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 3주일
2015. 12. 13. 09:00 하부내포성지 도화담 공소
남편도 아기를 함께 낳듯이!
적어도 인생의 반절을 나누어!
사제가 연분홍색 제의를 입는 까닭
오늘 이 대림절 제3주일의 전례 거행을 하는 사제가 연분홍색(핑크) 제의를 입는 관습이 있습니다. 어떤 희열의 절정(acme)을 상징하는 이 색깔로 오늘의 주일 전례는 우리 희망이 무르익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구세주를 기다리고 있던 백성들에게(루카 3, 15 참조) 이제 머지않아 그분이 오신다고 확정적으로 알리는 요한 세례자의 선언(루카 3, 16 참조)으로, 곧 우리 희망의 성취를 내다보며 기쁨을 표현하는 것이 오늘의 이 핑크 빛 같은 이 대림절(희망의 절기) 절정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오늘 미사를 시작하는 입당송은 바오로 사도가 오늘 제2독서로 당부한 말씀을 노래합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필리 4, 4∼5)하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벌써 성탄절에 들어간 것처럼 “구원의 큰 기쁨을 누리며, 즐거운 마음으로”(오늘의 본기도) 기도하고, 이어서 구약의 스바니야 예언자로부터 기쁨의 구원 메시지를 청취하고 그 화답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래서 오늘을 일컬어 ‘기쁨주일’이라는 별칭을 붙이기도 합니다.
사이를 가로막는 벽을 허물면 평화가 온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듣는 이러한 기쁨의 메시지는 어떤 감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주님 오신다는 소식은 마치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루카 3, 4) 같다고 지난 대림 제2주일에 요한 세례자가 전한 말씀(이사 40, 3∼5를 요한 세례자의 전갈로 인용한 루가 3, 4∼6 참조)을 상기해야 합니다. 그 소식은 인간들이 서로 사이의 벽을 허물 때 주님 오시는 평화의 길이 열린다는 외침입니다만, 그 소식을 늘 외면해온 것이 우리 인간들의 역사였기에, 광야란 곧 인류사를 지칭하는 것임을 지난 주일에 함께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 광야 같은 인류사 가운데에서 인간 사이의 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벽은 그 자체로 긴장과 갈등을 조장
서울에서 시위를 하는 사람들 앞에 차벽을 설치하여 그걸 뚫자면서 폭력이 유발되었습니다만, 그 차벽이 없으니까 폭력을 쓸 필요가 없어져서 평화적 시위를 하게 된 사실을 교훈 삼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는 벽을 허물면 평화가 옵니다. 우리나라 남북한 간의 DMZ 철조망, 중동지방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두꺼운 장벽, 옛 동서 베를린의 콘크리트 장벽(Mauer) 등등…, 사람들 사이를 막는 벽은 그 자체로 긴장과 갈등을 조장합니다. 독일의 그 장벽이 허물어졌을 때 진정 그곳에 평화가 조성되었듯이, 평화란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것을 치움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이기주의의 골짜기, 교만의 산봉우리가 곧 장벽이다
그렇다면 진정 사람들 사이의 그 장벽을 허무는 일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그 일은 사람들 서로가 먼저 자기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데서 시작됩니다. 교만의 자존심으로 앞에 내세우는 것이 사람들 사이의 장벽이지요. 그래서 서로 먼저 겸허하게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자고 요한 세례자가 외쳤습니다(루카 3, 3∼5의 내용 참조). 자신의 죄를 먼저 고백한다는 것, 즉 회개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광야와 같은 고독의 한 가운데에 들어가는 일입니다. 곧 이기주의의 골짜기와 교만의 산봉우리뿐인 이 세상에서는 나의 잘못을 고백한다는 것은 광야에서의 고독과 같은 것입니다. 세상에 오시는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그 고독을 택해야 합니다. 그분을 따르고자 회개한다는 것은, 그것이 광야의 고독과 같을지라도, 이 절망적 세상에 ‘희망을 일구어주는 삶’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일생 내내 대림절
그러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래서 ‘일생 내내 대림절’이라고 했습니다. 그 ‘일생 내내 대림절’ 같은 우리의 삶이 곧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 5)는 ‘희망을 일구어가는 삶’입니다. 그렇게 희망을 일구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실천이 요구되는 것이겠습니까? 그 구체적 실천 방식을 오늘 복음 성경에서 요한 세례자가 지난주일의 말씀에 이어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루가 3, 8)하고 호통 치는 세례자의 외침을 듣고 우리는 그 구체적 실천 방식에 대하여 반문합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가 3, 10)하고 말입니다. 이에 대하여 세례자가 확실한 대답을 주고 있는 것이 오늘의 복음 내용입니다(루카 3, 11∼14 참조).
