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8주일
2015. 8. 2. 09:00 하부내포성지 만수리 공소
생명은 동냥그릇에 담는 게 아니다
다시는 배고프지 않으려면
지난주일부터 5주간 동안의 주일 복음으로 읽는 요한복음서 6장을 오늘 우리는 2주째 읽습니다. 요한복음서 6장은 우리가 지난주일에 읽기 시작하면서 보았듯이 빵 다섯 개로 오천 명도 더 되는 군중을 배불리 먹여주신 기적을 보여주신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일컬어 생명의 빵이라 하시는 말씀이 수록된 장(章)입니다.
지난주일에 읽은 내용(요한 6, 1∼15의 내용)을 상기해보면, 의무적으로 예루살렘에 순례하러 가야하는 명절인 과월절을 목전에 둔 유다인 남자 오천 명이 넘는 군중이 그 명절 지낼 생각을 제쳐두고 예수님을 찾아 몰려온 거기에서 빵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그 군중이 거기 몰려온 까닭은 먼저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요한 6, 2 참조). 그런데 그 군중은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로 배불리 먹고도 남는 기적을 보여주시자 예수님을 왕으로 모실 생각까지 하면서(요한 6, 14∼15 참조) 예수님을 계속 찾아 나섭니다(요한 6, 22∼25 참조).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는 내용의 예수님과 그 사람들 사이의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그 내용을 알아듣기 용이하도록 제가 각색하여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그렇게 끈질기게 찾아온 군중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아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이 양식은 내가 너희에게 주려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 권능을 나에게 주셨다.”(요한 6, 27)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그 군중은 반문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라는 말씀입니까?”(요한 6, 28 참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나를 믿어라.”(요한 6, 8∼29 참조)
그러자 그 사람들은 다시 예수님께 질문 겸 항의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당신을 믿을 수 있는 기적을 보여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전에 우리 조상들이 광야에서 모세 덕분에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었던 그런 기적을 보여야 당신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우리가 믿을 것 아니겠습니까?”(요한 6, 30∼31 참조)
그 군중의 이러한 항의성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십니다. “하늘의 음식을 모세 덕분에 얻었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서 내려주시는 빵을 얻었음을 생각하여라.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생명을 주는 빵을 내려주신다.”(요한 6, 32∼33 참조)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부르짖습니다. “그 빵을 항상 저희에게 주십시오.”(요한 6, 34)
그 때 예수님께서는 단언하여 대답하십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 35)
그렇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는 말씀의 핵심은 단적으로 예수님 당신 자신이 곧 빵이라는 것입니다. 그 빵은 생명을 주는 빵이라는 것입니다. 그 빵은 결코 배고프지 않게 하는 음식입니다. 예수님이 그러한 빵이라는 것을 믿으면 결코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라고 예수님 당신 스스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병을 고쳐주시기 때문에 그분을 쫓아왔던 사람들이 이제는 배부르게 먹을 수가 있어서 더욱 그분을 왕으로까지 모시려는 마음으로 쫓아와서 영영 배고프지 않도록 음식을 달라고 졸라대는데,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일컬어 영원히 배고프지 않게 하는 빵이라 하시면서 그걸 믿으면 목마르지도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읽으면서 저는 문득 중동 지방의 우화 한 가지가 생각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모아 책으로 발간하는 것을 전문으로 하다시피 하는 박상준 씨가 낸 <동냥그릇>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런 제목을 붙여 발간한 그 책에는 부담 없이 읽으면서 지혜를 터득할 수 있는 중동 지방의 간단간단한 우화가 150여 편 들어있는데, 그 우화들 가운데 <동냥그릇>이라는 우화가 눈에 띄게 앞자리에 나오면서 그 책 자체의 제목으로 달아놓고 있습니다. 그 <동냥그릇>이라는 우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임금님이 산책하러 나갔다가 거지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임금으로서 불쌍한 백성을 만난 심정에 왕은 거지에게 소원을 물었습니다. “그대가 원하는 것이면 뭐든지 다 들어주겠다.”하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 거지는 “아, 그렇습니까? 저는 그저 한 가지 소원뿐입니다. 임금님께서 저의 이 동냥그릇에 무엇이든지 채워주기만 하여 주십시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야 어렵지 않지.”하고 선뜻 대답한 임금님은 신하에게 “이 동냥그릇에 돈을 가득 담아 줘라.”하고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신하가 즉시 돈을 가져다가 그 동냥그릇에 가득 담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릇에 담았던 돈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신하가 다시 돈을 가져다가 그 동냥그릇에 가득 담았지만 또 즉시 흔적도 없이 돈은 몽땅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자꾸만 돈을 갖다 부어도 거지의 동냥그릇은 즉각 텅텅 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왕궁에서는 난리가 일어나고 그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와서 구경하는 것이었습니다. 임금님의 위신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다급해진 임금님은 “내 재산을 모두 잃어도 좋으니 왕궁의 보물 창고를 열어서 저 그릇에 담아라.”하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그 거지의 동냥그릇은 임금님의 모든 보물을 계속 담고서도 텅텅 비는 것이었습니다.
