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2016. 1. 1. 하부내포성지 만수리 공소
평화? 서로 처지를 바꾸는 사이에 가능한 것!
평화란, 관계 속에 스며드는 것
인류의 역사적 과제와 신앙의 구세사적 목표는 한가지
우리는 오늘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써 구세주 강생 2천16년 새해의 첫날을 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을 일컬어 ‘평화의 날’이라 합니다. 이러한 오늘 우리는 강생신비의 구세사적 및 역사적 성취로 깨닫는 축제로 새해를 시작합니다. 즉, 이 새해의 첫날로 우리 인류의 역사적 과제와 우리 신앙의 구세사적 목표가 한 가지임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의 구원과 인류의 참 평화는 한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구원과 인류의 참 평화
이렇게 인류구원과 세계평화를 동일선상에서 한 날에 기원하면서, 미사의 복음에서 구세주의 베들레헴 마구간 탄생 사건이 성모 마리아의 가슴 속에 고요하게 간직되었다고 듣고 있습니다(루카 2, 16∼21 참조). 인류구원의 사건이 마리아의 마음 안에 간직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하시는 일이 교회 안에서 조용하게 성취되고 있음을 뜻합니다.
소리없이 진행되는 구원의 사건
그렇게 사람으로 오셔서 먼저 나자렛의 가난하고 고요한 가정에서 구원 사업을 시작하시는 것을 관찰하며 성모 마리아가 마음속에 간직하더라는 복음 성경의 보도를 지난주일 ‘성가정 축일’에도 들었습니다. 그러한 지난해의 마지막 주일미사에서 전해들은 바 있습니다(루카 2, 51 참조). 이렇게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이루어진 일과 나자렛 가정에서 이루어진 일이 성모 마리아의 마음에 조용히 간직되었듯이, 그렇게 주님의 강생신비가 우리 자신의 삶에 있어서 깊숙한 내면의 바탕이 됨으로써 구원 사건이 소리 없이 진행된다는 것을 오늘 깨닫게 됩니다.
구원을 이루어가는 모습이 임마누엘이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그 모습을 임마누엘(Immanuel),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라 일컫습니다. 이 새해 첫날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분께서 이 새해를 우리 구원을 이룩해 가시는 또 하나의 해로 열어주시고 계십니다.
이렇게 우리 구원의 시간으로 한 해를 새로이 열어주시는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 마치 마리아의 마음에 깊이 간직되는 신비처럼 소리 없는 당신의 활동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그 구원 활동은 그러면 우리 안에서 어떤 구체적 방식으로 이루시는 것이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 구원을 위해 쓰시는 구체적 방식은 다양합니다. 정치 경제 학술 종교 예술 교육 오락 노동 스포츠 기술문명 등의 갖가지 인간적 삶의 형태와 그 성취 과정과 방식을 모두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구원을 위해 이용하십니다. 이러한 모든 인간적 삶의 형태와 그 방식을 통틀어 ‘문화(文化)’라고 일컬을 수 있을 것입니다.
혼자 하는 것이 문화는 아니다
문화란 무엇입니까? 문화란 인간 개인 각자가 혼자서 창출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들 사이에 서로의 삶의 관계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정치 경제 학문 예술 종교 스포츠 등등 모든 것은 인간 누구의 혼자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함께’ 이루는 것입니다. 즉 인간들의 관계 속에서 창달되는 것이 문화입니다. ‘관계 속’에서 말입니다.
구원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구원하심에 있어서도, 당신 뜻대로 하시지 않고 인간들 상호간의 ‘관계 속에서’ 구원사업이 이루어지도록 하십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문화 안에 들어오셔서 활동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이미 1,600년 전에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천명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도움 없이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도움 없이는 우리를 구원하려 하지 않으십니다.”(아우구스티노,「설교」(Sermo), 169,11,13: PL 38, 923에서 인용)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동참 없이 인류의 구원을 이루고자 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 사이에 들어오셔서 활동하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만큼 우리 인간의 자존심을 세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구원의 은총은 피동적으로 얻어먹는 게 아니다
즉, 우리가 순전히 피동적으로 얻어먹듯이 구원이라는 은총을 차지하게 하시지 않고,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의 주체가 되며, 자유로이 서로의 삶을 나눌 줄 아는 사이에 행복을 이루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다시 말하여, 우리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주변의 사람들 끼리 서로를 알아 볼 수 있는 관계로 살아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오늘 새해 첫날의 메시지에서 다음의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는 양도할 수 없는 존엄을 지닌 피조물로서 우리의 형제자매와 관계를 맺으며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들에 대한 책임을 지고 또한 그들과 연대하여 활동합니다. 이러한 관계가 없다면 우리는 덜 인간적인 존재가 될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무관심은 인류 가족에게 위협이 됩니다. 저는 모든 이가 새해를 맞이하면서 이 현실을 인식하여 무관심을 극복하고 평화를 이룩하기를 바랍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
이러한 말씀으로 ‘관계’를 강조하시는 교황님께서는 오늘날 사람들 사이의 ‘무관심’을 개탄스럽게 지적하십니다.
