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6주일

2015. 7. 19. 09:00 하부내포성지 만수리 공소

 

휴가란 나 자신을 찾아 나선 외딸음의 체험

그 외딸음의 체험이 성지에서 가능하길

 


무더운 여름의 한 가운데

 

우리는 지금 무더운 여름의 한 가운데에 와있습니다. 이번 주간 목요일(7월23일)은 대서(大暑)이자 중복(中伏)이 됩니다. 이제 학생들의 방학과 직장인들의 휴가철이 시작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마르코복음서 6장 30∼34절에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도 함께 휴가를 하러 떠나시는 이야기가 보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바쁘신 복음전파 활동 중에 제자들에게 조용한 곳으로 쉬러가라며 휴가를 주시고 당신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외딴곳으로 피해가셨습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가서 함께 좀 쉬어라


오늘의 이 복음서 내용에는 예수님께서 쉬러 가신 때가 어느 계절이었는지 언급이 없습니다만,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났다는 보도(마르 6, 32 참조)에서 우리들이 이 여름에 흔히 물가나 산속으로 피서 휴가차 떠나는 것과 흡사한 휴식을 취하시러 예수님께서도 바쁜 일정을 잠시 접어두시고 떠나셨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삶을 리듬 있게 사셨던 것 같습니다. 열심히 일하시고 그리고 적절한 휴식을 또한 취하시는 분이셨던 것 같습니다. 그럼으로써 함께 일하는 제자들도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배려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또한 엿보이기도 합니다. 찾아오는 사람들에 치어서 편히 식사할 시간조차 없던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었습니다(마르 6, 31 참조).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함께 좀 쉬어라.”(마르 6, 31)하고 말입니다.

 

맨 몸으로 복음을 전파하라는 예수님의 명령 


예수님의 이러한 휴가 이야기를 보도하는 마르코복음서의 6장은 그 전체가 예수님의 바쁜 복음전파 활동에 관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지난 연중 제14주일과 제15주일에 읽었던 마르코복음서 6장 1∼13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에 가셔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다가 그 고향사람들로부터 냉대를 받으시고 다른 인근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시고 여러 많은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도록 열두 제자들을 파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서 맨몸으로 복음전파의 고된 활동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이 그 결과를 예수님께 낱낱이 보고하는데, 그렇게 동분서주하신 복음전파활동의 성공적 결과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식사하실 겨를조차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따로 한적한 곳에 쉬러 가셨는데, 거기 또한 복음을 갈구하는 백성이 몰려오고 있음을 오늘 연중 제16주일에 마르코복음서 6장 30∼34절이 보도하고 있습니다.

 

외딴 곳으로 피해 쉬고자 했지만


이렇게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피하여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나셨지만, 사람들은 여러 동네에서 모두 달려 나와 앞질러서 육로로 예수님의 휴가 장소에 먼저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마르 6, 32∼33 참조). 결국 예수님의 휴가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할 때 예수님께서 느끼신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제가 과거에 본당 사목자로 지내던 시절에 대축일이나 바쁜 주일을 지내고나서 하루쯤 스트레스를 좀 풀려고 등산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산행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어느 교우분의 피치 못할 부탁이 있어서 등산 계획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라든가, 또는 명절이나 공휴일을 맞이하여 일반사람들처럼 한가한 시간을 가질 수도 없이 합동미사나 혼인미사를 해야 할 때, 저에게는 일반인들이 느끼지 못하는 피곤감을 느끼던 추억이 있습니다.

