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3주일
2015. 9. 6. 09:00 하부내포성지 만수리 공소
모르쇠란 누군가?
모르쇠, 우리의 모습 아닌가?
유다교의 율법관습에 관한 논전에서 제자들에게 율법의 참 정신을 깨우쳐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지난주일 마르코복음서 7장 1∼23절에서 읽었습니다. 그 말씀 속에서 우리가 결론적으로 얻은 생각을 오늘 우선 회상해봅시다. 참된 인간상 회복은 맹목적 관습추종을 하지 말고 사람 마음속의 사악과 그로써 저질러지는 갖은 악행을 떨쳐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악한 것들은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 23)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함축된 결론입니다.
여기서 우리 한번 좀 이상한 생각을 해봅시다. 이 우주 안에 존재하는 것들 중에서 자기 자신을 해치는 존재들이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시다. 아마 자기 자신을 해치는 존재란 있을 수 없겠지요. 그러나 인간이 그런 존재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살했다는 말은 있어도, 무슨 동물이나 식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리고 같은 동물 끼리 서로 계획적으로 죽이거나 골탕을 먹이는 못된 짓을 하는 것을 볼 수는 없어도, 사람은 같은 인간 끼리 그런 짓을 합니다. 전쟁으로 서로 죽이는 역사는 동물의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인류의 역사일 뿐이기에 영국의 17세기 철학자 홉스(Thomas Hobbes)는 ‘만인 대 만인투쟁’(萬人對萬人鬪爭 War with one another)이 인간 상황이라면서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다(Homo homini lupus)”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 짓을 하는 것은 꼭 국가 끼리 전쟁을 해서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사먹고 병들거나 말거나 나만 수억대 돈 벌면 그만 이라는 심보로 불량식품을 제조 판매하는 사람들에 대한 더러운 뉴스를 가끔 듣습니다. 보험금을 노리고 가족을 죽였다는 끔찍한 뉴스도 가끔 듣습니다. 이런 짓이란 짐승들이 저지른 것이 아니고 우리 인간들 사이에 빚어지고 있는 늑대의 짓입니다. 그야말로 인간이 인간의 원수입니다. 사람을 해롭게 하는 존재는 사람인 것입니다.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의 실상이지요.
그렇듯이 인간의 현실적 불행은 인간 자신이 조성합니다. 그러한 인간들 사이의 불행이란 곧 인간들 자신에게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인간이 참으로 무서운 존재라는 비관에 빠지게 됩니다. 인간이 망할 터무니는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참 인간상을 허물어뜨리는 짓을 인간 자신이 하고 있다는 비극을 우리는 늘 우리 자신과 주변에서 체험합니다.
그러한 우리의 현실에서 참 인간상을 되찾는 일이 구원입니다. 그 참 인간상 회복, 즉 구원을 이루어주시는 분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서(마르 7, 31∼37)의 내용입니다. 귀먹고 말을 더듬는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기적의 뜻이 그것입니다.
인간을 해치는 모든 해악의 근원이 인간 자신 속에 있다는 것을 지난주일의 복음 내용에서 우리가 보았듯이, 오늘 우리가 보는 일그러진 인간이라 할 그 ‘귀먹은 말더듬이’의 그 불행이 인간 자신의 죄악으로부터 왔음을 깨달아야 오늘 복음서의 기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귀먹어 말을 더듬는 사람’이란 귀로 들을 줄 모르기 때문에 엉터리 말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지요. 들은 말과는 달리 엉뚱한 말을 옮기는 사람, 다른 사람의 말은 들을 줄 모르고 자기주장만 하는 사람, 아예 다른 사람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만 하는 사람, 아쉬울 때와 그렇지 않을 때 태도를 달리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일컬어 ‘모르쇠’라 하지요.
