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2015

2015. 12. 25. 하부내포성지

 

말하면서 놓치는 '성탄'

부끄러운 나의 성탄!



성탄절의 여러가지 추억들


저는 성탄을 맞이할 때면 저의 과거시절 성탄절에 대한 추억에 젖곤 합니다. 어린 시절의 시골 성당에서 맞이하던 성탄! 신학생 시절의 성탄! 군대 졸병시절의 성탄, 특별히 월남 전쟁터에서의 성탄! 사제생활 초년시절 군종신부로서 추운 전방의 병사들과 맞이하던 성탄! 외로운 유학시절 외국에서 본 이색적인 성탄! 시골의 성당 주임신부로서 가난한 교우들과 함께 했던 성탄! 도시 성당에서 시끌벅적 지내던 성탄! 지금의 이곳 하부내포 지역의 만수리 공소에서 맞이한 지난 수년간의 성탄!

 

아름다웠지만 아렸던 추억들


이렇게 과거에 지냈던 성탄의 추억은 모두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그 추억 때문에… 뭐랄까요…? 가슴이 ‘아리다’할까…! 하여튼, 그 모든 추억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 하는 안타까움으로 가슴 한 구석에 어떤 아쉬움이 응어리집니다. 이런 응어리를 ‘회한’이라 하는지요! 늦가을의 억새꽃 무리가 겨울맞이의 찬바람에 흔들려 춤추듯, 아련한 추억들에 아쉬움으로 얽히는 회한입니다.

  

그런 회한…! 그런 심정으로 성탄을 맞이합니다. 그런 추억의 심정으로 이번 성탄에 저의 과거와 관련하여 한 가지만 이야기 해봅니다.




도시 본당에서의 추억


전에 도시 본당에 있을 때는 혼자의 마음으로 저 나름의 성탄 준비를 하던 것이 있었습니다. 대림절 말미쯤에 적십자사의 헌혈소를 찾아가 헌혈을 하면서 성탄 준비의 흐뭇한 마음이 되곤 했습니다. 교우 분들께서 사제인 저에게 성탄 선물을 많이 주시는데도 저 자신은 어느 누구들에게 마땅히 건넬만한 선물을 찾기가 수월치 않고, 사제로서 돈을 써서 마련할 선물이 어울리지 않은 것 같아서, 내 몸의 한 부분인 피를 다른 사람들에게 주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즐거웠습니다. 그래서 적십자사의 이동(버스) 헌혈소를 찾아가 헌혈을 했습니다. 그런 헌혈은 그 도시 성당에 있던 몇 년 동안 매년 성탄절 직전에 제가 실천하던 일이었습니다.

 

헌혈 기부를 퇴짜맞은 사연


몇 년 동안 그리 하던 제가 그 성탄 직전 헌혈이 거부당하게 되었습니다. 헌혈하러 갔다가 혈압이 높다고 퇴자를 맞은 것입니다. 마음이 허전했습니다. 그리고는 지방의 작은 도시 성당으로 전임되었는데, 성탄절이 가까이 되자 전에 살던 그 도시의 역전을 찾아갔습니다. 그 적십자사의 이동(버스) 헌혈소를 찾아간 것이지요. 그리고는 말했습니다. 작년에 퇴자를 맞았는데 지금은 멀리 가서 사는 처지로 헌혈하러 왔다고요. 그랬더니 혈압 약을 계속 드시느냐고 반문을 하더군요. 그렇다는 저의 말을 듣고 저에게 돌아오는 대답이었습니다. “연세 들어 약 먹는 분의 채혈은 할 수 없습니다.”

 

분하고 슬펐습니다. 늙어가는 나의 피는 약물 때문에 더럽다는 것인가…! 그야말로 ‘자격 없음’의 판정을 받은 것입니다.

 

섬 지방 성당에서 가장 행복했던 성탄의 추억


그 후로 저는 성탄절 저의 유일한 자선행위(?)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대전교구에서 유일한 섬 지방 성당이라는 곳으로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 성당에서 교우 분들의 모임장소인 비닐하우스에서 크리스마스이브의 오붓한 시간을 지내던 추억은 아름다운 저의 과거 중 가장 행복한 성탄입니다. 섬마을에 사는 교우 분들께서 성탄자정미사 후에 조개며 굴과 해초를 가져다가 비닐하우스 안의 난로 옆에서 소주잔을 건네며 함께 나누던 그 자리로 오늘도 돌아가고 싶습니다.

