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1주일
2015. 8. 23. 09:00 하부내포성지 만수리 공소
지난 다섯 주간의 질문
그분을 따를 것인지 아닌지!
우리는 지난 7월말 ‘연중 제17주일’에 예수님께서 다섯 개 보리빵으로 5천명을 먹여주신 기적사화(요한 6, 1∼15)를 본 이후 오늘까지 5주간 동안 연속적으로 주일마다 요한복음서 6장의 예수님 말씀을 봉독합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우리의 행동적 응답을 드려야 할 그 결단의 시점에 이르렀음을 오늘 연중 제21주일에 이 요한복음서 6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깨닫고 있습니다.
이 요한복음서 6장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전체를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면, “내가 곧 생명 자체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내용을 깨닫기 위해서는 연속적으로 읽어온 요한복음서 6장 전체의 말씀을 반복해서 읽어야한다고 제가 강조해왔는데, 그렇게 하였다면 오늘의 이 마지막 장면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메시지를 깨닫고 예수님을 계속 따를 것인가 아닌가의 질문에 명백한 신앙고백으로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이 요한복음서 6장 마지막 60∼71절에 이 6장 전체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숨어 있습니다. 그 열쇠는 62절입니다. “내가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하고 제자들에게 반문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전에 계시던 곳으로 올라가시게 되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분은 “하늘에서 내려온”(요한 6, 41)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본래 계시던 하늘로 올라가실 것입니다. 그 올라가시는 길은 십자가를 통하여 부활에 이르시는 길입니다. 하늘로부터 그분이 내려오셨다는 것은, 즉 그분의 죽으심과 묻히심을 뜻합니다. 그렇게 내려오신 분이 올라가시는 일을 그분의 십자가를 통한 고양(高揚)과 무덤에서부터 일으켜지심(復活)으로써 드러내시는 그분의 영광이라 합니다.
그렇듯이 그분은 내려오신 분이시기에 또한 올라가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요한 6, 41)하고 말씀하셨고, “전에 있던 곳으로(즉, 하늘로) 올라가는”(요한 6, 62) 분이라고 당신 자신을 일컬으십니다. 이 말씀은 그분이 누구이신가를 밝혀주는 그리스도론(Christology)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즉 이 요한복음서 6장에 수록된 일련의 말씀으로써 그리스도란 하늘의 생명으로 우리에게 내려온 분이라는 것이 계시됩니다.
그분이 이렇게 생명으로 우리에게까지 낮게 내려오셨으므로 죽음의 세력 하에 있는 우리를 살리시고자 생명을 우리에게 넣어주신다는 표현으로 당신 자신을 “빵”, 즉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요한 6, 51)이라고 일컬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신 자신의 생명을 얻게 하시려고 주시는 그 빵은 곧 당신의 살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 6, 51 참조). 이 말씀은 곧 “예수님이 누구냐?” 하는 물음에 대하여 “그분은 생명이시다.” 라는 대답을 하라는 요청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러면 예수님이 생명이라는 물증을 대라.”는 세상 사람들의 요청에 대하여 “그분은 당신 생명인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양식과 음료로 주셨다.” 라고 우리가 대답할 수 있도록 이 요한복음서 6장은 서술되고 있습니다.
이런 요한복음서 6장의 관점 하에서 말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실제적으로 고백함으로써 동시에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의 것으로 얻어 누리게 됩니다. 이러한 내용을 전해주는 이 요한복음서 6장은 그래서 한 마디로 “예수는 우리의 생명”이라는 신앙을 정립해주고 있습니다. 이 우리의 신앙을 오늘 이 요한복음서 6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시몬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고백해주고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 68∼69).
그렇습니다. 여기서 시몬 베드로의 고백 중에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고 한 말이 곧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까닭은, 빵을 배불리 먹고자 해서가 아니라, 즉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 받은 권능으로 그분이 우리를 영원히 살 수 있도록 주시는 그 없어지지 않을 양식(요한 6, 26∼27 참조)을 얻으려 하는 때문입니다. 그 양식은 곧 그분의 ‘말씀’이고 그분의 ‘살과 피’입니다.
이러한 그분의 말씀과 살과 피는 없어지지 않는 것이므로 영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요한 6, 63)
그러한 영(靈), 즉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우리는 미사 때마다 얻고 있습니다. 미사 중에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가 그분의 영적 생명에 우리를 참여시켜주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베풀고 헐벗은 사람에게 입을 것을 주고 아픈 사람을 낫게 해주는 이른바 구제 사업적 사회복지활동이 우리 교회가 세상을 위하여 할 가장 중요한 사명인양 착각하는 수가 있습니다만, 그런 착각은 우리가 5주간 전에 읽었던 이 요한복음서 6장 서두의 ‘빵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예수님께 고작 배불리 먹을 빵만을 기대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실상 교회의 사회복지활동이란 세상에서 절망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올 동기(motive)를 얻게 하는 것일 뿐이고, 예수님께서 당신의 영적 생명을 하늘로부터 이 세상에 가지고 내려오신 것처럼 또한 이 세상에 썩어 없어질 물질에 매여 죽게 될 인간에게 없어지지 않을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는 것이 교회의 참된 사명인 것입니다.