그런 모르쇠는 과연 누구일까요? 그리고 그 모르쇠들은 마음속에 무엇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런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이란, 타인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살자는 싸움의 발단뿐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아무리 좋은 말도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영어에서는 곧 ‘귀머거리(deaf)’라 합니다. 영어의 표현을 빌려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도대체 아무 말도 듣지 않을 때 “He is deaf to all advice.”라고 말합니다. ‘모든 충고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말을 해봐야 소용없는 그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공직자들과 기업인들 사이의 뇌물 수수 사건에 관한 뉴스를 너무 자주 접하게 됩니다. 지난봄에 시끄러웠던 성완종 사건은 최근의 대표적인 추잡한 뉴스였지요. 그에 대해서 사법당국의 조사나 국회의 시끄러운 뉴스는 잊을 만하면 국민들의 귀에 익숙하게 다시 들리는 소식들입니다. 그 보도가 우리에게 익숙하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서로 간에 검은 거래를 했음이 빤한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그 당사자들이 조사나 질문에 대하여 엉뚱한 말로 응수하거나 또는 모른다고 잡아떼고 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일컬어 ‘모르쇠’라고 하지요. 그리고 결국은 흐지부지 덮어버리고 마는 사법당국도 ‘모르쇠’ 노릇을 합니다. 그에 걸맞게 정치권도 국민들 앞에 책임 짓지 않는 또 다른 ‘모르쇠’ 노릇을 하여 모두가 얼굴에 철판을 깔고 행세하는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8월 하순에 남북 고위급 접촉 합의문을 놓고서도 그 남북 당국과 보도매체들이 서로 다른 해석을 하며 우겨대는 모르쇠 습성을 관망해왔습니다. 한 짓이 빤한데도 하지 않았다면서 딴소리 하고, ‘유감’이라는 우리 한국어 단어도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남북한 사이의 모르쇠 경쟁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모르쇠들에게 있어서 합리적 충고나 정의로움이란 무용지물입니다. 그래서 그 모르쇠들이 하는 말이란 자연히 엉터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들려오는 말에 대하여 귀를 막고 자기 생각대로만 처신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사회의 올바른 질서가 흐트러지고 범법행위를 조사해봤자 아무런 소득 없이 국력만 낭비되고, 남북한 국민들 또한 이런 세상의 늑대들이 흉측하게 짖어대는 울부짖음 소리에 소름끼치며 사는 나라가 되고 있습니다.
국가공권력이나 법률에 따라 다스려지지 않는 그런 모르쇠들, 또는 남북 사이의 국민을 속이고 있는 모르쇠들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서 인간관계가 어려운 경우를 우리는 일상적으로 당합니다. 자기는 교통신호를 어겨가면서 다른 사람들을 탓하는 사람들, 서로 지켜야 할 공중질서를 무시하면서 자신의 편리함만이 먼저인 그런 사람들의 모습은 사실상 우리 자신에게서 발견됩니다. 함께 살아가면서 그런 모르쇠 노릇을 하는 사람들은 타인에게 폐해를 끼치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자기의 그러한 비겁한 처신에 대한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그러한 모습을 우리 자신에게서 발견하면서 문득 우리는 나 자신이 모르쇠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해야 합니다.
그러한 우리 자신의 추한 모습 즉 우리 자신의 병든 인간상을 고쳐주시는 분을 오늘 복음서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귀먹어 말을 더듬는 사람을 고쳐주셨다는 오늘 복음서의 보도대로, 그러한 우리를 바로잡아 주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만나서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그렇듯이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나게 된 사람들입니다. 즉 세례로 새로운 인간이 된 우리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잘못된 인간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참 인간상을 회복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참 인간상을 회복한 사람들이어야 서로를 알아들으면서 함께 살아갈 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함께 살 수 있는 인간들로 우리를 변화시키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예수님의 일이 곧 인간구원입니다. 그렇듯, 인간자신들의 탓으로 스스로를 불행하게 하는 그 잘못된 인간을 치유하여 주시는 권능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오늘의 복음서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난주일의 복음에서 보았듯이 예수님의 말씀과 하시는 일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맹목적 습관에 따라 자신들의 불행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유다인들)을 떠나 ‘다른 곳’(이방인들의 티로 지방 : 마르 7, 24 이하 참고)으로 가셔서 인간 불행의 악(惡靈)으로부터 해방을 갈구하는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셨다는 보도를 지난주일 복음 내용 다음의 내용(마르 7, 24∼30)으로 우리는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오늘의 ‘귀먹은 말더듬이의 치유기적사화’(마르 7, 24∼30)를 보게 되는데, 이 기적사화는 자기 굴레를 벗어버리지 못하는 인간이 구세주를 만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런 구세주를 알아 뵈올 줄 아는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합니다. 그렇듯이 그분을 구세주로 알아 뵙는 베드로의 신앙고백(마르 8, 27∼35 중 29절)을 다음주일에 보게 될 것입니다. 그 고백은 곧 우리의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의 참 인간상을 회복한 그리스도인, 즉 세례 받은 사람들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렇듯 우리가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악의 뿌리를 우리 자신 안에서부터 떨쳐내고 새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감사할 수 있다면,다음주일에 보게 될 베드로처럼 주님 대전에 신앙을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문출처: 하부내포성지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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