먹고 입고 사는 일을 이웃과 한가지로
그러한 회개의 열매를 구체적 행실로 보일 때 그야말로 우리의 희망이 성취됩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은 당시 부패한 공직자들 즉 세리들과 군인들에게 백성을 등쳐먹지 말고 공평무사(公平無私)하게 직분을 수행하라고 꾸짖었습니다만(루카 3, 12∼14 참조), 그보다 근본적으로 새로운 삶의 태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공직자의 공평무사한 공무수행은 본래 그러해야 하는 것일 뿐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하지 않았음이 잘못인 것이지요. 그러하지 못한 부패공직자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실정법이 더 먼저 칼을 들 것입니다만, 오늘 요한 세례자는 그러한 법률적 요청 이전에 인간들이 근본적으로 바뀌어 새 세상을 열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루카복음서 3장에서 공직자들에 대한 꾸짖음 앞의 11절의 말씀입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여, 먹고 사는 일 입고 사는 것을 이웃과 한 가지로 하는 삶을 촉구한 것입니다. 이웃의 고통을 함께 나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직자들의 비리를 척결할 깨끗한 사회 건설과 같은 개혁적 과제 이전에 더욱 새로운 세상의 창조를 강조한 것입니다.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는 범죄 행위의 근절은 물론이려니와, 그보다 더욱 타인의 고통을 공유함으로써 진정 새 세상이 열린다는 메시지가 오늘 요한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 맞이할 대비책으로 제시한 것입니다.
진정한 고통의 공유란
고통의 공유! 그것에 대하여 우리는 언젠가 정치적 구호로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른바 ‘고통분담’이라는 구호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호는 우리 사회에서 늘 구호에 그치고 맙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러한 한낱 정치적 구호에 그쳐버린 허위적 ‘고통분담론’과 구별하기 위해서, 오늘 먹고 사는 일 입고 사는 것을 이웃과 한 가지로 하라는 세례자의 메시지를 ‘고통공유론(共有論)’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이에 대하여 이해하기 위한 한 가지 예로써 불란서어의 ‘꾸바드(couvade)’라는 말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말을 저는 ‘의사분만(擬似分娩)’이라 번역하고 싶습니다.
의사분만(擬似分娩)이 필요하다
‘의사분만’, 이것은 의사가 출산을 시켜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진짜로 아기를 낳는다는 게 아니고, 아기를 낳는 척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산모가 아기를 낳을 때 그 남편도 함께 분만실에 들어가 아내의 고통을 함께 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산모의 출산에 대한 공포와 고통이 감소하고 남편 자신이 아기의 아버지임을 당당하게 공식적으로 알리는 것이 된다는 것인데, 그 유래가 재미있습니다. 물론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뒷 집 박씨가 배 아프다고 뒹군 까닭
옛적에 여자들이 하느님께 몰려가서 항의 데모를 했답니다. “아기를 만들 때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만들었으니, 아기를 낳을 때도 아버지 또한 어머니와 같이 배가 아프도록 해야 공평하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 여자들의 이런 항의를 당해낼 수 없으셔서 그날부터 한 아기가 태어날 때마다 산모의 진통이 시작되기만 하면 동시에 그 남편도 자동적으로 함께 배가 아프도록 조치를 하셨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앞집 김 씨의 부인이 아이를 낳는다고 하는데, 뒷집의 박 씨가 배가 아프다고 뒹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양 당사자 두 사람에게 문제 꺼리가 되는 것일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여자들이 다시 하느님께 찾아갔답니다. “이제부터는 아기를 낳을 때 여자만 배가 아프도록 해주십시오.”하고 부르짖는 여자들의 요구를 하느님께서 다시 들어주시게 되었답니다. 그 후로 지금까지 아기를 낳을 때는 여자만 배가 아프게 됐다고 합니다.