 

그렇듯 예수님께서도 오늘 복음서에서 쉬러 가셨다가 거기에 앞질러 몰려온 수많은 사람들을 보시면서, 공휴일이 저에겐 오히려 더욱 피곤한 날이 돼버릴 때의 저의 심정과 같은 마음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서는 예수님의 심정이 그렇지 않으심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마르 6, 34)

 

그들 가운데 잃어버리는 양이 하나도 없을 것


여기서 오늘의 제1독서 예레미야서 23장 3∼4절의 말씀이 연상 됩니다. “쫓아 보냈던 모든 나라에서 살아남은 양들을 다시 모아들여, 그들을 돌보아 줄 목자들을 세워 주리니,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 잃어버리는 양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예레 23, 3∼4) 이 예언은 오늘 여기저기서 모여온 군중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신 예수님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만나려고 모여온 그 군중은 어떤 사람들이었겠습니까? 여기저기서 구름같이 예수님을 찾아 몰려온 그들은 폭군 헤로데의 치하에서, 그리고 당대의 로마제국에 빌붙어 백성의 피를 빨던 기득권자들과 위선적 종교 지도자들의 횡포로 시달리던 사람들이 해방의 새로운 삶, 즉 복음을 제시하신 예수님을 추종하고자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한 군중을 목자 없는 양떼처럼 측은하게 여기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조용한 휴가 계획을 취소하실 수밖에 없으셨지요. 예수님께서 쉬실 틈도 없이 만나주셔야 할 만큼 이제 하느님 나라의 백성은 불어나는 것입니다. 이 백성은 어떠한 백성이겠습니까? 이집트의 폭정을 떨치고 오로지 하느님만 의지하여 광야의 길로 나아온 이스라엘 백성(탈출 5, 1 참조)과 같이 오로지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그 외딴곳, 즉 거기 광야처럼 한적한 곳, 거기에 가면 오로지 주님을 만날 수 있다고 믿고 달려온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아니겠습니까?

 

탈출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아마 도시생활의 혼잡과 직장의 스트레스를 씻어보려고 피서지를 찾는 휴가객들의 모습에서도 하느님의 백성이 외딴곳 광야에 나간 것과 같은 일종의 탈출시도를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얽매이던 곳으로부터의 탈출인 것입니다. 그러한 탈출은 그 의도대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야 합니다. 탈출이란 지금까지의 틀 속에서 맴돌던 어떤 관성을 끊고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는 행보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발돋움으로써 낯설지만 어떤 만남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탈출이란 하나의 새로운 지평을 향한 모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지평을 일컬어 오늘 성경의 표현대로 외딴곳 즉 ‘광야’라 할 수 있습니다.

 

광야의 체험이란


그 ‘광야’란 거기서 만나는 대상도 그리고 나 자신도 서로가 낯선 처지를 뜻합니다. 그래서 문득 나 자신도 나 자신에게 낯설어지는 그 외딴곳의 느낌, 그것이 곧 ‘광야의 체험’입니다. 휴가지에 가서 만나는 사람들이 낯설고 그리고 낯선 사람들 가운데에서 나 자신도 낯선 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평소에 보지 못하던 나 자신의 모습이 나 자신에게 낯설게 나타나게 됩니다. 외딸음에 대한 체험이지요. 이러한 외딸음의 체험 가운데 가장 소중하게 집히는 것은 곧 나 자신입니다. 그러한 나 자신을 찾아 나서는 것이 곧 휴가입니다.

 

무절제한 휴가를 경계해야


그렇다면 그러한 휴가 중에 번잡한 사람들의 물결에 휩싸여 북적댄다는 것은 참다운 휴가라 할 수가 없습니다. 짜증나는 도시의 혼잡을 피하고자 그리고 직장생활의 과중한 스트레스를 씻어보고자 떠나왔는데, 휴가지에서도 역시 다중의 무질서로 인한 혼잡과 사람들과의 부딪침으로 스트레스를 당한다면 그걸 어찌 휴가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더욱 스트레스를 푼답시고 무절제한 음주나 놀이로 과도한 체력소모를 하게 되면 그걸 어찌 푹 쉬는 휴가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 되고나서는 이른바 휴가 증후군으로 정신력까지 탈진의 지경에 이르게 되지요.