 

미국 사는 친구가 보낸 선물


그렇게 몇 년 동안 행복한 성탄을 지내던 그 섬 지방 성당에서 한 번은 성탄 직전에 멀리 미국에 사는 저의 친구로부터 성탄절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 친구는 미국에서 인터넷 주문으로 국내의 출판사에 연락하여 저에게 책 3권을 보내왔습니다. 섬에 산다는 제가 매우 외로울 거라면서 책을 보내왔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저는 아래와 같은 메일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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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다, 친구야! 택배로 너의 선물 책 3권을 받았다. 너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했다. 너의 그 고마운 마음에 내가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성탄절이 가까이 오면 나는 늘 사람들에게 빚지고 사는 것을 새삼 느낀다. 그러면서도 내가 먼저 나서서 사람들 마음을 찾아가는 일을 놓치고 만다. 이번에도 네가 먼저 마음을 나에게 보낸 반면, 나는 사람들 마음에 다가가는 기회를 놓치듯이 말이다. 일상적으로 주어진 일, 판공이다 뭐다 하는 일들로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 챙기는 일은 놓치고 만다. 마치 나에게 주어진 직무에만 성실(?)하려는 듯이 하다가 정작 ‘사람에게는 불성실한’ 나 자신에 대해서 이런 때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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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웠던 까닭


이렇게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소개하는 까닭은 그 편지 중에 언급했듯이, ‘내가 먼저 나서서 사람들 마음을 찾아가는 일을 놓치고 나서’ 이 성탄절의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 부끄러워지는 것은 매년의 성탄에 반복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준비를 하지 못한 채 형식적으로만 주님의 성탄 축제를 맞이한 부끄러움인 것입니다.

 

베푸는 기회를 또 놓치고 말았다


그 성탄절, 그 섬 마을에서, 이런 부끄러움을 면하고 싶어서 미국의 그 친구로부터 선물을 받은 이틀 후 본당 교우님들 가운데 개인의 사정 상 성당에 나올 수 없는 분을 찾아갔습니다. 저 나름으로 그런 교우 분에게 이 성탄절 준비로 저의 마음이나마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오히려 그 자신의 냉담 상태를 질책하러 사제가 방문한 것으로 여겼는지, 안절부절 못하면서 저에게 따뜻한 차를 대접하고, 제가 나올 때 자기 가게에서 파는 어물을 싸주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그분에게 성탄 선물을 준 것이 아니라 거꾸로 선물을 받아가지고 왔습니다. 저는 그렇게 성탄절에 마음의 빚을 진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베푸는 기회를 또 놓치고 말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미국의 친구에게 편지로 말했듯이 “나에게 주어진 직무에만 성실(?)하려는 듯이 하다가” 결국 진짜 나의 것을 베풀진 않고 말만 하면서 “사람에게는 불성실한” 인간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은 오래된 그 추억과 더불어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식적인 축제로만 지내는 부끄러움


그렇습니다. 이렇게 매년 성탄절을 다시 맞이하면서도 늘 형식적인 축제로만 지내는 부끄러움을 어찌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저의 부끄러움과 더불어 오늘 이 성탄에 저는 아기 예수님께 여쭈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어찌하여 하느님의 아들이란 분이 마구간에 탄생하셨습니까?”하고 말입니다.

 

제가 예수님께 이렇게 여쭈어보는 말에는 다음과 같은 짓궂은 뜻이 들어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분이 하필 그렇듯 비참하게 마구간에서 탄생했다 해서, 이 성탄절에 꼭 불우한 사람들을 우리가 찾아나서야 되는 것입니까?”하는 질문인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신다


이러한 저의 짓궂은 질문에 대하여 마구간의 아기 예수님은 뭐라 대답하실까요? 이 성탄절을 보도하는 복음 성경 구절(루카 2, 1∼14 참조)의 행간에 아기 예수님은 말없이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만삭의 임신부였던 어머니 마리아가 머나먼 베들레헴에까지 가게 된 사연이 무엇인가? 어마어마한 권세를 지닌 로마 황제가 온 천하에 호구 조사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 때의 시리아 지방 무서운 총독이 누구였는지 아는가? 그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상 권력 하에서 힘없는 사람의 처지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이 아닌가? 그리고 베들레헴이란 곳은 만삭의 그 가난한 임신부의 처지를 살펴줄 사람 하나 없을 만큼 인심이 고약한 동네 아니었던가! ”(루카 2, 1∼7 참조)


마구간을 찾는 이는 누구인가?


말구유에 눕혀있는 갓난아기의 이러한 말없는 대답은 다음과 같이 더 깊은 호소를 우리에게 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세상의 정치적 권력과 사회 조직은 딱한 처지의 약자를 아랑곳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교회도 신자들의 돈을 걷어서 즐기는 행사로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뿐, 마구간을 찾은 사람들이 누구였는지는 모르고 있지 않는가!”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탄을 보도하는 복음서는 그 행간에 다음과 같은 훈훈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태어날 곳이 없어서 된바람 몰아치는 동구 밖 마구간에 은신하여 갓 태어난 한 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말구유에 눕혀있을 때 찾아가본 사람들이 누구인가? 그 추운 겨울밤에 집 없는 그들은 된바람 맞으며 벌판에서 양떼를 지키는 가난한 목동들이었지 않은가? 그들만이 하늘에서 들려오는 천사들의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았던가? ‘하늘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노래하는 소리를…”(루카 2, 8∼14 참조)

 

굶어본 사람이 배고픈 사정을 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오늘 성탄에 부르는 이 노래는 겨울의 그 베들레헴 동구 밖 밤하늘에서 들려오던 천사들의 메시지입니다. 그 메시지는 어려운 말이 아니라 아주 단순한 말입니다. “굶어본 사람이 배고픈 사정 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좀 속된 말로 표현하면, “당해봐야 억울한 사정 알아듣는다”고 할 수 있겠는데 더 형상화해서 표현하면, “어려운 사람이 도울 줄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사실적인 증언을 할 수 있는 말이 있습니다. 


