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9주일, 전교주일

2015. 10.18. 09:00 하부내포성지 만수리 공소

 

선교는 실적이 아니라, 현재형 실천일 뿐

선교? 그건 '함께 삶'



 

오늘은 전교주일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 교회는 ‘전교의 달’로 정한 10월의 마지막 전 주일을 ‘전교주일’로 지냅니다. ‘선교’라는 것은 세상에서 흔히 상품을 홍보하듯이 무엇을 사람들에게 선전하는 행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행위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늘 어떤 홍보물에 포위되다시피 살아가고 있습니다. TV에서 혹은 인터넷이나 핸드폰에서 마구잡이로 홍보물이 쏟아집니다. 그러한 홍보물들은 사실상 우리를 위해서 제공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눈길을 끌어들여서 우리의 돈을 빼내가기 위한 수작입니다. 다른 말로 그 홍보물이라는 것들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상품광고로써 상업적 이익을 노리면서 우리에게 달려드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한 상업적 선전과는 본질적으로 달리하여 우리가 오늘 말하는 ‘선교’란 그 대상자들에 대한 사랑의 발로여야 합니다.


선교는 선전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선교(宣敎)’란 무슨 의미의 말입니까? 교(敎)를 선전(宣傳)한다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선교란, ‘복음 선포’ 더 나아가 ‘복음 실천’을 뜻합니다. ‘복음 선포와 실천’이란 어떤 것일까요? 우리 가톨릭교회의 위대한 교부이신 그레고리오 대교황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다음과 같이 하신 말씀입니다.


선교는 복음실천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복음 전파하러 파견하신 것은 말없이 행위로써 우리에게 다음의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즉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는 사람은 복음 전파의 직분을 결코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성 그레고리오 대교황의 <복음서에 대한 강론 17, 1-3>)

 

그레고리오 대교황님께서 위와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은 대략 1천5백 년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9년 전에 베네딕도 16세 교황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전교주일의 메시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사랑 실천을 지향하지 않고 하느님 사랑의 깊은 행동에서 흘러나오지 않는 선교는 그저 박애 활동이나 사회활동으로 축소될 위험이 있습니다. 실제로 모든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야말로 복음 체험과 복음 선포의 핵심이고,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제 그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세상에 생명을 줍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비에 대한 완전한 표상이시고 구원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진 바로 그 사랑입니다.”(베네딕도 16세의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시다<Deus caritas est>중에서 인용)

 

선교는 하느님 사랑을 증거하는 행위


그렇습니다. 선교란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 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웃 사람들을 하느님의 사랑 안에 살도록 해야 할 그 사랑의 책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랑의 의무에서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모든 사람, 특히 더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의 필요를 살피기 위하여 몸을 낮춘 섬김의 자세로 사람들 사이에 살아야 합니다. 그러한 섬김의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이 되어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오로지 아버지의 영광과 이웃의 선익을 찾아 행동하는 사람을 일컬어 ‘선교사’라 합니다(2006년 전교주일의 베네딕도 16세 담화문 3항 참조).


선교는 우격다짐의 독선적 외침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웃에게 선교하는 자세란, 길에서 가끔 목격되는 일부 광신적 개신교 선교사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어야 합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우격다짐 식의 독선으로 외치는 것이 선교가 아닙니다. 그러한 독선의 외침과는 180도 다르게 우리는 말보다 행동으로 이웃을 섬기는 자세여야 합니다. 우리가 보이는 그 섬김의 행동에서 이웃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선교는 교회 선전의 술책이 아니다

 

그렇습니다. 선교란 ‘교회를 선전하는 술책’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복음 선포인 것입니다. 그게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처럼, 만난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 ‘선교’입니다. ‘함께 사는 것’이란 어떤 삶일까요? 그건 곧 ‘사랑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걸 깨우쳐 알아듣기 위해서 나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며 산다는 건 어떤 식으로 산다는 것인가?”

 

사랑은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


이에 대한 대답은 말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대개가 부도수표처럼 보장성 없는 표현입니다. 왜냐면, 그건 감정표현일 뿐이기에 그렇습니다. 실천으로 증명해야 하는 게 사랑이기에 그렇습니다. 사랑이란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는 것’ 그것은 상대자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즉, ‘함께 사는 것’이 사랑입니다. 함께 살지도 아니 하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러므로 상대자와 삶을 함께 하지 않고서는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복음은 ‘함께 삶’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 전파’라는 선교란,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삶’인 것입니다.

