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성인 대축일
2015. 11. 1(일) 하부내포성지
큰 침묵 속의 광명
그들은 사라진 게 아니라, 말이 없을 뿐!
영원한 행복 속에 계신 분들을 기리며
우리는 오늘 이승을 건너 영원한 행복 속에 계신 분들을 기리는 축제를 올립니다. 그분들은 역사 안에 이름을 남긴 분들도 계시고, 이름을 남기지 않은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그분들에게 있어서 역사에 이름이 남든 않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분들은 역사를 넘어 영원 속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144,000명의 숫자는 상징적 표현
사실 오늘은 역사 안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분들의 축일이라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연중 축일표(전례력)에는 날짜에 따라 성인들의 축일을 지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인들의 숫자는 이승에서 우리가 다 알 수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로 봉독하는 묵시록에서 ‘하느님의 종으로서 이마에 인장을 받은 이들이 십사만 사천 명’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묵시 7,4 참조). 그 144,000명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 12지파에서 각 지파 12,000명을 계산한 숫자입니다만, 이건 12라는 충만의 수를 곱한 상징적 표현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상에서는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묵시 7,9)가 영원한 삶에 들어간 사람들이라는 묵시록의 표현인 것입니다.
시성식은 우리 자신들을 위한 일
우리 교회의 성인명록에 올리는 일을 ‘시성식(諡聖式)’이라 합니다. 순교로써 신앙을 증거 한 분, 혹은 우리보다 먼저 신앙의 길을 걸어 훌륭한 삶을 보여준 분에 대한 엄격한 조사를 거쳐서 성인(聖人)으로 교회가 선포하는 것이지요. 그 시성절차를 통하여 그분의 삶을 후대인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시성식을 해드린 성인에게 이승의 우리가 영광을 드리는 이유는 그분 자신에게보다 오늘의 우리 자신들을 위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분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서 들려오는 칭송의 소리는 사실상 의미가 없습니다. 그분들에게 있어서 세상은 이미 지나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아직도 이 세상에 머물고 있는 우리들에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분들의 삶을 본받고자 하는 목적에서 시성식을 하고 성인명부에 따른 축일을 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성인들, 즉 거룩히 살다가 이승을 건너간 분들의 명부를 우리는 모두 작성할 수 없습니다. 명부를 작성할 수 없는 분들이 곧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묵시 7,9)입니다.
알 수 없는 성인들 모두를 기리는 11월 1일
사실상 시성식 제도가 생기지 전, 까마득한 2천 년 전 초기 교회 때부터 ‘성인’이라 일컬어지던 분들이 무수합니다. 시성식을 하지 않고도 오늘날의 우리에게까지 그 이름이 전해지는 성인들입니다. 그러나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분들은 우리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저 하느님께서 아시기만 하면 그만인 분들입니다만, 교회는 그 알 수 없는 그분들 모두를 기리는 축제를 오늘 11월 1일 올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늘의 축제를 통하여 저는 특별히 우리 한국의 박해시기에 순교하신 분들을 비롯하여 그 엄혹한 시대를 살아가며 신앙을 지켜 삶을 마치신 신앙의 선조들 모두를 기리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해미 순교지 성역화 에피소드
제가 30년 전 해미 순교지를 성역화하는 일을 하면서 해미본당의 수호자를 ‘해미무명순교자들’로 정하여 교구에 보고한 일이 있습니다. 교구의 모 인사께서 저를 질책하였습니다. “시성을 하지도 않은 순교자들을 어떻게 본당의 수호자로 할 수 있는가?”하는 꾸중이었습니다. 그에 대해서 저는 다음과 같이 반문으로 대답을 했습니다. “로마에서 순교하신 베드로 또는 바오로 사도와 다른 순교자들을 누가 언제 시성식 해드렸는가? 그리고 저 위대한 교부 아우구스티노를 누가 언제 시성식 해드렸는가? 해미에서 박해를 당하여 치명하신 분들의 이름을 일일이 알 수 없다 하여 시성식을 할 가능성이 없지만, 그분들은 이미 하느님 대전에서 영원의 행복을 누리고 계시는 분들 아니신가? 여기 해미의 오늘날 후손들이 그분들처럼 자기 이름을 남기지 못할 들풀같이 질긴 신앙을 살아갈 다짐을 하기 위해서 ‘해미무명순교자들’을 수호자로 삼자는 게 잘못 된 일인가?”
