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4주일

2015. 9. 13. 09:00 하부내포성지 도화담 공소

 

새삼스런 질문: "예수님은 누구인가?"

새삼스런 질문: 우리는 왜 신앙인인가? 


 

 

오늘의 주일복음은 마르코복음서의 핵심을 제시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올해의 연중시기 주일복음으로 봉독하는 마르코복음서의 한 중간 부분입니다. 마르코복음서의 전체 내용을 놓고 그 전반부와 후반부를 구분하자면, 1장 1절에서 8장 30절까지 전반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8장 31절부터 이 복음서의 후반부가 시작됩니다.

 

마르코복음서의 전반부는 예수님이 누구이실까에 대하여 계속 생각하게 합니다. 마르코복음서를 처음부터 쭉 읽어오다가 오늘 주일복음으로 봉독하는 부분에 와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함께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즉 마르코복음서는 전반부의 내용에 대한 중간 결론으로 그 8장 27∼30절을 제시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르코복음서는 중간 결론으로 그 전반부를 8장 30절로 마치고, 분위기를 전환하여 후반부를 시작하는 그 31절에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에 이어서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셨다고 보도하는 마르코복음서의 이 부분은 전후반부의 분기점을 이루는 내용으로써 이 복음서의 핵심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서의 전반부를 쭉 읽어보면, 예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의문의 배경을 수없이 볼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라고 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알고 싶은 욕구를 유도했었지요(마르 1, 7∼8 참조).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에 하느님께서 그분을 일컬어 “내가 사랑하는 아들”(마르 1, 11)이라 하셨고, 그분이 광야에 계시는 동안에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습니다(마르 1, 13 참조).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시자 “사람들은 그 가르치심에 몹시 놀랐고”(마르 1, 22) 악령들린 사람이 그 분을 보고 누구신지 안다고 비명을 질러대자 사람들은 어찌된 일인지 몰라 했습니다(마르 1, 24∼28 참조).

 

마귀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만,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입으로 당신의 신분이 알려지시는 것을 원치 않으셨고(마르 1, 34 ; 3, 11∼12 ; 5, 1∼20 참조), 병자들을 낫게 하신 후에도 당신에 대하여 잘못 알려지는 것을 금하시거나 그럴 우려 때문에 피하기도 하셨습니다(마르 1, 34 ; 1, 45 ; 5, 21 ; 5, 43 ; 7, 36<지난주일 복음내용> ; 8, 26 참조).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께서 미친 줄 알고 그분을 붙들러 다녔고(마르 3, 21 ; 3, 31 참조),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분을 마귀의 하수인으로 몰아세우려 했고(마르 3, 22 참조), 신앙이 부족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도대체 누구일까 의아해 하기만 하였습니다(마르 4, 41 ; 6, 52 참조).

 

이러한 제반 상황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대하여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아 볼 수 있는 신앙이 요구 된다는 것을 이제까지 마르코는 암시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경탄하는 사람이라면(마르 7, 37 참조 : 지난주일 복음내용), 우리는 이제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리게 되어 제대로 말을 하는(마르 7, 35 참조 : 지난주일 복음내용), 신앙고백자로 변화되어 가면서, 이제 “똑똑히 보게 되어”(마르 8, 25 참조 : 소경이 눈을 뜨듯이) 곧 전개될 이 복음서의 후반부를 대해야 합니다. 그러한 신앙의 터득을 베드로의 고백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 27)하고 우리에게 묻고 계신 예수님께 대답을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뭐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까?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언자 중 한 분, 또는 기적 할 줄 아는 분, 혹은 석가모니나 공자처럼 훌륭한 분이라고 사람들이 그럽디다.’ 하고 대답할 수 있을는지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물어 오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때 우리는 예수님께 뭐라고 대답해야겠습니까? 베드로처럼 대답해야 하겠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 자신들에게 다시 질문해봅시다. 우리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며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입니까? 한번 대답해봅시다. “우리는 왜 신앙인인가?”하고 우리 자신에게 새삼스럽게 질문해야 합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은 누구인가?”하고 새삼스럽게 던지는 질문과 한 가지의 물음인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 29)하고 신앙을 고백한 것처럼 우리도 고백할 수 있기 위하여 마르코는 이 대목에 이르기까지 앞의 이야기, 즉 이 복음서의 전반부 내용을 우리에게 전해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다”고 베드로가 대답한 그 [그리스도]란 ‘메시야’ 즉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 “당신께서는 우리 구세주이십니다. 그래서 당신을 믿는 신앙으로 이렇게 당신을 따르고자 모든 노력을 하면서 삽니다.” 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고백한다면 예수님께서는 뭐라 말씀하실까요?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하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 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엄중히 당부하셨습니다(마르 8, 30). 그러고 나서 즉시 예수님께서는 비로소 당신께서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게 될 것을 명백히 말씀하셨습니다(마르 8, 30∼32 참조).