임금님의 모든 재산이 없어지고 이윽고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임금님이 그 거지에게 물었습니다. “이 동냥그릇을 무엇으로 만들었느냐?”
그러자 거지가 대답하였습니다. “이 동냥그릇을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임금님께서 정녕 모르시겠사옵니까? 이 그릇은 사람의 마음이랍니다. 그러니 여기에는 모든 욕망이 들어가도 항상 더 들어가게 비워지곤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우화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인간 스스로 채울 수가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간 수천 명 군중은 처음에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시는 걸 보고 그분을 쫓아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보인 굶주린 모습은 먹을 것을 요구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먹고 남을 만큼의 음식을 주셨습니다. 빵의 기적이었지요. 그런데 그 군중은 그 예수님을 자기들의 모든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왕으로 모시고자 했습니다. 정치적 욕망을 보인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의 정치적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서 당신의 능력을 들어내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로 인간들을 행복하게 하시려고 오신 분입니다. 해서 예수님께서는 그런 정치적 즉 현세적 인기에 편승하시지 않고 홀로 하느님 아버지와의 시간 곧 기도를 하실 장소로 당신의 몸을 피하셨습니다(요한 6, 15 참조). 하지만 인간들은 그분 계시는 곳을 찾아 계속 집요한 현실적 욕구를 디밀고 있습니다(요한 6, 22∼25 참조).
그러한 인간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즉, 현세적 욕망을 채우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그러한 양식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으로써 하늘에서 내려주는 생명의 빵이다. 내가 바로 하늘에서 내려오는(즉, 천상적 생명으로 내려오는) 그 ‘생명의 빵’이다.”(요한 6, 27. 33. 35 참조)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썩어 없어질 것들로 채우려 할 것이 아니라 결코 배고프지 않고 결코 목마르지 않을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채워서 영원히 살게 하는 생명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동냥그릇처럼 쓸모없는 욕망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우리의 마음은 물질이나 현세의 능력에서가 아니라 작은 믿음으로써라도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깨닫는 믿음으로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일에 우리가 읽은 빵의 기적 사화에서 어느 어린이가 지니고 있던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개처럼, 우리 역시 현실적으로 보잘것없는 능력 밖에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에 의존한 삶이 아니라 예수님께 의존한 삶을 살고자 하는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신앙으로 얻는 생명은 현실적 욕망의 동냥그릇에 얻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껏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첫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안드레아는 그 어린이가 지참했던 보잘것없는 도시락에 대해서 비아냥거리는 투로 나서서 “이 꼬마 녀석이 꼬불쳐 쥐고 있는 도시락 밖에는 여기 누구 한 사람 가지고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수다. 이걸로 어찌 이 많은 사람들을 먹여줄 수 있겠습니까? 난 모르겠으니 당신이 알아서 하슈!” 하고 지극히 비신앙적인 말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비현실적 상황에서, 즉 그 어린이가 기꺼이 내놓는 작은 정성을 씨앗으로 하여, 오천 명 이상이나 실컷 먹여주시는 엄청난 빵의 기적을 행사하셨습니다. 사람들의 현실주의를 뛰어넘어 영원한 삶을 보장해주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어린이와 같은 작은 인간의 능력에 예수님은 엄청난 영원의 생명을 넣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세의 욕망을 담는 거지의 동냥그릇처럼 우리 마음을 지닐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나 안에 모셔 사시게 하는 작은 믿음으로 우리의 삶을 바꾸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앞에 예를 든 ‘거지의 동냥그릇’이란, 현세적 욕망은 그렇듯 비굴한 현세적 욕망의 마음을 뜻합니다. 그리하여 현세적 욕망으로 자꾸만 다시 배고파하는 거지와 같은 삶이 아니라, 다시는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는 삶으로 나아가는 영원의 생명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영원의 삶으로 기꺼이 나아간 신앙적 삶을 박해시기의 우리 신앙 선조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또한 그러한 신앙의 삶을 지금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영원한 생명은 현세적 동냥그릇에 담는 게 아닙니다!
원문출처: 하부내포성지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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