 

오늘 ‘전교주일’을 맞이하며 가톨릭신문이 특집으로 보도한 좌담기사(오늘 일자의 가톨릭신문 11쪽)에서 발언자 가운데 다음 같은 말을 한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몽골에서 선교사로 살아왔는데요, 처음엔 세상 끝까지 나아가 하느님 말씀을 전한다는 생각으로 파견을 받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 모두 각자가 서 있는 곳이 (…) 선교지라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바로 지금 옆에 있는 이웃이 세상 끝에서 만나는 복음 선포의 대상이지요.”(김성현 신부)

 

“해외선교사로서의 기쁨은 어려운 환경을 잘 버텨내고 많은 이들에게 세례를 줬다는 등의 단편적인 결과가 아니라, 선교사 자신이 그들과 얼마나 ‘함께’ 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강승원 신부)

 

선교는 스스로 체험하고 삶으로 터득하는 것


가톨릭신문의 특별좌담기사에서 위 두 사제의 발언 대목을 저는 오늘 전교주일의 복음 말씀에 견주어 새겨듣고 싶습니다. 보도된 기사의 좌담 자리에서 좌장 격으로 발언한 정신철 주교(주교회의 해외선교 위원장)는 파견되는 해외선교사의 자세에 대한 훈계조의 말씀을 하셨지만, 앞에 인용한 발언을 한 두 사제는 자신이 체험하고 삶으로 터득한 표현을 했습니다. 여기서, 제도권의 입장에서 발언할 수밖에 없는 정신철 주교와는 달리, 선교현장체험의 두 사제들이 ‘선교’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라고 저는 평가합니다. 저의 이러한 평가를 오늘 봉독하는 복음 구절에 대한 깨달음의 기준으로 제시하고 싶습니다.

 

마태오 복음서의 맨 끝 세 구절을 오늘 전교주일의 테마로 모든 사제들이 입에 발린 강론을 할 것입니다. 그 세 구절로 전하는 예수님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18∼20)

 

오늘 봉독하는 복음서에서 우리가 청취하는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역점(포인트)을 무엇으로 이해해야 할까요? 세상 사람들을 많이 포섭하여 세례를 주고 교회 규범을 따라 살게 하라고 힘주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흔히들 생각하겠지요? 아닙니다! 저는 맨 끝의 한 줄 말씀을 포인트로 보고 싶습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18∼20)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분으로서 그 사람들에게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게 하신 분입니다.


예수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선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 이웃에게 보여줘야 할 것이 곧 사랑입니다. 예수님 식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곧 선교이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첫째가는 덕목입니다. 선교란 곧 ‘사랑 실천’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예수님 식 실천은 곧 ‘서로 섬김’입니다. 사랑이란 ‘함께 살기’라 하듯이 그건 곧 ‘서로 섬기는 일’이기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오늘 ‘전교주일’이 아니더라도 본래 연중 제29주일의 복음으로 우리가 읽을 말씀입니다. 마르코 복음 10장 35∼45절의 말씀이 본래 오늘 연중 제29주일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사랑하는 방식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는”(마르 10, 45) 것이었습니다.

 

선교는 종파의 세력확장이 아니다


그렇습니다. ‘선교’란 무슨 종파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사람들을 끌어들이려고 공세적 선전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하는 일로 사람들 속에 들어가는 것이 참다운 의미의 선교입니다. 선전으로 자기를 알리는 것이 아니라 종처럼 섬김으로써 자신을 사람들 속에 녹여 없애는 행위가 그리스도를 사람들 속에 존재케 하는 선교입니다. 예수님 식의 복음 선포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그분처럼 섬기고 삶을 바쳐서 그리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 이웃들이 예수님을 알게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저는 사제로서 우리 동네에서 그렇듯이 예수님을 잘 보여주지 못해서인지 가시적인 선교 실적을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예수님처럼 살지 못해서인 것 같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 반문하신 것처럼, 사람들이 복음을 들은 적이 없다고 한다면 그건 누구 책임이겠습니까?(로마 10, 18 참조) 즉,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 자신을 통하여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면 어찌 한단 말인가? 이렇게 오늘 ‘전교주일’을 맞이하여 반성을 하려하니 저의 마음이 우울해집니다. 예수님처럼 섬기고 목숨을 바쳐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역만리 조선땅에서 목숨을 바친 외국인 선교사에 대한 추억


저는 100-150여 년 전에 이역만리 서양에서 우리 땅에까지 천신만고로 찾아와 선교하다가 순교한 선교사들의 삶을 회상하며 더욱 부끄러워집니다. 그분들은 한국에 와서 말이 잘 통하지도 못하는 처지에서 숨어 지내면서 교우들을 위해 자신의 삶과 목숨을 바쳤습니다. 박해의 고난 가운데 교우들이 고통스러워하다가도 비록 말이 통하지 않는 서양 선교사 신부님이 함께 있다는 것 한 가지로 하느님께 확실히 신뢰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날도 제가 사제로서 교우들을 위해 여기 있다는 확실한 모습을 보여줘야 그로써 교우들의 마음과 이웃 사람들의 마음 사이에 하느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질 터인데 말입니다.

 

이러한 오늘 전교주일의 저의 마음을 거듭 다잡아보면서 교우 여러분들과의 사이에서 서로가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그것을 이웃들도 깨달을 수 있도록 살자고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아니, 하느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게 아니라, 하느님 사랑을 이웃들 속에서 실천함으로써 그 이웃 사람들이 하느님을 체험하게 하는 것이 곧 ‘선교’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 자신 오늘 전교주일에 선교실적 꼴찌인 것을 자인하여 부끄럽기만 합니다. ‘선교’ 그것은 양적 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늘 있는 그 자리의 평가될 수 없는 현재형 실천인 것입니다. 즉 ‘함께 삶’인 것입니다.

 


원문출처: 하부내포성지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77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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