해미에서 박해당하여 치명하신 분들의 이름을 일일이 알 수 있나
그러한 저의 항변으로 결국 해미본당의 수호자는 ‘해미무명순교자들’로 정해졌습니다. 서양말 표기로는 ‘The Unknown Martyrs of Haemi’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들은 본래 이름이 없는(nameless) 분들이 아닙니다. 이름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unknown) 분들일 뿐입니다. 이렇듯 ‘이름이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은 순교자들’이야말로 ‘역사’를 건너간 분들입니다. 즉 신앙의 튼튼한 다리를 건너 이승을 떠나 영원의 저승으로 넘어가면서 그저 하느님 앞에서만 행복하면 그만인 그분들이었습니다. 사실상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행보로 이승에서 저승으로 기꺼이 건너갈 자신감을 지녀야 합니다. 그 자신감이란 곧 우리의 ‘신앙’입니다.
Nameless가 아니라 Unknown일 뿐
해미에서 30년 전 그러한 일이 있었던 저는 오늘에도 이곳 하부내포 성지에서 같은 심정으로 ‘이름 알려지지 않은 치명자들’의 신앙을 강조하면서 순례자들에게 말합니다. 갈매못에서 순교하신 성인들의 유해를 죽음 무릅쓰고 서짓골에 옮겨 안장해드리던 그 신자들의 비장한 행보를 우리는 더욱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이 유해를 옮겨 모셨던 성인들의 이름은 선명하게 역사에 기록되고 시성식을 할 수 있었습니다만, 그 신자들의 이름은 오늘날 기억하는 사람들 없습니다. 성인들의 유해를 옮겨 모신 그들 또한 나중에 발각 체포되어 치명하였습니다만, 그들의 시신은 거두어지지 않고 서울 어딘가에 버려지고 말았습니다. 길가에 질기게도 살아 작은 꽃들을 피우는 들풀처럼 그들의 신앙은 사실상 오늘의 평범한 우리 신자들의 삶속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걸 일컬어 저는 ‘민초(民草)들의 신앙’이라 합니다.
하부내포성지는 민초 성인들의 터전이었다
그 민초처럼 살다가 저승에서 찬란하게 영원히 빛날 그러한 분들의 축제가 오늘 11월 1일입니다. 그분들은 지금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을 전해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큰 침묵 속에 빛나는 모습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봉독(마태 5,3-12)에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참된 행복 속에 있는 그분들입니다.
위대한 침묵, Altum Silentium, High Silence
우리는 오늘로부터 시작하여 11월을 위령성월로 지냅니다. 이름 알려지지 않은 우리 신앙선조들은 우리에게서 떠난 분들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에게 말을 하지 않는 분들일 뿐입니다. 큰 침묵 속에 계신 분들일 뿐입니다. 그러한 ‘큰 침묵’을 저는 신학생 시절 매일 저녁 끝기도로부터 다음날 새벽의 아침기도까지 ‘대침묵’이라 하여 지키던 추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매일 저녁끝기도 후 다음날 아침 미사 전까지 성직자 수도자들은 그 ‘대침묵’에 익숙 되어 있습니다. 그 대침묵이란 서양말로 ‘Altum Silentium’이라 합니다. 영어로 표기하자면 ‘High Silence’입니다. 몇 년 전에 ‘위대한 침묵’이란 영화로 소개된 프랑스 알프스 산간의 카르투시오 수도원의 삶이 그런 대침묵의 일상이었지요. 사실상 우리는 이승을 떠나면서 그런 대침묵의 영원 속으로 건너갈 것입니다. 세상을 떠난 모든 사람들이 이미 그 대침묵 속에 건너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침묵하고 있을 뿐입니다.
위대한 침묵 (2005) Die Große Stille Into Great Silence
다큐멘터리 | 스위스, 독일, 프랑스 | 168 분 | 국내개봉 2009-12-03
위대함은 침묵 속에 있다
그러한 대침묵으로 건너간 분들 가운데, 우리의 ‘역사’에다가 자기들 이름 석자마저 생략하고 건너간 순교자들이야말로 ‘높은 침묵’의 광명으로 더욱 빛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이승)에서 성공하자면 자기 이름 자체부터 시끄러워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승과 저승 사이의 시간을 초월한 위대함은 이름마저 가려진 ‘침묵’ 속에 있습니다.
그러한 침묵을 기리는 날이 오늘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이며, 한 달 동안 우리의 ‘위령성월’입니다. 오늘부터 한 달 동안 우리 모두 침묵을 배우기로 합시다. 이름 알려지지 않은 순교자들을 본받으면서 말입니다. 우리 신앙은 ‘큰 침묵 속의 광명’으로 증거 되어야 합니다.
원문출처: 하부내포성지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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