 

한국인의 휴가문화


그래서 저는 우리 한국 사람들의 휴가 문화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휴가라 하면 유원지(피서지)라는 곳으로 몰려가서 먹고 마시며 무절제한 놀이를 위주로 지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좀 더 문화적으로 향상된 삶의 추구를 해야 하는 것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한국인들도 이젠 어떤 역사 탐방이나 미술 음악 또는 연극 등의 예술을 테마로 하는 휴가 여행을 추구하여 자신의 삶에 풍요를 더하는 양상으로 점점 변하기를 기대해 봅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에게는 그러한 문화적 테마의 휴가 여행에서 더 나아가 그야말로 나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찾아보는 기도의 짬을 충분히 가져보기를 권장해드리는 바입니다. 이러한 저의 제안에 실효성을 기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전반적 의식 전환’을 전제로 하고 ‘교회의 적극적인 계몽과 계획적 배려’가 요망된다고 여겨집니다.

 

템플 스테이에 대한 묵상


일례를 들어서 불교는 전국의 유명산과 고즈넉한 곳에 사찰을 소유하고 있어서 불교 신자들이 거기서 심신을 달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불교의 사찰들에서는 그 소박한 시설로 스스럼없이 사람들을 맞이하는 관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템플 스테이’라 하여 사찰에 며칠 머물며 심신을 정화하는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천주교의 성당은 대부분 도시와 그에 준하는 동리에 세워져 있어서 세간의 번잡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분위기이고, 피정 센터나 수도원 등의 기관시설이라는 것들도 평범한 사람들이 접근하기에는 너무 권위적이고 긴장된 분위기일 뿐만 아니라 스스럼없이 거기 머물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빗장이 채워진 시스템의 철옹성 같기만 합니다. 그러므로 지친 심신으로 교우들이 문득 찾아가 머물며 기도의 시간을 지내고 싶어도 막상 찾아갈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저는 하부내포 지역의 옛 교우촌들을 재발견하여 순례지로 가꾸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옛적의 교우촌은 사실상 박해를 피하여 교우들 끼리 몇 가구 모여 살던 산골입니다. 매우 외진 곳이었지요. 오늘날까지도 오지에 속하는 곳들인데 길이 통하지 않아서 폐동되어 밀림처럼 우거진 곳도 있습니다. 그걸 열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부내포 '거칠' 성지의 옛 교우들


만수리에서 멀지 않은 ‘거칠’이라는 산골이 대표적인 오지입니다. 그 ‘거칠’에 숨어 살다가 발각되어 끌려가 치명한 교우들이 많습니다만, 지금은 그 산골 일부가 밤나무를 재배하는 곳으로 변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산봉우리를 북쪽으로 넘으면 옛 교우들의 집터와 무덤들이 버려진 채 모 대학교의 산림실험지가 되어 있는 ‘새재 상터’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 너머의 계곡에 ‘안나마리’라는 옛 교우촌이 있고, 그 곳에서 능선을 구불구불 넘어 험준한 산비탈을 만나는데 거기 또한 숨어 살다가 끌려가 치명한 교우들의 마을 ‘옥가실’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우촌에 지금은 외지인들의 별장 혹은 개신교의 기도원이 들어서 있습니다.

 

'고갈'과 '대내'


‘거칠’에서 남쪽 산봉우리를 넘으면 ‘고갈’이라는 산골 마을과 ‘내대’라는 오늘날의 제법 큰 마을이 있습니다. 지금 제가 살고 있는 만수리에서 아주 가까운 마을입니다. 옛적에 ‘내대’의 산골은 프랑스 선교사 프티니콜라 신부님이 조선말을 익히며 인근 교우들을 돌보던 곳입니다. 체포될 위험을 만나서 ‘고갈’에 피신한 사연이 그분의 편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결국 병인(1866)년에 치명하셨고, 오늘날까지 우리 교회는 이런 사연을 망각 속에 묻어두고 있습니다.

