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명절

2015. 9. 27(일) 10:30 하부내포성지 만수리 공소

 

늘 오늘 같은 세상이기를!

오늘은 결코 슬프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 한가위 명절에 부모형제친지들과 만난다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행복합니다. 혈육들과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만나기 때문에 그것으로 오늘은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결코 슬프지 않습니다.

 

사실 오늘은 명절이기에 시내의 음식점에 가서 음식을 사먹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혹 누가 끼니를 때우지 못할 처지일 경우에 오늘 아무 집이고 들어가서 먹을 것을 청하면 아마 차린 명절 음식을 선뜻 공짜로 내줄 것입니다. 음식점들이 오늘 영업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겠습니다만, 오늘 같은 날 어디 가서 돈 내고 밥을 먹어야 할 처지라면 슬픈 처지일 것입니다.

 

오늘 명절은 가진 것 없어도 모두 우리의 마음이 그렇듯이 부자 같이 느껴집니다. 따져본다면 우리는 오늘 모두 다 부자입니다. 그런 부자 된 심정에서 우리말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 같기만 하라”고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오늘 명절 기분은 그래서 순수합니다. 그 순수하다는 뜻은 오늘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너그럽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우리의 명절 분위기에 맞게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 15)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의 기준은 재산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 같은 명절에 우리 모두 체험할 수 있습니다. 재산이 많든 적든 우리는 오늘 부모형제친척들 사이에서 행복에 겨워합니다. 그래서 오늘 만나는 사람들끼리는 경쟁자의 사이가 아닙니다. 오늘은 누구나 서로 경계하거나 서로 속이거나 이용하는 사이가 아닙니다. 우리 사이에 오늘만큼은 서로 욕심 없이 만납니다. 그야말로 탐욕이 없는 서로가 되어서 즐겁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하고 오늘 복음서에서 말씀하신 예수님께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오늘 우리는 더도 말고 덜도 아닌 서로의 마음으로 행복한 한가위라서 오늘만큼은 우리에게 탐욕이 없습니다.”하고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그러한 무욕의 오늘처럼 늘 서로가 경쟁으로 마주치지 말고 그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모두가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어라.”하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응답하실 듯한 주님의 말씀을 상상하면서 저는 늘 한가위 명절 같은 기분으로 살았으면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명절이란 무엇입니까? 한가위를 두고 우리 민족의 ‘고유명절’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명절이란 민족 전원이 올리는 잔치라고 저는 해석합니다. 김 씨네 환갑잔치도 아니고, 박 씨네 아들 혼인 잔치도 아니고, 명절이란 우리 민족 모두의 잔치라는 겁니다.

 

한데, 잔치란 무엇입니까? 잔치란 사람들을 초대하여 대가없이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네 김 씨의 환갑이나 박 씨의 아들 혼인에는 이른바 축의금이라는 것을 가지고 참석해야 하지요. 그래서 오죽하면 청첩장을 고지서라고 빗대어 말하기도 할 만큼, 누구네 잔치에 초대를 받으면 우선 축의금을 얼마 가지고 가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실상 그 잔치 주인은 잔치가 끝난 후 그 축의금을 낸 사람들 명부를 잘 간직했다가 나중에 반대급부로 갚아야 할 날을 대비해야 합니다. 그렇듯이 우리네 잔치는 초대자와 참석자 사이에 마음의 부담을 느끼게 합니다.

 

하지만 한가위 명절 같은 민족적 잔치는 그런 게 아니지요. 그래서 명절은 우리네 마음에 부담을 주지 않습니다. 모두가 똑 같은 처지로 만나는 것 자체로 즐거운 것이 명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데도 명절에 똑 같은 처지가 아니고 서로 상하관계로, 또는 부탁을 해야 할 처지나 부탁을 들어주어야 할 처지로, 인사치레를 하는 사이로는 선물이라는 것 때문에 부담을 주고받게 됩니다. 그래서 명절선물이 아니라 ‘명절뇌물’이라는 자조 섞인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우리 사회가 그렇게 타락해서는 아니 되겠지요. 우리가 타락한 처지라면 아마도 조상들께 면목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상들 앞에 우리의 모습을 부끄럽게 하지 않도록 명절 준비를 하는 아름다운 관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조상의 산소를 돌보고 성묘하며 자손들이 모이는 명절 풍습이 바로 그 때문이지요. 그렇듯이 조상들 앞에 자신들의 모습을 되살피는 행위를 귀성(歸省)이라 합니다.

