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왕 대축일, 연중 제34주일

2015.11.22. 09:00 하부내포성지 만수리 공소

 

누명의 칭호 '임금'

그 분의 누명이 우리의 신앙 고백이 된다



The Last Sunday of the Year

 

오늘은 한 해의 전례력을 마치는 연중 제34주일입니다. 이렇게 한 해의 전례력을 마치는 날 교회는 예수님께 ‘왕’의 칭호를 올리는 축제를 올립니다. 오늘 연중 제34주일에 대하여 영어권에서는 [The Last Sunday of the year : Solemnity of our Lord Jesus Christ Universal King]이라고 합니다. ‘보편적 왕’, ‘온 세계의 왕’ 또는 ‘만세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축제라고 오늘을 일컫는 것이지요. 이러한 오늘 축일의 명칭에서 보듯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세상 권력의 상징인 ‘왕’으로 부르는 것은 사뭇 모순적입니다.

 

'왕'이란 칭호는 악의적 농간에서 비롯


이렇게 예수님을 ‘왕’이라 칭하게 된 것은 사실 상 일종의 악의적 농간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농간이란 예수님의 십자가에 붙어있는 명패에 얽힌 사연과 관련 됩니다.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명패가 예수님에 대한 큰 오해의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 십자가상을 제작하여 모시면서 그 악의적 농간의 명패를 꼭 새겨 넣고 있습니다. 그 명패는 예수님을 죽이라고 사형언도를 내린 빌라도 총독이 히브리어와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써서 붙이도록 한 것인데(요한 19, 19∼20 참조), 통상적으로 십자가상을 제작할 때 라틴어 명패의 약자 네 글자(I.N.R.I.)를 새깁니다. 그것은 ‘Iesus Nazarenus Rex Iudaeorum’(나자렛 출신 예수 유다인들의 왕)입니다. 


I.N.R.I (Iesus Nazarenus Rex Iudaeorum)

나자렛 출신 유다인들의 왕


이에 대하여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수석사제들)이 불쾌하게 생각하여 그 앞에 ‘자칭’이라는 말을 첨가하라고 빌라도에게 항의한 것을 보면(요한 19, 21 참조), 십자가에 치욕적으로 못 박힌 사형수를 유다인 자신들의 왕이라고 인정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 총독은 그 항의를 묵살해버립니다(요한 19, 22 참조).

 

I.N.R.I - 유다인들에게 수치를 안겨주는 명칭


예수님의 십자가 명패에 얽힌 이 일련의 사연을 놓고 볼 때 ‘유다인들의 왕’이라는 그 칭호는 사실상 그분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유다인들에게 수치를 안겨주는 명칭입니다. 자기들 앞에서 처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사람에게 자기들의 왕이라는 칭호를 붙인다는 것은 그들에게 치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로마 황제 밖에는 왕이 없다면서(요한 19, 15 참조) 자기들의 왕이라 사칭했다는 거짓 고발로 예수님을 죽여 달라고 로마 총독에게 부르짖습니다. 이 얼마나 치졸하고 가증스런 고발입니까! 유다인들을 폭압으로 다스리던 로마 총독에게 죽여 달라면서 거짓 고발을 한 그 자신들의 왕이라는 분이 치욕스런 사형을 당하게 되었으니, 그 치욕이란 유다인들에게 돌려진 것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사실상 유다인들에게 있어서는 로마제국의 폭압식민치하에서 로마황제를 그들의 왕이라 하는 것은 민족적 배신행위이자 하느님의 통치만을 믿어야 할 신앙 자체를 저버리는 배반이자 치욕인 것입니다.