 

이와 같이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따르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씀드리면 그분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 “너희들이 그렇게 말을 한다만, 아직은 그렇게 말할 만큼 너희가 충분히 믿음의 생활을 한다고 할 수는 없다. 내가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부활한 그 길을 나와 함께 가지 않고서 말만으로 신앙을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듯이 오늘 야고보 사도는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야고 2, 14).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면 그 구세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가신 길을 함께 가지 않고서는 그분을 구세주라고 믿는다는 말은 한낱 바람에 날아갈 풍선 같은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사야 예언자가 묘사한 것처럼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 따라, ‘믿음의 귀를 열어 거역하지 말고 뒷걸음치지도 말고 모욕과 고통에도 굴하지 않으며 하느님의 도우심 만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답게’(이사 50, 5∼9 참조) 실천적 행동으로 신앙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길을 가시며 따라오라고 하시는 예수님께 방금 신앙고백을 했던 베드로가 가로막고 서서 그 길을 반대하자 예수님께서 뭐라 하셨습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 33∼34)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아버지)의 의향을 따르기 위하여 인간들한테 버림을 받아 죽으십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죽으시러 가시는 분을 가로막고 나서는 베드로의 인간적인 생각 즉 세상의 생각이라면 아직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진정으로 깨닫지 못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말로는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세속적 이해득실 앞에서는 뒷걸음을 치며, 고백한 신앙과는 정반대의 노선에 서는 비겁한 태도, 즉 행실에 있어서는 사탄을 따르고 있지 않은가 오늘 우리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을 지내는 중에 오늘 봉독하는 복음의 내용은 ‘우리의 신앙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하고 우리 자신들에게 새삼스럽게 질문을 던지고 깊이 묵상하게 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이 복음에 이어서 우리는 내일 9월 14일에 ‘십자가 현양 축일’을 맞이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어 가장 치욕스럽게 매달리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세상에서 영예를 바라는 삶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의 안위를 바라지 않고, 세상에서 천대받는 삶을 기꺼이 선택하여 신앙을 지키다가 끝내 목숨을 바치기까지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일(곧, 세상의 일)을 생각하는”(마르 8, 33) 분이 아니시고 “하느님의 일”, 즉 하느님(아버지)의 의향을 끝까지 섬기시는 분이셨기에 십자가에 달려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분의 그러한 모습을 지켜본 이방인 백인대장이 그분이 누구이신가를 그래서 알아보게 됩니다. 마지막까지 하느님을 부르시며 숨을 거두시는 그분을 보고 백인대장은 “이분이야말로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 39) 하고 실토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목숨을 바치셔서 하느님의 의향을 성취하시는 분이시기에 그로써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믿도록 우리를 깨우쳐 줄 목적으로 마르코는 이 복음서를 썼던 것입니다(마르 1, 1 참조). 그러한 이 복음서는 전반부를 통하여 그분에 대한 깨달음을 얻도록 우리를 안내하고, 이제 그 후반부로써 그분의 가시는 길을 함께 가도록 이끌어 줄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참 모습을 확실하게 알아보도록 이끌어주기 위하여 그 후반부 시작으로 그분의 수난예고 말씀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깨달은 제자답게 그분을 행동으로 따를 것을 특별히 9월의 ‘순교자 성월’을 통하여 다짐해 나가야겠습니다. 다음주일은 마침 ‘103위 한국 순교성인 대축일’이기에 오늘의 복음에 따라 우리 신앙을 순교선조들을 본받아 다짐하는 날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원문출처: 하부내포성지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72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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