평안도 박천 지방의 '지붕 지랄'
이것은 그냥 웃자고 꾸민 이야기입니다만, 남편이 적어도 자기 아내의 진통을 함께 하는 사랑으로 옆에 있어 줌으로써 산모의 정신적 안정을 돕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합니다. 미국 인디언 부족 중에는 아내의 분만 시에 그 남편이 물가에 가서 물에 빠져죽는 시늉을 하여 자기 아내의 출산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풍속이 있답니다. 인도의 한 부족에는 남편이 아내의 분만실에 함께 들어가 자기 배를 움켜쥐고 신음하면서 같이 아파해야 하는 관습이 있답니다. 우리나라에도 평안도 박천(博川) 지방에서는 아내가 분만할 때 그 남편이 지붕 위에 올라가 용마루를 끌어안고 “아이고 배야” 하면서 비명을 질러서 그 소식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풍속이 있다는데, 그것을 ‘지붕 지랄’이라 한답니다.
꾸바드의 숭고한 의미
그런데 ‘꾸바드(couvade)’라는 말의 본래적 의미는 아주 숭고합니다. 원래 암탉이 병아리를 까기 위해서 ‘알을 품는 것’을 ‘꾸베(couver)’라 합니다. 그런데 새들 중에는 암컷이 알을 품을 때 수컷이 함께 알을 품는 새가 있답니다. 암컷 새가 혼자 알을 품으면 ‘꾸베(couver)’라 하고, 수컷 새도 함께 알을 품는 현상을 ‘꾸바드(couvade)’라고 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의 행위를 사람보다 새가 더 잘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여간 남편이 아내의 산고에 동참하는 갸륵한 고통공유의 행위를 ‘꾸바드’라 합니다. 그래서 이즈음 남편이 자기 아내의 진통을 함께 하는 사랑으로 옆에 있음으로 해서 산모의 정신적 안정을 돕고 고통을 함께 하는 것은 참으로 권장될 만합니다. 진통을 함께하기, 즉 ‘고통공유’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까닭
그렇듯 아내의 고통을 진심으로 함께 하려하는 것과 같이, 그리고 자기 자녀가 아프면 대신 아프고 싶은 부모의 태도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의 고통을 나누어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곧 우리 인간들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시러 오신 것입니다.
인간 고통의 원인은 죗값을 떠넘기기 때문
우리 인간들의 고통의 원인은, 사실 인간들 스스로 죄를 지으면서 서로 사이에 그 죗값을 떠넘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 싸우는 인간들입니다. 그러한 인간 자신들의 죄악 탓에 비롯된 고통을 대신 당하시러 하느님께서 인간들 사이에 즉 인류사에 들어오시는 것이 강생(降生)의 신비입니다. 그 강생하신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성탄절의 신비이고, 그 역사적 사건으로 이루신 신비를 우리가 현재적으로 접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성체성사와 교회의 각종 전례, 특히 미사를 통하여 오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축복 가운데 깨닫고 있으며, 그러한 신비를 일상생활 가운데 이웃들 사이에서 실현하는 것이 곧 우리들의 작은 사랑의 행위요 고통공유의 삶인 것입니다.
그 사랑은 곧 산고 중 아내의 고통을 공유하는 남편의 ‘꾸바드(couvade)’와 같이, 조건 없이 함께 나누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조건 없는 사랑의 삶은, 남는 것을 가지고 적선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생명을 나누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 오늘 요한 세례자는 ‘옷’을 그리고 ‘먹을 것’을 나누라고 했습니다. 즉 내가 입고 먹어야 할 것을 이웃도 함께 갖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적어도 나의 인생 절반을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일입니다. 아내와 남편도 아기를 낳는 고통을 함께 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대림 제3주일이 '자선주일'이다
그것을 행실로 보이라고 하는 메시지를 따르기 위해서 오늘 대림 제3주일을 ‘자선주일’로 지내는 것이 우리들의 성탄절 준비 즉, 오시는 ‘주님 맞이’인 것입니다. 그 오시는 주님은 결국 우리 삶의 종말에 우리 모두의 고통을 완전히 없애주시고 우리 모두의 사랑을 완성시키러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주님께서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라”는 신앙고백을 실천하여 이 광야 같은 세상을 바꾸려고 중단 없는 고통 가운데서도 희망을 안겨주는 대림 메시지를 따라 투신하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의 그 신앙을 오시는 주님께서 들으시도록 고백합시다.
원문출처: 하부내포성지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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