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0주일

2015. 8. 16. 09:00 하부내포성지 만수리 공소

 

살(肉), 그것은 사람이야!

살과 피, 그것이 사람이지 !

 

 

요한복음서 6장에서 예수님께서 보리빵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여주신 기적사화(요한 6, 1∼15)를 보았던 연중 제17주일 이후 우리는 한 달이 넘게 그 요한복음서 6장을 다음주일인 연중 제21주일까지 연속적으로 읽습니다. 5천명을 먹여주신 그 기적사화에 이어서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는 요한복음서 6장 전체의 맥락 속에서 알아들어야 합니다. 요한복음서 6장 전체의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곧 생명 자체’라는 주제의 내용입니다. 그 내용 가운데 오늘의 말씀(요한 6, 51∼58) 이 그 절정을 이룹니다. 그리고 다음주일에 읽을 이 요한복음서 6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떠나간 사람들과는 달리 우리가 내려야 할 결단이 요구됩니다.

 

5천명을 배불리 먹여주신 예수님을 왕으로 삼아 광야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군중이(요한 6, 14∼15 참조) 예수님을 찾지 못하고 가파르나움이라는 일상의 현실에 돌아와(요한 6, 24∼25 참조) 거기서 만난 그분에게 실망스런 말투로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요한 6, 25) 하고 물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고생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어줄 것 같더니 왜 이 고통의 현실로 돌아왔느냐는 항의성 질문이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는 잘 기억해야 합니다.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그 양식을 내가 하느님 아버지께 받은 권능으로 너희에게 주겠노라(요한 6, 26∼27). 내가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그 생명의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요한 6, 33∼35 및 50∼51 참조).

 

이 말씀은 곧, ‘너희가 이 세상에서 찾는 물질적 양식을 나에게서 기대하지 말고, 나 자신을 너희 생명의 원천으로 삼아라. 나 자신이 곧 너희를 영원히 살 수 있도록 하늘이 내려준 양식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유다인들이 보인 실망스런 반응과 반발을 우리는 지지난 주일에 이어서 지난주일과 오늘까지도 보고 있습니다(요한 6, 30. 41∼42. 52 참조).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한층 더 자극적인 표현으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요한 6, 54)

 

이 말씀을 듣고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까? 이 말씀을 듣고 유다인들이 반발한 것과 같이(요한 6, 52 참조),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도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도대체 들을 수가 없군!”(요한 6, 60 참조) 하고 반발하면서 결국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갑니다(요한 6, 66 참조).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요한 6, 52)하며 황당해하는 유다인들의 이 말은 “우리를 식인종 취급하는 게 아니냐?”하는 반발인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은 심히 자극적입니다. 당신의 살을 빵처럼 먹어라 하시더니 더 험악하게도 당신 피를 음료로 마시라고 하시니, 도대체 이 말씀을 사람의 귀로 들으라는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요.

 

그분의 살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그분의 피는 무엇입니까?

 

당신의 살, 그것은 당신의 피가 흐르는 살입니다. 피가 흐르는 살,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의 살을 말합니다. 그 살 속에 흐르는 피, 그것은 생명을 말합니다. 그래서 피가 흐르는 살은 사람의 따뜻한 피부를 뜻합니다. 그러한 살을 지니지 않은 존재는 인간이 아니지요.

 

살과 피! 그게 사람입니다! 피 흐르는 살, 그것이 사람입니다!

