시민혁명’을 요청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혁명의 요청에 대하여 교회의 깨달음 없이 교리적 신심만을 신자들에게 강요했습니다. 그래서 ‘반근대주의’의 공의회를 소집했습니다. 그 공의회가 ‘제1차 바티칸 공의회’입니다. 그 공의회는 오로지 ‘anathema sit’이라는 문구로 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anathema sit’ 그것은 교회의 뜻에 반항하면 ‘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한국어로 직역하면, 교회의 말을 듣지 않는 자들에게 ‘저주로다’라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그 당대의 격동적 사회에 교회는 ‘저주’를 선언했습니다.


교회 뜻에 반항하면 파문한다? 

 

그러한 시대에 일반백성인 신자들은 산업시대의 혼란과 사회적 갈등의 혁명구호에 휘둘리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교회규범에 따르기만을 신자들에게 강요하면서 사회의 격동상황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그에 대하여 저는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시골 농사에 희망이 없던 시절 


시골에서 농사지으면서 사는 신자 가정의 자녀들이 주변의 사정을 볼 때 시골 농사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감지합니다. 그래서 산업혁명의 도시 지역으로 진출하고자 고향을 떠나게 됩니다. 그 때문에 기존의 생활 패턴을 따를 수 없게 됩니다. 그게 우리 한국교회의 용어대로 ‘냉담신자’가 되는 양태입니다. 그리 되던 18세기 이후의 유럽사회의 신자 가정의 고민이었습니다. 도시로 진출하던(2백년 쯤 후의 한국에서 1970년대의 ‘이농현상’처럼) 사람들이 기존 패턴의 교회신앙생활을 영위할 수가 없게 된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는 혁명의 도가니가 되었습니다. 


1848년 공산당 선언 


시민혁명의 연장선상에서 1848년의 ‘공산당 선언’의 시대가 그런 도가니입니다. 그러나 우리 가톨릭교회는 그 시대에 ‘제1차 바티칸 공의회’로 그러한 근대사회의 격동에 대한 반동을 선언합니다. 이러한 모든 격동을 신앙에 위배하는 상황으로 본 교회의 선언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사회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은 것을 감지한 교회는 1891년에 ‘새로운 사태’를 고백하게 됩니다. 


공산당 선언보다 43년 뒤늦은 깨달음 1891년의 「새로운 사태」


그것은 ‘공산당 선언’의 1848년에서 43년 늦은 깨달음이었습니다. ‘새로운 사태’란 우리 교회의 그 유명하고 자랑스런 ‘Rerum Novarum’이라는 레오 13세 교황의 회칙입니다. ‘공산당 선언’보다 반세기 늦게 사회현실을 감지한 교회의 깨달음이었습니다만, 그것마저 교회내부에서 실력자들에게서 배척을 당했습니다. 그 회칙을 반포한 레오 13세를 대부분의 추기경들이 비판했습니다. 요즘의 우리 한국말 표현대로 ‘기득권자들’이 레오 13세 교황의 ‘Rerum Novarum’를 ‘공산주의자들의 말’ 즉 ‘좌빨의 주장’이라고 욕했습니다. 지금까지도 로마의 보수주의자들은 레오 13세를 ‘빨갱이 교황’이라 한답니다. 그 ‘Rerum Novarum’은 사실상 지금까지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에 바탕을 제시한 회칙입니다만, 그 회칙을 반포한 레오 13세는 근현대의 역대 교황들 중에 사람들이 기억하지 않는 분입니다. 빨갱이기 때문에!

 

그 레오 13세 교황 이후, 1900년대에 들어와서 인류는 1차 및 2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시대를 겪게 됩니다. 1900년대의 전반기입니다. 그 1900년대의 전반기에 우리 교회가 ‘가정’에 대하여 일말의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게 1921년도에 ‘성가정 축일’을 제정한 단초입니다.

 

1921년에 ‘성가정 축일’을 제정한 까닭이 뭣이겠습니까?