개신교 일각에서 대형교회의 담임목사들이 자기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하는 바에 대하여 세간에서는 호된 비판을 합니다. 교회가 물신주의(物神主義)에 빠져있다고 비판합니다. 그 교회 지도층의 물신주의는 교회 자체를 사유물화(私有物化)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교회 건축물은 초대형화-초호화화 하고 이에 맞춰 신자들에게 헌금을 강요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정작 구령(救靈 영혼구원) 보다는 현세의 물질적 번영을 구가한다는 것입니다. 신자 수 늘리기, 교회 크게 짓기, 타종교에 대한 우월감 고양 등의 교세 불리기가 교회의 목표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비판은 개신교의 퇴폐상에만 해당된 것이 아닙니다. 작년에 한국을 방문하여 “교회는 가난해야 한다.”고 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간곡한 당부를 도무지 귀에 담지 않은 듯한 우리 가톨릭의 모습을 지적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영혼구원에 목표를 둔 복음의 핵심은 물질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라는 예수님의 오늘의 말씀 속에 이미 들어있습니다. 다음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요한 6, 63)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베풀고자 하시는 것이란 우리 영혼의 구원과 진리 즉, 인생의 근원을 되찾으라는 깨우침의 촉구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면서 우리 교회에 모여옵니다. 썩어 없어질 세상의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세상의 것을 기대했다가 신통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냉담하여 떠나간 사람들과는 달리 우리는 베드로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지니신 주님 말고 우리가 누구를 찾아가겠는가?”하고 말입니다(요한 6, 68 참조).
저는 본당의 주임신부로 지내던 시절에 이른바 냉담 중인 교우들의 가정을 방문하는 일을 매우 중요한 과업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냉담 교우들을 찾아가는 가정방문은 마음에 가장 무거운 짐처럼 느꼈습니다. 냉담하신 교우들 각자는 아마도 말 못할 사연들을 지니고 있을진대, 그러한 사연을 잘 알지도 못하는 제가 정작 만나서 무슨 말부터 해야 하나? 그게 항상 고민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냉담 교우를 방문했다가 참으로 허허롭게 발길을 되돌린 일이 있습니다. 그분이 저에게 냉소적으로 말했습니다. “내 이름 아직도 천주교에 남아있나요? 지워버리세요. 예전엔 천주교 도움 좀 받은 일 있지만, 이제 도움 받을 일도 없고 다녀봐야 세상 살기 불편하기만 해요.”
그 냉담 교우는 천주교회가 운영하는 학교의 학생시절에 천주교회로부터 학비보조를 받았답니다. 그래서 학비보조를 받는 동안 열심한 신자 학생으로 지냈답니다. 그분은 그나마 말이라도 솔직히 쏟아내면서 회두를 거부했습니다. 그분의 그 솔직한 말은 저의 마음을 허탈하게 한 반면에 또 한편 방문성과를 얻었다는 야릇한 기분이 들게 하였습니다. 세속적 실리에 따라 천주교 신자 노릇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확인을 한 것이었지요. 그런 대답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 삶의 방식이 뚜렷하구나 하는 생각을 또한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분 따라 남는 시간 봐서 성당에 나오다가 내키지 않으면 안 나오거나, 또는 맘에 맞지 않는 사제나 신자 때문에 성당 다니기를 그만 두다가 그런 사제나 신자들이 보이지 않게 될 때에 가서나 성당에 나오겠다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나의 신앙’이라는 것을 세상살이와 같은 것이라고 보는가? ‘나의 신앙’이라는 것이 ‘하느님과의 관계’라는 걸 잊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오늘 제1독서의 다음과 같은 여호수아의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눈에 거슬리면, 누구를 섬길 것인지 선택하여라.”(여호 24, 15)
오늘 복음서에는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기로 하여 떠나갔다는 보도가 있습니다(요한 6, 66 참조).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다고 불평하던 사람들입니다(요한 6, 60 참조). 그들은 예수님을 한갓 요셉의 아들이자 자기 동네 사람으로 잘 알고 있다는 유다인들(요한 6, 42 참조)과 동조하여 떠나갔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을 하늘에서 내려온 분으로 믿을 수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이라 믿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믿는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러한 우리의 신앙이란, 세상에서 찾아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생명 자체이신 분과의 관계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기에 하늘로 올라가시는 분을 향하는 우리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신앙을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 68)
이러한 신앙을 고백할 것인가 아닌가? 요한복음 6장은 지난 다섯 주간의 묵상으로 우리에게 질문한 것입니다. “그분을 따를 것인지 아닌지?” 하고!
원문출처: 하부내포성지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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