 

살과 피, 그것은 인간의 인간다운 적나라한 실존을 뜻합니다. 살갗을 맞대면서 인간은 사랑의 확신을 합니다. 살과 피! 그게 사람입니다! 엄마의 젖가슴에 안긴 아기가 그렇고, 부부 사이가 그렇게 살갗을 맞대어 사람입니다. 부부가 된다는 결정적인 혼인관계는 살과 살을 섞는 일로 결정되기에 일컬어 신혼부부의 첫날밤의 잠자리가 그 사실증명이 됩니다. 그래서 살을 섞어야 부부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살에 흐르는 피를 나눈 사이를 일컬어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 즉 ‘부부’라 합니다. 그리고 ‘부모자식간’과 ‘형제지간’이라는 말도 혈육지간(血肉之間)을 뜻하기에 그것을 천륜(天倫)이라 말합니다. 인간으로서 뗄 수 없는 사이를 일컫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남북한 이산가족 교환 방문의 뉴스를 보게 될 때 그 혈육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절실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반세기도 넘게 만날 수 없던 혈육이 만나 부둥켜안고 울부짖으며 흘리는 눈물은 그 살과 피의 절규입니다. 그 혈육간의 눈물이란 온도계로 측정할 수 없는 가장 뜨거운 온도일 것입니다.

 

남북이산가족 사이에 행방불명된 소년기 이후 수십 년 후에 만나게 된 얼굴을 어루만지는 가족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어느 누구든 사람이라면 혈육간의 감격과 더불어 지난 수십 년도 지난 세월의 잔혹성에 대한 전율로 온 몸을 떨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대체 우리의 지난 수십 년이 이렇게 잔혹한 세월일 수 있단 말인가! 도무지 무슨 이유로 이럴 수 있었단 말인가! 누가 그 잔혹한 세월을 그렇게 지내라고 했는가? 도대체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세월이었나? 인간이 사는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도무지 상상하기 조차 불가능한 일이 꿈도 아닌 현실에서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생각으로 이산가족들의 상봉을 바라본다는 것은 도무지 현실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짧은 2∼3일간, 그것도 서너 번 제한된 장소에서 만났다가 다시 기약 없는 이별로 남쪽으로 북쪽으로 헤어지는 그 혈육이란 생살이 찢어지는 참혹의 연극입니다.

 

수십 년 만날 수조차 없던 세월을 하루이틀 잠깐 만났다가 기약 없는 생이별을 해야 하는 그 현실 그것은 곧 살아 있는 목숨을 도려내는 야만입니다. 늙고 병든 부모를 어느 누군가로부터 허락을 얻어서 겨우 잠깐 만난다는 그런 연극은 더욱 인간의 살과 피를 도륙하는 짓이라 느껴집니다. 저는 그래서 차라리 그런 이산가족 상봉의 이벤트를 기획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제 광복 70주년 기념식의 세종문화관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북한을 향한 연설메시지를 들으면서 인간을 모르는 ‘잔인한 제한’ 그리고 인간을 가지고 ‘정치적 장난’으로 잔인하게 던진 발언으로 느꼈습니다. 부모형제간에 함께 살기를 거부당하면서 제한 된 장소에서 제한된 시간에 만나고 기약 없이 헤어지는 일을 몇 만 명 명단교환하자는 식으로 제안하는 그 메시지란 그야말로 ‘비인간적 발언’인 것입니다.

 