 

세계 제1차 대전 직후의 상황입니다. 산업혁명의 시대징표를 감지하지 못했던 교회, 이어서 혁명의 시대를 감지 못하다가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를 뒤늦게 감지하던 교회, 그러한 교회가 신자들의 ‘가정’이 붕괴되는 것을 가까스로 느낀 것입니다. 교회가 뒤늦게 느낀 ‘가정 붕괴’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을 교회가 느낀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농촌에서 살면 불리하다.

공장이 있는 도시로 가면 돈벌이가 잘 된다.

공장에서 일하면 농촌보다야 수입이 낫지만 고달프다.

그 도시의 공장생활은 일요일 주일미사가 보장되지 않는다.

그래서 농촌에서 도시공장에 취직한 사람은 냉담자가 된다.

도시에서 결혼하여 사는 사람의 가정은 신앙생활이 힘들어진다.

그래서 농촌의 본당신자들과는 다른 도시사람들이 된다.

그리고 본당의 기존 상태가 달라졌다.

그래서 신자들은 기존 본당의 신자들이 아니다.

도시로 흘러간 신자들은 기존 본당의 신자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본 본당들은 신자들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도시에 가서 사는 신자들은 예처럼 신앙생활 하지 않는다.

도시에서는 가정에서 예처럼 가족들이 기도하지 않는다.

왜냐면 공장(회사)에 출근하는 생활패턴 때문에 바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처럼 기도하는 시간 없는 가정들이다.

아빠는 출근하고, 엄마는 밖에 나가서 할 일 많다.

그래서 자녀들은 아빠엄마와 밥 먹는 시간 함께 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도하는 가정이 없어졌다.

그러므로 가정이 위태로워졌다.

그 때문에 ‘나자렛 예수님의 성가정’을 알려야 되겠다.

 

그래서 ‘나자렛의 성가정 축일’이 1921년에 제정된 사연입니다.

그러한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이 1921년에 제정되었습니다.

 

1921년 제정되고 1969년 오늘의 자리로 옮겼다 


그래서 12월 25일의 ‘예수성탄’을 지내고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삼왕래조축일)’을 지나서 그 다음 일요일에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이 제정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1969년에 전례개혁을 통하여 성탄(12월25일) 다음의 일요일을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오늘 이 축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성탄(12월25일)이 일요일이 될 경우에는 12월 30일에 이 축일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이 축일에 대해서 이렇게 제가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은 까닭이 있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시대적 상황에 흔들리면서 신자들의 가정에 대한 염려를 한 그 까닭을 설명하고 싶은 것입니다.

 

인류의 기본 공동체인 가정이 훼손 


산업화의 사회에서 인류의 기본 공동체인 가정이 훼손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신자들이 가정 중심의 생활을 할 수가 참으로 어려워진 실정입니다. 따라서 가정의 가치가 무시되고, 사회적 성취와 개인의 편리에 의한 생활패턴이 오늘날의 삶이 된 것입니다. 이런 사회 현실 하에서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마치 뒷북치기처럼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성가정 축일을 제정하고 오늘의 축제미사를 봉헌한다는 것은 저에게는 겸연쩍은 심정입니다. 그러한 교회의 입장을 대변하여 저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사제이기 때문에, 골치 아프게 여자를 반려자로 데리고 살아본 경험도 없고, 자식새끼 낳아서 속 썩은 일도 없는 처지에서, 우리 교우님들께 감히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무식한 목수 요셉과 촌뜨기 마리아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무식한 목수 요셉을 아버지로, 촌뜨기 마리아를 어머니로, 한 가정 안에서 자랐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인간의 생명이 태어나 자라는 곳이 가정이고, 사랑과 봉사가 실천으로 전수되는 곳이 가정이라는 것을 하느님의 아들이 몸소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가정생활에서 말할 수 없는 고뇌와 시련을 겪으시는 교우님들께, 마치 공자님 앞에서 문자 외우듯이, 말씀드립니다.