 

도앙골과 삽티마을


만수리 앞의 아미산 준령을 따라 남쪽 능선이 솟은 월명산의 계곡에 ‘도앙골’이 있습니다. 거기 숨어 살던 교우들 집에서 사목활동 최초 보고서를 작성하신 최양업 신부님을 기리는 기념비를 제가 몇 년 전에 세웠지요. 그 ‘도앙골’에 숨어 살던 많은 교우들이 병인(1866)년에 체포되어 치명하였습니다. 그곳과 내통하던 교우들의 또 다른 마을이 고개 너머의 ‘삽티 마을’입니다. 그 ‘삽티 마을’에 병인(1866)년 치명하신 황석두 성인의 유해가 안장되었지만, 우리 교회는 그 사실을 지금까지 망각해왔지요. 그분의 조카들이 그 산골에 교우촌을 이루던 ‘삽티 마을’에 길을 내어 순례자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 계곡에 제가 이 여름 동안 토목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 ‘삽티 마을’의 뒷산을 넘으면 보령호의 상류 계곡이 시작되고, 그 계곡 아래 보령호 끝자락의 옛 산골 마을이 ‘서짓골’입니다. 병인(1866)년에 치명하신 다블뤼 안토니오 성인 주교님과 두 분 성인 신부님과 장주기 요셉 성인께서 안장되신 곳이지요. 재작년(2013년)에 제가 그곳 작은 국유지에 그 성인들을 기리는 제단과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숨어 살며 네 분 성인의 유해를 천신만고로 모셔 안장했던 교우들이 또한 병인년말에 치명한 후 잊히어진 ‘서짓골’엔 지금 무속인 굿당과 서울의 모 대학교 교수의 별장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부내포의 무수히 많은 산골 성지들


이렇게 열거한 곳들 밖에도 또 무수히 하부내포 지역 산골 여기저기 옛 교우들의 흔적이 묻히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하부내포 지역에 대해서 오늘 주일 강론에 뜬금없는 홍보(?)를 하는 저의 까닭이 있습니다. 우리 천주교 신자들이 마음의 부담(긴장) 없이 찾아갈 수 있는 곳들을 많이 마련하자는 제안을 하고 싶은 때문입니다. 이른바 ‘성지개발’이라는 사업(?)을 많이 하고들 있습니다만 그건 대개 으리으리한 시설을 갖추는 것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시설들은 일시적 구경거리나 잠간 스치는 행사를 위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거기 찾아가 느슨한 마음으로 머물러 지낼 수 있는 ‘성지’가 없습니다. 


저의 이러한 관찰에 따라 우리 하부내포 지역의 오지에서 만나는 옛 교우촌들이 우리 신자들이 찾아와 부담 없이 머물며 신앙인으로서의 ‘나 자신’을 찾아볼 수 있는 매우 적합한 곳들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옛적 박해시대에 교우들이 숨어 살던 그 오지에 며칠씩이라도 부담 없이 머물 수 있다면 진정한 의미의 휴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휴가를 원하는 교우들께서 오셔서 지낼 수 있는 ‘외딴곳’으로서의 적지가 하부내부 지역에 많습니다. 앞에 열거한 곳들이 그러한 곳들입니다. 그러한 곳을 교우들께서 찾아오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그곳의 땅을 확보해야 합니다. 그러한 땅을 확보하기 위해서 저는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저 개인적인 능력으로써는 너무 한계에 부딪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적극적인 ‘계몽과 계획적 배려’를 요망하고 있습니다만 귀기우려 들어주질 않습니다. 오히려 이른바 ‘성지개발’(?)이라 냉소적으로 일컬으면서 ‘성지개발사업’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질책하는 교회인사들도 계십니다. 그러한 분들에게 저는 다음과 같이 반문합니다. “세상살이에 심신 피곤해진 교우들이 찾아갈 수 있는 곳을 많이 마련하자는 게 사업적인 성지개발인가요?”