 

‘귀성(歸省)’이라는 말은 歸鄕省親이나 歸鄕省墓를 줄여서 쓴 말이라 합니다. 歸鄕이라 하면 글자 그대로 고향에 돌아가는 것을 뜻하지요.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집으로 돌아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homecoming 입니다. to return home이지요. 집으로 돌아가는 것, 그 돌아감은 생각만 해도 벌써 가슴을 고동치게 합니다. 그 집은 아버지가 계시고 어머니가 나를 기다리고 계시며 형제들과 이웃들의 반가운 얼굴들로 둘러싸인 곳입니다. 그래서 고향에 돌아가면 성친(省親)하게 됩니다.

 

이때 ‘省’이라는 말은 ‘본다(視 = see)’ 그리고 ‘살핀다(察 = reflect = watch)’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親’이라는 말은 부모형제친척 같은 혈육(familiar, parents), 즉 피붙이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省親’이란 부모형제친척을 만나본다는 뜻이 되겠지요. 고향에 돌아가 부모형제친척을 만나는 일이 ‘귀향성친(歸鄕省親)’ 곧 歸省이라는 것입니다. ‘귀향성묘(歸鄕省墓)’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 조상의 묘를 찾아보는 것이지요.

 

이 모든 뜻을 함축하여 歸省이란, 날아갔던 기러기가 돌아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춘거추래(春去秋來), 즉 봄에 뜻한 바가 있어 험한 세상으로 떠나가 흘러 다니던 숱한 날들의 땀을 가을바람에 날리며 이제 그만 돌아오는 날개 짓으로 행렬을 지어 반가운 무리 속에 합류하는 것이 歸省이지요. 봄에 뿌려진 씨앗들처럼 뿔뿔이 세상 땅에 던져졌던 자식들이 가을에 거두어지는 한 무더기의 볏단처럼 험한 세상에서 얻은 값진 수고의 열매로 큼지막한 덩치가 되어 부모님 품속으로 고향의 가슴으로 돌아오는 모습이 歸省인 것이지요. 그래서 이런 한가위에 만난 식구들이 나누는 인사는 “얼마나 고생되셨습니까?” “애썼구나!” “저 왔습니다.” “그래 잘 왔다” 하는 말들입니다. 그동안 어려웠던 모든 것들이 이제 한숨 접어지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행복스런 명절의 우리네 자화상이겠습니까! 우리의 이 행복에서는 거기 서로의 욕심과 원망을 찾아볼 수 없고 그저 서로 만나니 좋은 것이지요.

 

이러한 만남 가운데 행복체험의 명절풍습을 지녀오도록 관습을 전승해준 조상들께 우리는 더욱 감사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특히 하느님 품속에 먼저 가신 그 조상들과 친지들을 기억하여 기도할 수 있는 신앙을 지니게 된 것에 대해서 이 명절에 보람을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에 의하여 오늘 일요일 연중 제26주일임에도 불구하고 고유명절의 미사를 봉헌합니다.

 

이러한 고유의 명절에 먼저 세상을 떠난 분들을 위한 제사상의 제물을 마련하는 정성으로 합동위령의 지향을 바치며 오늘 미사를 봉헌합니다. 저는 이 명절에 교우님들 한분 한분의 그 봉헌하는 마음을 함께하기 위해서, 미사 전에 그 지향들을 일일이 확인해보곤 했습니다. 자기 부모님의 이름을 직접 예물봉투에 적어 넣은 그 손길들의 심정이 저의 마음에 맞닿는 듯합니다. 그리고 어느 분은 불의의 사고로 아들을 먼저 저승에 보낸 어머니로서 명절에 그 아들 이름 불러보며 절절한 마음으로 미사예물을 봉헌하십니다. 어느 분은 불과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자기의 배우자 이름을 떨리는 손으로 적어서 예물을 봉헌하십니다. 어느 분은 자기 형제자매들의 이름을 깨알같이 꾹꾹 눌러 적어서 예물을 봉헌하십니다. 그러한 분들의 마음을 어렴프시 함께 느껴보면서 저는 제단에 오릅니다.

 

어제 밤에 멀리 사시는 한 여교우님께서 저에게 온라인으로 글을 보내셨습니다. 제가 직접 만나본 일이 없는 분입니다. 그분은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오셨습니다.

 

“밝고 맑은 달을 보며 소원을 빌 때, 저처럼 외로운 사람들도 기억해 주십시오. 세월호 그 슬픈 이야기의 주인공들과 가족들을 기억합니다.”