오늘 우리가 읽는 복음에서, 열두 살 된 아들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 부모가 아들을 잃어버리고 겪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길을 되돌아간 부모가 그 실종 아들을 사흘 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되찾았습니다. 그 아들 예수는 성전에서 어이없게도 유식한 어른들과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요!  “이런 어이없는 일이 있을까? 부모를 제쳐두고 다른 사람들에게 아양 떨고 있어?”

 

황당해서 나무라는 부모에게 어린이 예수는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대답합니다.  “이런 싸가지 없는 놈이 또 있을까!”

 

그렇습니다! 요즘의 세상에서도 그렇습니다! 요즘 애새끼들 참으로 어이없습니다. 부모 심정 모르고 딴 짓을 하는 새끼들이 부모에게 대들어 말합니다. “내가 아빠 엄마의 소유물인줄 아세요?”하고 말입니다. 이렇게 세상 거꾸로 뒤집혔습니다.

 

이를 어찌 해야 합니까? 저는 자식새끼 낳아 키워본 경험 없으면서도, 오늘의 복음 성경 보도 기사를 읽으면서 요셉과 마리아라는 부모의 뒤집히는 심정을 공감하게 됩니다. 요즘 애들에 대해서 어이 해볼 수 없는 ‘지랄 같은’ 심정입니다. 그 ‘지랄 같은’ 현실은 그 까닭이 왜일까요?

 

좀 저속하게 표현해보겠습니다.  ‘그 애새끼들 보면, 그 부모가 보인다.’ 그렇지요! 애들 하는 짓 보면 그 부모가 어떤 인간인지 짐작 되지요! 그렇다면, 오늘의 복음 성경에 보도된 예수 소년과 그 부모에 대한 이야기가 그런 ‘지랄 같은’ 집구석 이야기일까요?

 

그렇습니다! 그 소년 예수와 그 부모는 한 모습입니다. ‘하느님 일’을 세상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지만, 그 아들(예수)과 부모(요셉과 마리아)는 ‘하느님 일’에 관통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부모는 아들 예수의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고 보도하는 복음 성경은 즉시 이어서 다음과 같이 보도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 2, 51∼52)

 

그렇습니다! 여기서 오늘의 복음이 제시하는 강조점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가운데 성장과 은총이 이루어진다 


‘모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가운데 성장과 은총의 실현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마음속에 간직’할 줄을 모르고 모든 것을 세상에 알리는 세상입니다. ‘마음속에 간직’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가정입니다!

 

모든 것을 간직해야할 가정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모든 것을 ‘세상에서’ 이루어야 한다고 모두가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간직하고 이루어보자고 가정을 나서서 설치는 사람들은 ‘가정’을 떠나서 세상에 나아가 성공하고자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정’은 없어지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즉 어머니의 마음속에서(마리아의 마음속에서) 모든 것이 간직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 성경의 강조점이 다음과 같은 이 구절에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 51)

 

저는 한 사제로서, 우리 교우님들의 가정을 많이 관찰해왔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가정의 내면을 들어가 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다음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날 가정의 위기가 어디서 오는가? 가정의 내밀한 사정(비밀)이 엄마의 마음속에 간직되지 않고 세상에 호소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가정에 ‘어머니 마음속’의 역할 간직이 아쉽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들의 마음이 가정을 떠나 세상에 나가있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나자렛의 성가정 축일’에 우리 교회에 대고도 말하고 싶습니다. 다음과 같이 말입니다.

 

“세상의 복음화! 그것은 교회가 ‘어머니 노릇’해야 가능합니다! 마음속에 모든 걸 간직하는 마리아처럼!”

 

세상의 징표를 뒤늦게 깨달은 레오 13세의 ‘Rerum Novarum’을 아직도(125년 지난 오늘도) 깨닫지 못하는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여! 아직도 한국교회는 이 사회의 어머니의 마음속이 되기까진 얼마나 기다려야 하오…? 


어머니를 보고 싶습니다!

가정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어머니를!


출처 - 하부내포성지 다음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91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