 

시스템으로 강요된 프로그램에 대한 단상


‘교우들이 찾아갈 수 있는 곳’, 그곳이 곧 참다운 의미의 ‘피정 센터’입니다. 철옹성 같이 위압적인 건물과 긴장을 주는 시스템으로 강요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전국의 수도원과 교구 단위의 이른바 ‘피정 센터’들을 찾아서 교우들이 부담 없는 마음으로 감히 며칠씩 머물 수 있겠습니까? 불교의 사찰처럼 ‘부담 없이 머물 수 있는 곳’을 천주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한 곳을 조성할 수 있는 곳들이 우리 하부내포 지역의 산간 오지에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하부내포의 옛 박해시절 오지 교우촌에 이른바 ‘템플 스테이(사찰에서 지내기)’처럼 우리 천주교 신자들께서 머물며 ‘나 자신’을 찾는 휴가가 가능할 날이 오기를 기대해봅니다. 그런 날에 우리 교우들께서 스스럼없이 머무는 프로그램을 저는 ‘생추어리 스테이’라 하고 싶습니다. ‘Sanctuary Stay’ 즉 ‘성지에서 지내기’입니다. 약자로 ‘SS’라 할까요. 하부내포 오지 교우촌에서 체험할 그 ‘SS’는 그래서 ‘외딸음의 체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외딸음의 체험’이 진정 ‘휴가’입니다.

 

생추어리 스테이


그렇듯이, 하부내포 지역의 외딴곳에서 ‘성지에서 지내기’를 체험할 수 있을 때 진정 거기 찾아올 교우들의 영혼에 풍성한 양식이 제공되리라 믿습니다. 박해시대에 하부내포의 오지에 모여 살던 교우들처럼, 이집트의 폭정을 떨치고 오로지 하느님만 의지하여 광야의 길로 나아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 친히 만나를 내려 먹여 주셨습니다(탈출 12-16장 참조). 그렇듯이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 외딴곳으로 몰려온 사람들을 목자 없는 양들처럼 가엾이 보시고 당신의 피곤을 무릅쓴 채 가르쳐주시고 먹여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이렇듯 당신의 백성에 대한 예수님의 애틋한 배려는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을 이루고 있음을 성경은 이어서 보도하고 있습니다(마르 6, 35∼44 ; 요한 6, 1∼14 참조).

 

오지에서 만나는 예수님


그렇듯이 오지에서 예수님을 만난 백성은 그분과 함께 하는 새로운 삶의 체험을 얻게 됩니다. 그 백성이 얻게 된 그 체험에 대해서 저는 ‘예수님과의 피정’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바쁘신 활동 중에 제자들과 함께 외딴 곳으로 휴가 가셔서 피정을 하시고자 하셨는데, 거기 수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그 피정에 참가하러 모여온 것입니다. 조용한 곳으로 피해 간다는 뜻의 ‘피정(避靜)’이 그렇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휴가란 주님과 함께하는 피정과 같은 것이라면 참 좋겠습니다. 그러한 피정 즉 참다운 의미의 휴가의 기회를 우리 하부내포 지역에서 교우들께서 얻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면서 저는 부지런히 ‘성지 개발’을 해야겠습니다. 그래서 여기 찾아오는 주님의 양들이 생명의 양식으로 풍부한 영양보충을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나 자신을 찾아 나선 외딸음의 체험은 새로운 삶의 지평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새 삶의 지평은 다음 주일부터 읽을 요한복음서 6장의 빵의 기적과 더불어 참 생명의 양식에 대한 체험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체험에 대한 성 암브로시오 주교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새겨들으면서 이 휴가의 계절을 지내기로 합시다.

 

“게으른 이들이나 세상의 명예에 둘러싸여 복잡한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은 생명의 양식의 가치를 제대로 모릅니다. 그리스도를 ‘외딴곳’(마르 6, 31∼35 ; 마태 14, 13 ; 루카 4, 42 ; 9, 10 ; 히브 13, 13∼14 참조)에서 찾는 이들이 생명의 양식의 소중함을 가장 잘 압니다.”(암브로시오, ‘아가 강해’ 3, 1∼2)습니다.


원문출처: 하부내포성지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63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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