다른 예를 상상해봅니다. 군대에 입대한 아들을 찾아 훈련소에 가서 지정된 시간면회를 한다든가, 수도원에 입회한 가족을 특수한 시간에 만나보는 것처럼, 제도적 조건하에서 제한된 시간과 장소에서 상봉하는 것, 강요된 규정의 제한면회를 하는 그것은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을 제한된 시간에 면회소에서 만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러면서 생살 찢어지는 통곡으로 또다시 생이별의 반복을 받아들여야하는 비인간적 현실의 잔혹성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여, 우리의 인간다운 세상이란 아직도 구만리장천 너머에나 있을 듯싶습니다. 이렇듯이 한 순간 무대의 감격적 이벤트와 같은 이산가족상봉을 마치 백성들에게 던져주는 선물인양 정치지도자들 간의 결정에 의하여 주어진 것으로 착각해야 하는 분단현실은 곧, 우리 민족이 여전한 비인간성을 강요받고 있는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민족의 운명을 정치적으로 재단하여 생성된 비극이 70년이나 계속되고, 이러한 이벤트로 가족상봉을 선심 쓰기까지, 그리고 그 가족들의 만나는 자세와 조건까지 그 정치적 잣대로 규제하고, 그리고 또 이렇듯 서러운 민족의 앞날과 희망까지 그 정치적 무대의 연출자들에게 계속 맡겨야 한다는 이 현실은 이 민족의 잔혹한 비극이 엄존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북 이산가족상봉을 정치적 이슈로 삼는 뉴스를 접할 때면 우리 모두가 하나의 커다란 감옥생활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욱 혈육이, 자유롭게 만날 수 없다는 것, 만나더라도 제한조건에서 제한시간에 일정장소에서만 만나도록 허락을, 그것도 극소수의 제한된 사람들에게 통치권력에 의해서 찔끔찔끔 무슨 선심이나 쓰듯이, 정치적 흥정으로 전하는 그 메시지를 목이 타도록 기다려야하는 이 현실이 감옥생활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 감옥생활의 연극을 우리의 현실이라고 받아들이며 살아야 하는 민족의 이 지속적 체념의 역사는 우리의 삶에서 피도 눈물도 지워버리도록 강요당하며 멈춘 화석의 역사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났어도 함께 살지 못하고 생살 찢어 헤어져야한다는 강요의 이벤트를 목말라하는, 그리고 그 후의 재회도 기약할 수 없다고 하는 강요는, 우리를 마치 피 흐름이 멈춰버린 죽은 몸처럼 비극에 묻어버리라는 강요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어쩌면 혈육이더라도 혈육이기를 포기하라는 강요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혈육이 무엇입니까? 글자 그대로 ‘피를 함께하는 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한 피를 나눈 몸’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진정 ‘통일’ 아니겠습니까? 혈육이 헤어지지 않고 합치는 것이 통일입니다.

 

그러한 삶으로 돌아가는 날을 맞이하자고 염원하는 어제의 분단 70년 축제(?)를 맞이했던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영원한 삶을 얻으라 하신 말씀은 그래서 더욱 실감나게 들려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우리 사이에 당신의 살과 피로 하나를 이룸으로써 생명 자체이신 당신으로 우리가 영원히 살게 하시고자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십니다. 그분이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내려오신 생명 자체이시므로 우리는 살과 피를 그분과 함께하는 하나의 사이로써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남과 북의 체제가 그렇게 서럽고 오랜 세월 동안 우리를 갈라놓았다 하더라도 우리가 혈육임을 새삼 깨달았다면 그 혈육이 함께 살게 되는 날을 어서 만들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 영원한 생명 자체이시라는 깨달음을 얻은 우리라면 그분과 하나 되는 참 삶을, 즉 영원한 삶을, 얻기 위하여 그분의 살과 피를 음식으로 음료로 삼아 그분이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가 그분 안에 있게 되는 그분과의 하나 됨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살과 피를 지닌 존재입니다. 마음만 갖고 말만 전하며 사랑한다 할 수 없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살을 맞대고 피를 섞어 인간일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는 주님께서는 당신의 살을 주시고 피를 주셔서 우리를 살게 하는 분, 우리의 혈육이 되신 분입니다. 그렇습니다. 맞댈 수 있는 살과 뜨거운 피로 서로 어우러지는 끼리끼리라야 사람 사이이고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색적이며 자극적인 말씀으로 당신의 살을 먹고 당신의 피를 마시는 사이로 당신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시는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역설하시고 계십니다. 그렇듯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런 사랑 때문에 당신과 우리가 영원히 살아야겠다면서 “내 살과 피, 그것이 영원히 살게 하는 참된 양식이고 참된 음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민족통일! 그건 살과 피의 과제입니다! 사람 되자는 뜻입니다!

통일! 그건 살을 맞대자는 것! 그건 사람으로 돌아가자는 겁니다!



원문출처: 하부내포성지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68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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