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2주일

2015. 8. 30 09:00 하부내포성지 만수리 공소

 

가장 공평한 싸움

사람 마음 먹기 나름

 

 

지난 7월말 ‘연중 제17주일’ 이후 요한복음서 6장을 연속적으로 봉독하면서 5주간을 지나온 우리는 오늘 ‘연중 제22주일’부터 다시 마르코복음서로 돌아와 앞으로 11월말까지 이 마르코복음서를 따라 주일미사전례를 올리게 됩니다. 지난 ‘연중 제16주일’까지 마르코복음 6장을 봉독하고 요한복음서 6장을 5주간 동안 봉독한 후, 이렇게 오늘 연중 제22주일에 마르코복음서로 돌아와서 이 복음서의 7장을 읽게 됩니다.

 

오늘의 마르코복음서 7장의 내용은 유다교 전통을 맹목적으로 고집하는 사람들과 예수님 간의 논전에 이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율법의 참 정신을 깨우쳐주신 말씀을 그 핵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서에서 보면, 예수님께 시비를 걸어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유다교 율법의 번잡한 규정들에만 매달려 살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의 마음가짐이라는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그 가르침은 곧 오늘 복음말씀의 마지막 구절로 명쾌하게 요약됩니다. “악한 것들은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 23)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설명 중에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 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식사 전의 몸 씻는 율법준수 여부에 관한 시비를 가리려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판하였습니다만(마르 7, 1∼5 참조),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의 관습을 빙자하여 하느님께서 주신 천륜을 범하는 행태를 예리하게 지적하십니다. 그것은 이른바 ‘코르반’을 빙자한 반인륜적 행위였습니다. 그 ‘코르반’이라는 말을 외치면 부모 앞에서 해야 할 자녀의 도리를 저버려도 되는 그런 반인륜적 규정이 유다교의 율법에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코르반’이라는 말은 “하느님께 바칠 예물이다.”라는 뜻인데, 그렇게 말함으로써 즉 하느님을 빙자하여 부모에 대한 도리를 외면해도 된다는 율법조항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식이 부모봉양을 저버리는 불성실을 합법화해주는 율법조항이었습니다. 그러한 반인륜적 관습추종을 타파하고 마음을 참되게 다스림에서 인간상을 회복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법의 근본정신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십니다(오늘의 복음봉독에서 생략된 마르 7, 9∼13 참조).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참된 인간상 회복은 맹목적 관습추종에서가 아니라 오늘 당신이 지적하신 바와 같이 사람 마음속의 사악과 그로써 저질러지는 갖은 악행을 떨쳐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요는 사람 맘먹기 나름으로 사람을 이롭게 혹은 해롭게 한다는 지적을 하신 것입니다.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먼저 해로운 것이 아니라, 사람의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 밖을 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을 오늘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열거하십니다.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입니다(마르 7, 21∼22).

 

예수님께서 열거하신 이 모든 것은 글자 그대로 악덕(惡德)인 것입니다. 악덕이란 몸에 배어 습관적으로 저질러 스스로 추한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 스스로를 추하게 만드는 악덕들은 그게 모두 다른 사람이 시켜서 그리 되게 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듯, 이 모든 악덕은 사람의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원죄 이후 죄에 기울어지는 연약성을 지닌 우리 인간입니다. 죄란, 가르침을 받아서 배우는 것이라기보다는, 스스로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저지르기를 스스럼없이 하다보면 ‘악덕’이 됩니다. 그 악덕은 더욱 나아가 인간 끼리 범죄의 세상을 만듭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사이에 악행을 일상화하기에 이릅니다. 그러한 사람들 사이의 가중되는 죄악의 현상을 일컬어 ‘세상의 죄’라 합니다.

 

그러한 ‘세상의 죄’를 피하기 위해서 고대의 교부들은 사막으로 피신하여 은수생활(隱修生活)을 하였습니다. 그러한 은수생활을 규범화하여 수도원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렇듯 사막에서의 은수생활은 세상과의 접촉에서 얻는 죄악을 단절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만, 그러한 사막에서 홀로 지내는 중에 죄악과의 싸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홀로 지내면서 하느님과의 관계만을 추구하는 ‘은수’ 중에 자기 자신과의 또 다른 싸움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홀로 살면서 자기 자신과 벌이는 싸움! 그것은 사실상 죄악의 근본과의 싸움인 것입니다. 죄의 근본과의 싸움은 인간으로서 일생 동안 계속 될 것입니다. 40년 동안 사막에서 지낸 스케테의 이시도로(Isidore)라는 한 은수자도 실토했습니다. “40년 동안 마음속으로 죄에 이끌리는 자신을 느끼곤 했다. 육욕과 분노에 동의하는 마음이 불쑥 들곤 한다.” 이렇듯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사막에서 수십 년을 지낸 아르센(Arsene)이라는 은수자는 자기 독방에 썩은 물을 갖다 놓고 지냈습니다. 썩은 물의 악취를 맡으면서 자기 자신의 내면에 죄악의 근본이 있음을 늘 상기한곤 했습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서 찾아온 사람이 향기로운 과일을 선물했을 때 아르센 은수자는 그 과일 조각 한 첨을 깨물어본 다음에 그걸 뱉어버렸습니다. 그리하고 나서 그 과일의 향기를 참아내는 것으로 자신과의 싸움을 더욱 강고히 하였답니다. 아가톤(Agathon)이라는 은수자는 3년 동안 조약돌을 입 안에 물고 있었답니다. 그리한 다음에 그는 침묵을 지킬 수 있었답니다. 그분은 말하고 싶은 욕망을 제어하기 위해서 그리함으로써 하느님과의 대화를 하는 진정 마음의 평화를 얻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란 누구나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지 않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함으로써 죄악의 근본에 휘둘리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살이에 힘겨워 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느님을 원망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다면서, 어찌하여 나쁜 일 하는 사람들이 선량한 사람들보다 성공하고 살도록 하느님께서 내버려 두시는지 모르겠다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제시하신 공평한 싸움에 시달리는 존재입니다. 그 공평한 싸움이란,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부자에게나 가난한 사람에게나, 잘난 사람에게나 못난 사람에게나 ‘자기 자신과의 싸움’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싸움입니다. 이 공평한 싸움에서 가장 힘겹게 싸우는 사람은 아마 교만한 사람일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많은 악덕들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추악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정치인이든 기업인이든 또는 평범한 시민이든 누구나 그러한 패배가 세상에 드러났을 때 그로 말미암아 감옥에 가면서 인간이 그 얼마나 추악할 수 있는지 세상 사람들을 경악하게 합니다.

 

그렇듯이 자기 자신과의 공평한 싸움에서 크게 패배한 인생이라면 그게 얼마나 추악한 삶인지 우리는 종종 성공한 유명인들의 감옥행 뉴스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며 사는 사람들이라 해서 훌륭한 게 아니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살아야 성공하는 인생인 것입니다. 세상의 잣대로 평가하여 아무리 성공한다 하더라도 자신과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사람이라면 종래에는 추악한 인생의 결말을 보이게 됩니다.

 

인간들이 저지르는 죄악의 추악성은 인간들이 스스로 자신을 죽이는 사슬을 자신 속에서 꺼내어 칭칭 감고 죽어가는 꼴인 것입니다. 여기서 참다운 인간의 해방, 그것을 마음속에서부터 찾아야 한다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선언하십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그러한 자기 굴레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구세주로서의 당신 권능을 어떻게 보여 주시는지, 다음주일에 오늘의 말씀에 이어지는 마르코복음서 7장의 31∼37절에서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원문출처: 하부내포성지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70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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