“다른 이를 배려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닫아버리는 이, 주변을 둘러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는 이, 또는 타인의 문제에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회피하는 이의 무관심의 태도는 상당히 널리 퍼져있고 모든 역사적 단계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무관심은 개인의 차원을 확실히 넘어선 세계적인 차원의 것이 되어 ‘무관심의 세계화’를 야기하였습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
교황님이 지적하는 무관심의 종류
그러한 ‘무관심’의 종류에 대해서 지적하시는 교황님께서는 특별히 ‘이웃에 대한 무관심’과 환경 즉 ‘모든 피조물에 대한 무관심’을 지적하시면서, 사람들 사이가 닫혀있고 사람과 환경 사이가 더불어 갈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고 개탄하십니다. 이에 대해서 사람들은 풍부한 정보를 접하면서도 세계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극적 상황에 대해서 모든 개인들이 아무런 느낌도 갖지 않고 무덤덤하게 대하면서 모두들 자기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외면하는 무관심의 중독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들 스스로 서로 사이가 파괴되고 생명적 관계의 환경에 대해서도 인간들이 파괴하면서 자기들 스스로에게 관련 없는 것처럼 아무런 느낌 없이 살아가고 있는데, 그러한 무관심으로 말미암아 모두의 삶이 망가지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관심의 사람들은 서로에게 이미 죽은 사람들
여기서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 그리고 주변 환경에 대해서 진솔해질 것이 요구 됩니다. 서로에게 나의 마음으로 말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진솔하게 말입니다. 그것은 나 자신 아닌 다른 사람과 자연(환경)에 대하여 대화를 걸어야 ‘사람’이지 않느냐는 반문에 스스로 대답을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길을 물었을 때 대답 없이 지나간다면, 그 질문자는 나를 귀머거리로 볼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얼굴을 지녔으면서도 대답을 할 줄 모른다면 그건 시체 같은 사람이지요. 그렇다면 심한 표현을 빌려, 무관심의 사람들은 이미 서로에게 죽은 사람들이라는 말이 됩니다. 도대체 사람이라면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응답이 있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듯 응답이 없는 우리의 답답한 실정을 ‘소통이 없는 사이’라 하는데, 우리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실정이 그렇습니다. 그러한 불통의 실상이란 진정 ‘평화’의 상실이라 하는 것입니다. 남북한 사이의 불통이 그렇듯 평화의 상실이고, 또한 사회 계층 간 불통이 평화의 상실이지요. 우리 사이에 ‘갈등’뿐입니다.
역지사지와 역지개연
이러한 실상에서 우리가 쓰는 말 중에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과 ‘역지개연(易地皆然)’이라는 말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 서로가 바꿔 살아야 사랑도 평화도 가능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서로 상대방 편에서 생각해주고 상대방 입장이 되어주는 것이어야 사랑하는 것이요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역지사지’란 ‘처지를 서로 바꿔 생각한다(to place oneself in other's place)’는 것이고, ‘역지개연’이란 ‘처지를 바꿔 살면 그 처지대로 동화된다(assimilation by the environments)’는 것입니다. 이렇듯 처지를 바꿔 생각하고 처지를 바꿔 사신 분을 우리 인간이 되어 오신 하느님의 모습에서 발견합니다. 다시 말하여, 주님께서 우리와 ‘역지사지’로 생각을 바꾸시고 ‘역지개연’으로 우리 인간들과 완전히 동일한 처지가 되시어 오신 것이 그분의 강생(降生)입니다.