 

너희들에게 치욕이 돌아가게 된다


그러한 상황을 역이용하여 빌라도 총독은 결국 그 유다인들에게 치욕을 되돌려 더해주는 정치적 판결을 합니다. 예수님을 죽이라고 고발하는 유다인들에게 그들의 왕을 처형한다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너희들의 왕이라는 자를 죽임으로써 너희들은 로마제국에 복속되어 있음을 너희들의 모순적 행동으로 증명하게 되었으니, 곧 이로써 너희들에게 치욕이 돌아가게 된다.’는 식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요한 19, 19)라는 명패를 써 붙이기에 이른 것이었습니다. 악의에게 악의가 되돌아가게 하는 보복행위처럼, 그리고 선의의 사람에게 누명 씌워 불의를 자행하는 자들에게는 치욕이 되돌아온다는 정의의 법칙이 암시되고 있음을, 우리는 빌라도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써 붙인 명패에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불의의 농간은 그것을 저지른 사람에게 반드시 어처구니없게도 부메랑으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농간의 작태를 우리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늘 목격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치무대나 사회현실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작태들입니다. 자신에게 손해되는 일이 일어나면 그것을 감당하기 싫어서 엉뚱한 사람에게 떠밀어 붙인다든가, 무죄한 사람 덮어씌워서 자신의 발은 빼고 시치미 떼려하는 비굴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역이용하여 따로 이익을 챙기고 자신의 입지를 유리하게 꾀하는 작태들이 매일같이 우리 사이에 벌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일본군 장교였던 박정희 


그러한 작태는 일제강점시기의 반민족적 행위로 일제에 부역하여 개인적 영달을 꾀했던 사람들을 연상케 합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박정희입니다. 최근 인터넷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백기완 씨는 박정희를 일컬어 ‘민족 반역자, 인간 반역자, 민주 반역자’라 일컬었습니다. 박정희는 일본제국을 ‘조국’이라면서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라고 혈서를 써서 군관 지원서를 냈던 사람입니다(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 보도). 그리고 그는 일본군 장교가 되어서 독립군을 토벌한 민족반역자로서 해방을 맞아 한국군부에 다시 장교가 됩니다. 이어서 그는 한국군부 내에 좌익 활동을 하다가 붙잡히고는 함께 활동했던 동료좌익분자들의 명단을 제공하여 혼자 살아남습니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배신으로 자기만 살았지요. 그 후 다시 국군의 장교로 변신하여 4·19 민주혁명 후 민주정부를 5·16 쿠데타로 찬탈하여 20년 가까이 철권통치를 하였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반역이었지요. 부하의 총탄에 죽게 되었음을 우리 국민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만, 지금에 와서 그의 딸을 대통령으로 삼은 현 정권 하에서 그를 이른바 ‘반신반인’으로 추앙하고 그에 대한 명분으로 국사교과서 국정화가 획책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우리 근현대사의 이야기입니다만, 이게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거짓 고발했던 그 가증스런 유다인들의 작태 이후 우리에게까지 이어져 온 역사적 사실인 것입니다. 그런 반역(배신)을 일삼아도 자신만 살면 된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자 교과서국정화의 획책이 선포되었습니다.

 

'나만 살자'는 비열한 풍조가 사회를 지배하는 까닭


그러한 배신(반역)은 ‘나만 살자’는 비열한 풍조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게 만듭니다. 그러한 사실은 나라의 경제사정이 어려울 때일수록 비열한 대기업들의 부정한 욕심 채우기가 노동자들을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임시직)으로 내몰 수 있도록 하는 노동법 개악에서 증명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땀 흘리는 선량한 사람들이 더욱 억울하게 당하고, 부유한 무노동 기득권층들만의 세상이 되는 일들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것을 일컬어 ‘신자유주의의 경제’라고 하는 미국식의 타락한 자본주의 체제가 갈 데까지 다 간 현상이라 할 것입니다. 