소외된 사람 가운데 와 계시는 하느님을 발견하라


“부자는 베풀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이 베풀 줄 안다”고 말입니다. 그렇듯이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 치고 아랫사람 처지 몰라보고, 못난 사람들은 못난 사람들끼리 통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탄의 메시지는 “소외된 사람들 가운데 와 계시는 하느님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느님이 곧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볼 수 있는 큰 빛”(이사 9, 1)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 하느님은 그래서 권력이 하늘을 덮는 치세 하에 민심이 흉흉하던 곳에서 어둠 속에 버려진 사람들 가운데 아무런 힘도 없는 아기로 이 세상의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불우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하는 까닭


그러한 성탄을 우리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강생(降生)하셨다고 일컫습니다. 내려오셨다는 의미로 그렇게 일컫습니다. 하늘 높은 곳의 하느님 영광이 낮은 이 땅 우리의 보잘것없는 삶에 드러나지 않는 사랑으로 스며드신 것입니다. 영광을 감추시고 오시는 그분의 사랑은 그래서 권력도 가진 것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강생의 체험을 위하여 우리는 이 성탄절에 이 세상의 낮은 곳 즉, 우리 자신보다 불우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직무에만 매달리다가 소홀히 되는 것들


이런 말을 하는 저 자신이 그래서 부끄럽습니다. 제가 십 수 년 전에 친구에게 편지로 말했듯이, 저의 직책상 일상적으로 주어진 일들로만 마음을 쓰다가 사람들의 마음을 챙기는 일은 놓치고 마는 성탄절에 제가 반성하는 것 곧, 나에게 주어진 직무에만 매달리다가 사람들에게는 소홀히 하는 나 자신에 대해서 부끄러워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성실하시기 위해서 사람이 되어 내려오셨는데 말입니다. 그 동구 밖 된바람 마주치는 마구간에 강생하신 그분은 인근의 추위에 떨고 있는 목동들에게 그 탄생이 알려지신 분이었는데, 그와 반대로 성탄축제의 따뜻한 잔칫상을 그리워하는 저는 그래서 부끄럽습니다.

 

춥기만 한 사람들을 외면한 성탄축제의 무의미함


가난한 사람들이 마주쳐 당하는 된바람을 함께 당하지 아니하면서도, 반짝거리는 불빛 아래 동화 속의 주인공처럼 꾸며진 마구간의 아기를 조배하는 행렬이 성탄일까요! 우리의 세상에서 내몰린 처지로 삶 자체가 춥기만 한 사람들을 외면한 성탄축제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추위 속에 내몰린 사람들! 베들레헴 동구 밖의 목동들이지요. 그런 사람들, 그들의 모습은 오늘 여러 양태로 우리 주변에 보입니다.


추위 속에 내몰린 사람들을 보라!


독거노인들, 가족들과 격리 되어 요양원에 수용 당한 노인들,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릴 수 없는 장애인들, 취직할 날이 요원한 젊은이들, 언제 짤릴런지 모를 임시직 노동자들, 고향에 소식 전할 수 없는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들, 기업주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는 노동법 통과될 것 같아서 불안한 직장인들, 빚 덩어리로 숨어 사는 사람들과 삶의 터전 압류 당할 위기에 몰린 가정들, 시한부 숨을 쉬고 있는 불치병 환자들, 억울한 누명으로 갇혀 있는 감옥의 죄수들, 주변의 오해로 지탄 받는 사람들…, 그리고 이 성탄절에 즐겁다고 몰려다니는 아이들이 있는 반면에,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세월호’에서 아직도 그 시신마저 돌아오지 못하는 아이를 기다리는 엄마들…



그리고 누구에게 말 할 수 없는 사연으로 차마 고해성사도 보지 못하는 냉담 신자들, 감히 하느님께 나아가기 부당하다고 스스로 자책하며 괴로워하는 연약한 신자들, 명예와 돈으로 행세 꽤나 하는 사람들과만 친한 사제의 성당 공동체에 어울릴 기회를 찾지 못하는 가난한 신자들…

 

화려하지만 공허하기 그지 없는 성탄의 노래


이렇듯, 추위에 내몰린 ‘동구 밖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한데도 강생하신 주님을 찬미하는 성탄의 노래는 퍼지고 있습니다. 화려하지만 공허하기 그지없는 성탄의 노래가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과거 성탄절에 관한 추억이 부끄러워집니다. “내가 먼저 나서서 사람들 마음을 찾아가는 일을 놓치고 나서” 이렇게 성탄을 맞이하는 제가 부끄럽습니다. ‘성탄’을 말하면서 정작 성탄을 놓치고 있는 부끄러움입니다.

 

그래서 성탄의 낮 미사에 전하는 복음 중에서 다음의 구절이 저를 더욱 부끄럽게 합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 5)

 

출처 - 하부내포성지 다음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89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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