주님의 그러한 우리 인간과의 역지사지와 역지개연은 철저하게 우리 인간 속으로 들어오신 모습이요, 소리 없이 우리 사이에 스며드신 그분의 우리 구원 방식인 것입니다. 그렇듯이 그분의 우리 인간과의 동화 즉, 우리 안에 그분의 스며드심은, 우리 인간들끼리도 그렇듯 ‘상호동화’와 ‘서로의 가슴 속을 차지함’으로써 평화 건설의 길을 갈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평화 건설의 구체적인 방식에 대해서 제가 전에 읽었던 이야기로 소개해보고 싶습니다. 어느 안경점 주인의 다음과 같은 경험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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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경점 근처의 시장에서 채소장사를 하시는 아저씨는 부인과 2남 3녀의 자녀, 그리고 장모님과 한 집에 살고 계셨다. 어느 날 아저씨가 초췌한 모습으로 안경점에 들어오셨다. 머뭇머뭇 꺼내시는 얘기인즉 장모님께 안경을 맞춰드려야 하는데, 장모님이 가격이 비싸다고 한사코 안 맞추려고 하신다는 것이다. 어려운 살림살이라서 아내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아저씨의 눈치만 보고 있는 것 같다며 아내와 장모님이 부담 느끼지 않고 자신에게 미안해하지 않게 안경이 아주 저렴한 가격인 것처럼 얘기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오만 원을 내놓으며 아내와 장모님 앞에선 정가에서 오만 원을 뺀 가격을 말해 달라는 것이었다. 며칠 후 온 가족이 안경점에 왔다. 할머니가 고른 안경은 정가가 십만 원꼴이었다. 아저씨와 미리 짠 대로 하면 오만 원이라고 내가 말해야 했지만, 할머니 표정으론 그것도 비싸다며 놀라실 것 같아 나는 그만 가격을 만 원이라고 말해버렸다. ‘경로우대 특별 서비스’라는 그럴듯한 거짓말까지 둘러대며 말이다. 할머니는 안경을 써 보시고 가격도 싸고 좋다며 자꾸만 거울을 보셨다. 이어 아저씨가 지갑에서 돈을 꺼내려는데 진열대 밑에서 불쑥 손자 녀석이 고개를 내밀더니 꼬깃꼬깃 접은 천 원짜리 여섯 장을 내놓는 것이었다. 할머니 안경 해 드리려고 동생이랑 모은 것이라며 수줍게 웃는 꼬마의 말에 할머니와 아주머니의 눈자위가 점점 붉어지는 듯 했다. 나는 그 만 원도 차마 다 받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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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점 주인의 체험담
이 이야기는 제가 오래 전에 ‘좋은 생각’이라는 잡지에서 읽은 어느 안경점 주인의 체험담입니다. 채소장사 아저씨와 그 집 꼬마와 안경점 주인 모두의 자기 처지에서 다른 사람 처지로 작은 마음들을 쓴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간들 속으로 들어오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똑 같이 인간(한 여인)의 아들로 작은 존재가 되어 오셨음이 그분의 강생입니다. 우리 인간의 역사에 그렇게 작은 존재처럼 들어오시어 우리의 자질구레한 애환 속에 당신 자리를 차지하시고 우리와 함께 걸어가십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또 한 해를 시작하는 바로 그 역사의 진행입니다.
이러한 역사의 진행을 우리는 마리아와 같은 태도로 감지해야합니다. 성모 마리아가 위대한 구세주의 강생 신비를 소리 없이 마음 열고 받아들였듯이, 서로 간에 작은 마음을 먼저 써주는 사이에 위대한 사랑과 평화는 문득 우리의 현실이 됩니다. ‘천주의 모친 마리아 대축일’은 그래서 우리 인간들 사이에 들어오신 주님의 강생신비를 만 1주간 채우는 날의 축제이면서 새해의 첫날이 되어, 우리 구원의 길 즉 인류 평화의 길을 또 한 해 동안 성실히 걸어가기로 다짐하는 날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이시자 인간 마리아의 아들이신 주님을 만나 작은 발걸음을 시작하는 신년 초하루에 그래서 저는 평화와 구원이란 나중에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땀 흘리는 과정 중에 스며들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평화’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서로에게 대한 작은 관심에서 비롯된 작은 노력으로 우리 사이에 평화가 가능합니다. 작은 관심으로 최선을 다 하면 그뿐인 것이 ‘평화’입니다. 그러면 어느 듯 그 평화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 구원의 길을 갑시다!
출처 - 하부내포성지 다음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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