누가 차지하느냐가 관건이 된 세상


무엇이 옳고 그른지가 중요하지 않고 누가 차지하느냐가 관건인 세상입니다. ‘함께 살기’의 공동번영에 경제정책의 근간을 두지 않는 기득권의 농간으로 세상은 성실하게 땀 흘리는 사람들을 절망하게 만듭니다. 그것을 감시해야 할 국가권력이 비굴하게 서로 나눠 먹는 도구로 전락하고, 그러한 부정의 고리를 약삭빠르게 악용하는 짓을 이른바 ‘신자유주의’라고 일컫는 풍조에서 몸으로 땀 흘려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늘 한숨 쉬며 살아야 합니다. 당하는 사람들만 더 당하게 되고 검은 손들이 더욱 챙겨 먹는 더러운 세상인 것입니다. 농간이 승리하는 세상입니다.

 

더러운 농간의 원형을 십자가 사건에서 목도한다


그런 식의 더러운 농간을 우리는 십자가 사건에서 목도합니다. 억울한 사람만 더욱 억울하게 되는 모순처럼, 비열한 모함과 가증스런 농간으로 진실이 우롱당한 그 억울함의 표식이 곧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런 십자가에 매달려 억울하게 죽어 가신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의 머리 위에 그 모순의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왕’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 또한 그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분에게 ‘왕’이라는 칭호를 드리며 축제를 올리고 있음은 해괴한 모순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 모순의 일련을 오늘의 복음 성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빌라도 사이의 대화에 대한 오늘의 요한복음서 보도내용(요한 18, 33∼37)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우리의 신앙적 이해의 관건이 되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확실히 알아들어야 할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는 얼토당토않은 누명을 쓰셔서 로마제국의 총독에게 고발되어 끌려오셨는데, 실상 그분은 당신 자신을 그런 현세적(유다인들의) 왕이 아니라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입장이시라는 것을 밝혀주십니다(요한 18, 36).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분이시라는 것을 알아보는 사람이란, 그분이 증언하시는 진리의 편에 선 사람이라고 또한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8, 37).

 

정체를 밝히신 말씀을 알아들을 사람 누구인가


이렇게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의 정체를 밝히신 말씀을 알아들을 줄 아는 사람이란 누구인가에 대하여 오늘 우리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곧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그분이 증언하시는 진리의 편에 서있는지 우리 자신에게 물어봐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불의에 합류하지 않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의 불의에 동조하지 않기 때문에 모함을 받고 손해를 보면서도, 우리의 신앙선조들이 순교의 길을 가면서 그랬듯이, 그 치욕과 억울함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다는 우리의 신앙적 각오를 다지기 위해, 우리는 억울하고 치욕스럽게 죽으신 우리의 주님 머리 위에 붙여진 그 치욕스런 누명을 지우지 않고 바라봅니다. 그렇게 그분의 누명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사실상 그분이 우리가 추구하는 진리와 정의의 세상을 완성하실 참다운 왕이시라는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불의가 팽배하여 정의롭게 살기 험난한 이 세상에서 우리가 고독의 눈물과 성실의 땀을 흘려 진리의 길을 가고 있음을 증거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진리의 왕께서 정의와 평화로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완성하러 오실 그 종말의 날을 맞이하기 위한 삶에 충실하고 있음을 우리는 일상에서 늘 증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전례력 마지막 주일로 지내는 까닭


그래서 오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연간 전례력의 마지막 주일로 지내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신앙의 길이란 늘 종말을 향한 삶이라는 것을 다짐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권력에 의한 삶이 아니고, 이 세상 너머의 때에 이르기까지 그분이 이루고자 하신 그 진리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 우리 자신이라고 오늘 우리는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이 억울하게 누명으로 쓰신 ‘왕’이라는 칭호로써 죽으신 것처럼, 우리 또한 세상에서 억울함을 당할지라도 진리의 길을 가고자 다짐하면서, 그분에게 모순적이게도 이 세상의 용어를 빌려 찬미를 드립니다. “주님은 임금님”하고 말입니다(오늘의 말씀전례 화답송 시편 93 참조). 이렇듯, 어처구니없는 칭호로 쓰신 그분의 누명이 곧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고 있습니다.

 

원문출처: 하부내포성지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84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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