 

이러한 글의 앞줄에는 “칼로 베어낸 듯 주변이 조용합니다.”라고 쓰셨습니다. 그분은 평양에서 피난 내려온 부모님의 딸이랍니다. 그리고 자기에게는 지금 남매의 자녀가 있답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 명절의 열나흘 밤 휘영청 밝은 달을 바라보면서 자기 주변이 칼로 베어낸 듯 조용하다는 외로움을 실토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명절일수록 더욱 고독을 가슴에 품을 수밖에 없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 고독은 보고 싶은 분을 이 세상에서 보지 못하는 안타까움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한 심정의 그분에게 저는 다음과 같은 답글을 보내드렸습니다.

 

“‘밝고 맑은 달을 보며 소원을 빌때, 저처럼 외로운 사람들도 기억해달라’는 자매님의 추석맞이 열나흘을 공감합니다. 자매님께서는 월남(피란) 가족으로서 고향을 찾지 못하는 분이시군요. 그리고 이미 고아(?)가 되셨군요. 저는 행복하게도 고향에서 지금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 역시 부모님 저승에 가셔서 고아(?) 신세입니다. 이런 한가위 맞이에 피붙이가 함께 하진 못하지요. 그래서 이 열나흘 밤에 지금 중천에 뜬 둥근 달처럼, 저의 지금 시간은 저 달처럼, 홀가분하기도(?) 합니다.”

 

어제 밤 ‘홀가분하다’는 저의 심정은 왜일까요! 모두가 ‘성친’하러 가기 때문에 저의 주변은 적막을 남겨놓았습니다. 이러한 적막 가운데 나의 귓바퀴에 밀착되어오는 음성이 있습니다. 하늘의 음성인 것입니다. 우리 집 강아지 두 녀석과 함께 현관 앞 층계에 앉아서 밤하늘을 쳐다보니 동편 산마루에서 휘영청 솟아오른 열나흘 둥근 달이 만수리 산골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더군요. 다른 때와는 달리 우리 마을의 이 열나흘 밤은 고요합니다. 모두들 자기 집 지붕아래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둥근 달 밝은 열나흘의 밤마을 정경은 각 가정들의 지붕을 그 적막의 보자기로 감싸주고 있었습니다. 그 고요 속에서 마을의 각 가정 지붕위에 달빛을 타고 내리는 축복의 하늘 음성이 나의 귀에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밤에 특별히 고독해지는 사람들에게 하늘은 더욱 축복을 내려 주리라 짐작이 되었습니다. 중천에 휘영청 떠있는 열나흘 달의 얼굴은 그래서 나에게 행복의 미소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 얼굴은 저 세상에 계시는 나의 어머니, 아버지, 동생들의 미소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이러한 밤의 적막이 나를 그 그리운 얼굴들에게 아주 자유로이 다가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홀로 떠서 밝고 행복한 둥근 달처럼, 주변에서 방해하는 사람 아무도 없는 그 홀가분함 때문에, 만날 수 없으나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을 마음속에서 만나는 행복한 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한가위는 결코 슬프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하느님 품에 안기신 분들을 기억하면서 기도하는 우리는 세상이 주는 아픔을 넘어서는 믿음으로 오늘 각자 나름의 행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 행복이란 ‘믿음’ 때문에 얻는 것이지요. 신앙인이 아니고서는 누리지 못할 그 어떤 행복이 오늘의 이 미사에서 우리가 체험하는 그것입니다. 우리가 이승과 저승의 사이에 가로 놓인 계곡 때문에 이승에서 슬프더라도 우리의 ‘믿음’으로 그 계곡을 건너가서 만나는 체험이 오늘 미사에서의 기도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얻는 오늘 명절의 체험으로써 우리의 현실을 다시 보는 눈이라면, 이 세상에서 미워해야 할 어느 한 사람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서로가 오늘 명절에 혈육으로 만나는 심정이 순수하듯이, 그렇게 우리 모두가 하느님 품속에서 함께할 영원한 잔치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명절이 민족의 잔치이듯이,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하늘나라의 잔치를 향하여 마음을 함께하는 처지라면 이 세상은 벌써 하늘잔치의 시작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 같기만 하기를 바라면서 순수해질 때 “그렇구나! 그러한 오늘처럼 늘 그러한 마음으로 모두가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어라.”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떠돌이 신세에서 돌아와 고향에 그리고 조상 앞에 모두 모이듯이, 그런 모습으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 자녀로 사는 세상을 바라면서 축복을 나눕시다.

 



원문출처: 하부내포성지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74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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